인디언 서머와 꽃샘추위
이태호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신임 사무처장
1.
일기예보에 따르면 내 주엔 꽃샘추위가 온다고 하네요. 영상 10도를 오르내리던 우수 경칩의 날씨가 다시 영하 5도 이하로 곤두박질 칠 거랍니다. 올해 겨울이 유난히 추웠던 탓일까요? ‘꽃샘추위’라는 말이 낯설게만 느껴지고, 맹렬했던 한파가 좀처럼 물러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습니다. 며칠 따뜻했던 날씨가 오히려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였던 것처럼 느껴질 지경입니다.
2.
인디언 서머는 가을이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전 반짝, 따뜻한 날들이 며칠간 이어지는 경우를 일컫는 말입니다. 무언가 사라지는 것들이 남기는 안타까운 여운을 은유하기 위해 ‘인디언 서머’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지요. 한편, ‘인디언 서머’라는 표현에서는 북미 인디언들이 겪어야 했던 쇄락의 운명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용어를 접할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짠해집니다.
3.
서부 개척시대 이후 북미 인디언들의 역사를 잘 정리한 책 중의 하나로 디 브라운Dee Brown이 쓴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1970)를 꼽습니다.
운디드 니(Wounded Knee, 상처입은 무릎)라는 인디언 지명은 현재 미국 사우스 다코다 주에 위치한 작은 냇가 주변을 일컫습니다. 그곳은 라코타수우족의 전설적인 추장인 미친 말(Crazy Horse)의 유골이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 미친 말은 앉은 소(Sitting Bull)와 더불어 1876년 리틀빅혼(Little Big Horn)강 전투에서 악명 높은 제7기 병대를 전멸시킨 인디언 영웅입니다. 하지만, 리틀빅혼의 승리는 ‘하얀 종족’들에 맞서 북미 인디언들이 거둔 사실상의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인디언 섬머’같은 승리였던 셈이지요.
미친 말은 이듬해인 1877년 가을, 부족을 이끌고 투항합니다. 대신 그는, 그들이 신성시 하던 검은 언덕(Paha Sapa) 지역에서만큼은 살 수 있게 해주겠다던 1868년 약속을 존중해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살해되었고, 그 부족들은 미주리강 주변의 척박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당하고 말았습니다.
1890년 겨울, 추장 앉은 소가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서 피살된 직후, 라코타 족 일부는 다시 탈출을 시도했지만, 운디드 니에서 백인군대로 이루어진 추적자들에 의해 대부분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포함한 150여 명이 학살된 이 사건을 ‘운디드 니 학살’이라고 부릅니다.
4.
유럽인들이 도착할 무렵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최소한 500만 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만, 현재는 22만 명 남짓 생존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학살이나 추방이 인구의 극적인 감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지만, 학자들은 유럽인들이 옮겨간 악성 병균에 의한 몰살이 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평가합니다.
인디언들에게는 백인들이 옮겨간 병균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중세와 근대초기 유럽인들은 인디언들과 달리 몸을 씻는 것을 터부시했었고, 북미대륙에는 없는 각종 악성 돌연변이 병원균이 유럽의 도시에서는 번성했었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은 종종 인디언들을 ‘더러운 붉은 것들’이라고 비하했지만 역사는 유럽인들이야말로 더러운 종족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5.
“이 마을은 어떤 나쁜 마술적 주문에 걸린 것 같았다. 병아리 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렸고 소나 양들이 병으로 죽어 갔다. 사방이 죽음의 장막으로 덮여졌다. (중략)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으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봄은 왔는데 침묵만이 감돌았다.”
– 레이첼 카슨 Rachel L.Carson, <침묵의 봄> Silent Spring (1960)* 중에서
살충제와 항생제는 서구문명이 이루어낸 개가로 인식되어왔습니다. 서구인들은 자연을 인위적으로 가공하고, 이후에 발생하는 문제들도 인위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북미 인디언들은 만물에는 위대한 자연의 정령, 와칸 탕카WAKAN TANKA이 깃들어 있으므로 땅을 소유한다거나 약탈함으로써 자연의 조화로움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6.
수우족 달력에 따르면 3월은 암소가 송아지를 낳는 달입니다.
올해 우리는 꽃샘추위에 감사해야 할 지 모릅니다. 따뜻한 봄이 완연해지면, 이제는 정적만이 감도는 축사 너머 산등성이에서 미처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많은 돼지와 소들의 시신들이 풍선처럼 떠오르고, 진홍색 침출수가 터전을 잃고 떠도는 와칸 탕카의 눈물처럼 흘러내릴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추신 제가 지난 2월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결정에 따라, 신임 사무처장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공식 임기는 제17차 총회가 열리는 3월 5일 이후 시작됩니다. 어깨가 무겁습니다. 좀 더 따뜻하고 단단한 참여연대가 되도록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 이태호
* 레이첼 카슨의 저서, 『침묵의 봄』은 무분별한 화학물질 사용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에 경종을 울린 역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책은 조화롭고 아름다운 한 마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 발생하여 점점 죽음의 공간으로 변해버린다는 짤막한 우화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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