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2년 06월 2012-06-04   2475

[기획] We, the People! 세계를 뒤흔든 촛불들 – 라이프찌히(1989)에서 월스트리트(2011)까지

We, the People!

세계를 뒤흔든 촛불들 –

라이프찌히(1989)에서 월스트리트(2011)까지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피플파워21Peoplepower21은 참여연대 웹사이트 주소다. 21세기가 시민이 주도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세기가 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담겨있다.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21세기를 연 기념비적인 국내외 시민행동의 사례를 모아봤다.

 

MONTAGSDEMO, LEIPZIG

“우리는 인민이다. SED(동독공산당) 집권을 종식하고

자유투표를 보장하라!”는 피켓을 든 시위대.              

 

 우리가 인민이다 (We are the people1))!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사회주의권 해체의 한 상징이 되어버린 이 역사적인 사건은 크게 주목받았지만, 이 드라마의 도화선이 된 라이프찌히에서의 촛불집회는 크게 주목받지 못해왔다.

  베를린 장벽 붕괴가 시작되기 한 달 전인 10월 초까지만 해도 동베를린 등지에서는 아직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프찌히에서는 달랐다. 10월 9일 오후 5시, 라이프찌히의 니콜라이 교회에는 8,000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사회주의 체제 개혁을 위한 시민 모임인 ‘새로운 포럼Neues Forum’이 개최하는 월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교회 안팎에서 비밀경찰, 무장경관, 보안군이 진압명령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 전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났던 시위대에 대한 유혈진압을 알고 있던 시위대에게 교회 밖으로의 행진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 밖으로 나섰다. 그들의 손에는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동독공산당 집권 종식과 자유 투표 보장을 주장했다.

 
  일단 행진이 시작되자 경찰의 무력 시위에도 아랑곳 않고 대열이 급격히 늘어났다. 행진이 시청 앞을 지날 때에는 최소 70,000명의 인파가 합류했다. 압도적 다수의 평화행진에 놀란 무장경찰과 보안군은 동독 공산당 정부의 무력진압 명령 집행을 포기했다. 다만, 일부 비밀경찰들이 사복을 입고 시위대에 잠입해 폭동을 유도하려 했지만, 시위대는 ‘비폭력’을 외치며 그들을 성공적으로 고립시켰다. 2주 후인 10월 23일, 라이프찌히 시청사 앞에는 30만 군중이 운집했고 동독의 공산당 독재가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라이프찌히의 시민들은 미국이나 소련같은 외부세력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사회주의 체제를 민주적인 체제로 개혁하려 했다. 비록 한 달 뒤 이어진 베를린 장벽 붕괴의 충격과 독일 통일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들의 개혁 요구는 파묻히고 말았지만 ‘우리가 인민’이라는 그들의 구호는 인민의 이름을 도용해 일당독재를 지속해온 사회주의의 모순에 대한 통렬한 비판임과 동시에 모든 종류의 권력에 대한 시민의 자결 선언으로서, 이후 한 세대간 이어질 시민행동에서 반복적으로 외쳐질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

 

이라크

2003년 2월 15일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지구적 행동의 날 행사가 미국 뉴욕 유엔보부 앞 도로를 비롯한 전세계 80여개 도시에서 동시에 개최되었다. 이날 전 세계에서 3600백만 명이 동참했고, 기네스북은 이 집회를 인류역사 이래 가장 큰 집회로 기록했다.

 

우리 이름을 도용하지 말라 (Not in our Name)!

 
사회주의 몰락 이후 미국 중심의 단일한 신자유주의 세계체제가 형성되었다. 8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전 지구적 수준에서 양극화와 적자생존의 질서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지배질서 역시 도전받고 있었다. 1990년대 유럽 각국에서는 냉전 기간 동안 형성된 권력형 비리의 실태가 드러나면서 독일 통일의 영웅 콜 서독 수상을 비롯한 유럽 여당의 대부분이 야당에 의해 교체되었다. 군산복합체들은 군비축소 압력에 직면했다. 국제사회에서는 기후변화, 빈곤, 외채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공조할 다자간 질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일련의 상황은 승자에 대한 저주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2001년 9월 11일 뉴욕 쌍둥이 빌딩에 대한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부시 행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즉각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9.11사건과 테러와의 전쟁은 전 세계의 상당 부분을 무장 갈등의 한가운데 휘말리게 했고, 각 나라 내부의 민주주의를 위축시키고 국제질서에서 패권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테러와의 전쟁은 1990년대 동안 자라나고 있던 민주주의와 다극화에 대한 하나의 반동이었다.

 
  9.11사건의 충격과 이에 대한 복수의 목소리가 거대한 쓰나미처럼 일어나던 2001년 9월 14일, 뉴욕의 한복판에서 램지 클락Ramsey Clark 전 법무부장관 등의 제안으로 300여 평화인권단체가 용감하게 나서서 아프간 침공 반대 시위를 시작했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계획이 구체화될 무렵인 2003년 초에 이르면 반전운동은 전 지구적 시민행동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2003년 2월 15일,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지구적 행동의 날 행사가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 앞 도로를 비롯한 전세계 800여개 도시에서 동시에 개최되었다. 이날 전 세계에서 3,600만 명이 동참했고, 기네스북은 이 집회를 인류 역사 이래 가장 큰 집회로 기록했다.

 
  반전 여론을 확산하는데 큰 몫을 담당한 것은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희생자 가족회’, ‘전쟁에 반대하는 이라크전 예비역 협의회’, ‘평화를 위한 공훈전몰자가족모임’ 같은 피해자 단체 혹은 군인 유관단체 구성원들의 실천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디 시헨의 사례이다. 2004년 봄까지도 평범한 주부였던 그는 아들 케이시 시헨이 이라크에서 사망하자 2005년 8월 초부터 약 한 달에 걸쳐 부시 대통령 별장인 크로포드 목장 앞에서 부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는 무기한 1인 촛불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자 하루 최대 1,500명의 시민들이 그녀를 지지하기 위해 방문했고 이 일로 인해 그녀는 일약 미국 반전운동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 후 신디 시헨은 전국을 돌며 철군운동-‘그들을 지금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라’ 투어-과 부시 탄핵 청원 운동을 조직했고 그의 호소력 있는 직접행동은 미국 반전운동이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이후 잃었던 활력을 되찾는데 크게 기여했다. 2005년을 변곡점으로 미국의 패권적 군사주의는 점령지인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격렬한 저항,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미국 내 여론 악화, 그리고 전 세계의 반전평화운동으로 인해 미국 본토, 그리고 전 세계에서 급격히 패퇴하였다.

 
  2002년 7월 미국 각계의 진보인사들은 ‘저항선서-우리 이름을 도용하지 말라(Pledge of resistance-Not in our name2))’를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우리는 미국 시민으로서 우리 정부가 우리의 이름을 도용하여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는 것에 저항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선언은 ‘인민’의 이름이 권력에 의해 도용되는 것에 대한 미국판 주권선언이라 할 수 있겠다.

 

이집트

2011년 봄. 한 해 동안 지구촌을 뜨겁게 달굴 거대한 시민행동의 열풍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몸살을 앓은 이슬람 세계-아랍과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 사진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독재를 무너뜨린 이집트 혁명. 

 
아랍의 봄, 유럽의 여름, 월가의 가을

우리가 99%다 (We are the 99% people)!

2001년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레에서는 세계사회포럼(WSF)이라는 세계사회운동 연례회의가 최초로 열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전 세계에 모인 활동가들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Another world is possible)!’는 구호 아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성찰과 개혁의 목소리를 외면할 빌미를 제공했다. 전쟁의 포연 뒤편에서 초국적 금융자본과 부자에 대한 규제는 더욱 완화되었고 반대로 시민과 노동에 대한 통제는 극적으로 강화되었다. 금융자본주의의 투기성, 약탈성은 더욱 극단화되는 가운데 재앙이 잉태되고 있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리먼브라더스 사의 파산을 도화선으로 유수한 초국적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파산이 이어졌다. 경제위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서 심화되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집권 직후 테러와의 전쟁 종식, 금융규제 강화와 부자증세, 의료 및 사회보장 강화 등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G20같은 국제적 협상 테이블도 미봉책 이상의 대안을 제공하지 못했다. 결국 1%의 탐욕이 불러온 재앙의 대가를 대다수 서민들이 고통스럽게 지불해야 했다.

 
  2011년 봄, 한 해 동안 지구촌을 뜨겁게 달굴 거대한 시민행동의 열풍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몸살을 앓은 이슬람 세계-아랍과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 새해 벽두 튀니지 시민들이 재스민 혁명을 통해 벤 알리 대통령의 23년 독재를 종식시키자, 2월에는 이집트 시민들이 일어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독재를 무너뜨렸고, 이를 계기로 아랍과 북아프리카 거의 전 지역에서 민주화 도미노가 본격화되었다. 이 시민행동의 들불은 그 해 여름 재정위기를 겪고 있던 유럽에 옮겨졌다. 스페인과 그리스 등지에서의 대규모 시위 사태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해 가을,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 뉴욕의 월가가 그 불길에 휩싸였다.

 
  월가 점령시위는 9월 17일 월가에 있는 쥬코티 공원(구 자유광장공원) 주변에 모인 약 30여명의 시민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의 주장과 요구는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1%만을 위한, 1%에 의한, 1%의 체제’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바로 99%다’라고 선언했다. 월가 점령시위는 평균 수백 명, 최대로 모인 경우에도 1,500명을 넘어서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금융자본주의의 탐욕과 모순, 그리고 부자에 치우진 정치인들의 처방을 고발하는 시민들의 발랄하고도 통렬한 직접민주주의는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과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시민들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창조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주장하면서 자율적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지도부를 가지지 않았고 제너럴 어셈블리라는 직접민주주의 방식의 회합을 통해 모든 일들을 결정했다. 현장에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비롯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SNS는 광장의 시민들과 이들에게 공감하는 전 세계의 시민들을 실시간으로 연결했다. 그 결과 이 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인 2011년 10월 15일에는 전세계 900여 개 도시에서 동시에 도심점거운동이 시도될 정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1989년 라이프찌히에 모였던 사회주의 개혁 시위대가 외쳤던 “우리가 인민”이라는 구호가 20여 년이 지난 후 보다 풍부해진 모습으로 이제는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 그리고 전 세계에서 다시 외쳐지게 된 것이다.

 

This is what democracy looks like. New York General Assembly at

월가 점령 시위는 시민들의 발랄하고도 통렬한 직접민주주의를 보여주었다.

사진은 뉴욕에서 열린 제너럴 어셈블리 현장.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기념비적인 시민행동의 사례가 해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의 평화적인 시민직접행동의 전통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독창적이고 역동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19876월항쟁은 1986년 일어난 필리핀 피플파워혁명과 더불어 압도적 시민의 진출로 독재권력을 평화적으로 퇴출시킨 대표적인 시민혁명사례로 알려져 있다.   


촛불

    
  2002년 촛불집회 역시 선구적인 시민행동의 사례로 재조명될 만하다. 2002년 촛불집회는 직접적으로는 같은 해 6월 13일 미군장갑차에 의해 여중생 2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 주한미군 재판부가 무죄를 평결한 데 항의하는 과정에서 촉발되었다. 2002년 11월 시작된 촛불집회는 12월 초 30만 명이 광화문 광장에 운집함으로써 정점에 이르렀고 이듬해 6월까지 지속되면서 이라크 파병반대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촛불집회는 특정 단체가 아니라 ‘앙마’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이 제안한 것이었고, 시민자유발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운동단체들의 관성화된 운동방식은 광장과 온라인 공간 모두에서 자발적 참여와 개입을 원하는 시민들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촛불집회의 현장에서는 그 어떤 단체도, 심지어 제안자인 앙마 자신도 특권을 누릴 수 없었다. 2002년 촛불집회는 당시 2000년 6.15선언 이래로 어렵게 형성된 한반도 해빙무드를 다시 얼어붙게 만들고 있던 부시 행정부의 패권적 군사주의에 대한 시민저항운동 성격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이 운동에는 외부로부터의 역풍이 이제 막 안착하기 시작한 한국 민주주의에 심각한 후퇴를 야기할 수 있다는 시민사회의 강한 우려도 반영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2002년 촛불집회는 노무현 정부의 출범, 그리고 2003년 2월 15일 전 세계에서 3,600만 명이 함께한 지구적인 수준의 반전평화 반패권 시민저항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2008년 5월부터 시작된 광우병위험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는 2002년 촛불집회의 참여민주주의적 진화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나아가 2011년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와 강정마을 평화비행기, 반값등록금 쟁취운동, 그리고 이 운동의 기반이 된 SNS 의사소통은 월가 점령투쟁의 여러 특징들3)을 이미 선취하고 있었다.

 

 

사족
통합진보당이 내홍을 겪고 있다. 하지만 지난 한 세대를 돌아보건대, 이 혼란은 도리어 진정한 민주진보의 시대가 도래할 조짐일 수도 있다. 공사를 앞둔 목수가 연장을 다듬듯이, 99%의 시민들이 시대의 전면에 나서기에 앞서 낡은 진보정당을 새로이 벼리는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위기에 빠져있고 시민들은 진보적 대안을 찾아 스스로를 조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1) 독일어로는 Wir sind das Volks!

2) 이 선서에는 에드워드 사이드, 노엄 촘스키, 수잔 서랜든, 제인 폰다, 존 쿠삭, 하워드 진, 제시잭슨 목사, 다니엘 엘스버그, 신시아 매키니 하원의원, 램지 클락 전 법무부장관 등 130여 명이 참여했다.

3) 이 운동들은 몇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단일한 지도부 혹은 특정 정치세력에 종속되거나 일방적으로 대변되는 것을 거부하는 자발적인 다중들의 참여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둘째, 행동하는 시민들은 서로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스스로의 매체와 공간을 창출하고 개발해왔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에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온라인 네트워크와 광장에서의 실천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셋째, 대개가 촛불집회나 점거와 같은 비폭력 직접행동 방식에 호소하면서 스스로를 해방하고 다양한 개성들을 조화시키는 축제적 공간을 창출한다. 넷째, 이 모든 특징들의 결과로서 정치세력이나 권력, 정치평론가, 나아가 시민행동을 조직한 활동가들의 판에 박힌 예측과 공식을 종종 뛰어넘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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