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2년 05월 2012-05-02   1737

[문화] 막말에 대하여

막말에 대하여

 

 

이택광 문화비평가

 

최근 ‘막말’이 화두로 떠올랐다. 김용민과 김구라 모두 과거에 성인용 프로그램에서 했던 말들이 문제가 되었다. 이들이 했던 막말이 과연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따지는 것은 도덕적인 범주에 속하고, 도덕적 범주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준점을 제시하는 것 외에 뾰족한 대책은 없다. ‘막말’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도덕적 판단은 이미 끝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왜 그 발언들을 미리 ‘막말’로 규정하고 들어갔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 의문 속에 파고 들어가야 할 문제의식이 숨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문제가 된 김용민과 김구라의 발언들은 과거의 것이다. 이미 지나간 발언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비록 10여 년 전에 이루어진 발언이라도, 언제든지 과거의 것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막말 파문’을 가능하게 만든 기술적 조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인터넷 공간이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 구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일단 이루어진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서버를 파괴하지 않는 한, 한번 일어난 일은 영원히 어딘가 구석에 감춰져 있다. 누군가 표적이 된다면, 아무나 접근해서 숨겨진 비밀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시간을 뛰어넘은 투명한 조건은 궁극적으로 기억에 의존하는 도덕의 판단을 무색하게 만든다. 누구도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 먼지는 너무도 선명하게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반복 가능하다.

 

중구난방 

 

‘막말 프레임’ 속에서 싸우기

물론 이런 현실 자체가 ‘막말 파문’의 원인일 수는 없다. 말 그대로 인터넷이라는 기술 환경은 조건일 뿐이다. 이 조건 위에서 다른 도덕의 구성이 이루어진다. ‘막말’은 이 구성의 맥락에서 나타난 기표이다. 김용민과 김구라가 모종의 표적이 아니었다면, 이들의 발언이 기억의 저편에서 불려 나와서 현시될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이 표적은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다. 죽고 죽이는 전쟁의 상징화가 바로 부르주아 정치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김용민과 김구라는 어떤 정치적 이유로 표적이 되었기에 ‘막말’이라는 모자를 쓰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정치적인 목적으로 ‘막말’을 규정하는 행위 자체를 올바르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일정하게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이 완전하게 정당성을 얻고자 한다면, ‘막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한다. 그렇게 되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막말 파문’에 비판적인 입장도 심리적 부인denial 이상으로 김용민과 김구라를 옹호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같은 프레임에서 싸워야한다는 문제가 생기고, 막말은 나쁘지만 지금 그 문제를 들추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순한 시도라는 정도에서 비판 수준을 멈출 수밖에 없다.

 

jolie 

개념 연예인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 시대다. 한국판 셀러브리티 에이드인 ”소셜테이너’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현상이다. 사진은 대표적 셀러브리티 에이드 활동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아프가니스탄 방문 장면.

 

소통의 코드가 바뀌었다

개념 문제는 이들의 발언이 과거에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문제가 되었다는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들의 발언을 ‘막말’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합의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진실이다. ‘막말’의 내용이 이를 이용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적절한 것’으로 승인해버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동일하게 부당한 것이라면 적절한 것이 낫다는 논리가 여기에서 살아 숨 쉰다.

 

  누가 옳은지 따지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왜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막말’을 했던 과거의 행위가 지금 와서 심판을 받아야하는 것인지를 따지는 것은 어렵다. 한국 사회의 소통 코드가 바뀌어버린 것을 여기에서 감지할 수 있다. 파격과 직설이 호응을 받던 시절이 지나버린 것이다. 한때 통용되었던 ‘잡놈’이 이제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되었다. 연예인도 ‘딴따라’에 머물지 않고 ‘개념 연예인’이 되었을 때 대중의 지지를 받는 시대인 것이다. 한국판 셀러브리티 에이드Celebrity Aid인 ‘소셜테이너’가 이를 보여준 대표적인 현상이었다.

 

  소통의 코드가 바뀌는 것은 합의의 구조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 징조는 2002년부터 나타나 2008년 촛불에 와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2002년 월드컵이 ‘대한민국’을 발견한 계기였다면, 2008년 촛불은 ‘시민’을 찾아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민은 누구인가? 국민도 대중도 아닌 이 시민은 수도권에 거주하면서 ‘표준적인 삶’을 추구하는 중간 계급이다. 이 표준적인 삶의 기준은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미국 대도시에 맞춰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상상적 이미지가 욕망의 불만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런 표준화가 국가에게 더 강렬하게 자기의 몫을 주장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 소통의 코드에 적응하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으로 나눠져 있다. 지난 총선에서 투표장에 나선 54.3%보다도 사실 45.7%가 이 코드에 잡히지 않는 구성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막말’을 ‘막말’로 인준한 그 조건 위에서 아무런 의사를 밝히지 않은 존재들인 것이다.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고 이들을 ‘없는 존재’라고 엄포를 놓는 것은 옳지 않다. 이들이 곧 이 사회의 윤리를 바꿀 숨어 있는 목소리들이기 때문이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