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2년 09월 2012-09-05   1647

[살림] 도시여자의 산골표류기

도시여자의 산골표류기
쐬주편

도시여자

한 남자가 있었어. 나보다 열 살 정도 더 많아. 20대 초반의 나이에 만났는데 30대 초반인 그를 딱히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몰랐어. ‘아저씨’라 했지. 함께 공부하고 책 읽고 토론도 하고. 술을 마시는 날에는 더욱더 깊고 긴 이야기를 나눴지. 아저씨는 소주를 쐬주라고 했어. 쐬주의 술맛이 더 좋대. 무슨 생각해? 엉큼하군. 그런 사이 아니야. 잘 들어봐. 아저씨가 자주 하던 말 중의 하나가 뭔지 알아? “나를 닮은 아이를 꼭 낳아야 할까.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렇겠죠. 여러 가족 형태가 있는 거겠죠. 사실 아저씨는 부인과 함께 임신을 위한 고생과 노력을 몇 년 동안 해오던 터였어. 마침내 부부는 아이를 가지는 데 성공했고 정말 예쁘고 건강한 딸을 낳았어. 진심으로 축하했어. 근데 문제는 그때부터야. 아저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헤죽헤죽 아무 때나 웃는 딸바보가 되더니, 가끔씩 안부전화를 나눌 때면 아이를 가지라고 강하게 권했지. 철부지 취급을 당했다고 생각한 난 슬슬 화가 났어. 우리가 그 많은 시간 나눴던 대화를 아저씨는 잊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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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저씨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아이에 대해 시큰둥했지만 오랜 시간 노력하여 아이를 가졌을 때의 환희와 아이가 하루하루 크면서 주었을 일상의 행복이 오죽했겠어. 상황이 다른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거야. 아저씨는 달라진 상황에서의 느낌을 이야기해줬는데, 나는 아저씨가 나를 구박하는 줄로 오해했던 거야. 다른 사람의 변화된 상황을 이해 못 했던 내가 정말 철부지인가 봐. 아기를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들린다고? 엉큼하고 답답하군. 또 잘 들어봐. 도시를 떠나 산골로 오니 생활 패턴이 달라져. 도시에서의 방식을 똑같이 유지하면서, 들이마시는 탁한 공기만 맑게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더군. 사소한 것이 다 바뀌어.

우선 시계보다 하늘을 바라보며 날씨를 점검하거나 예측하는 일이 많아졌어. 농사짓는 남자는 일기예보 맞추는 일에 온 힘을 쏟더군. 스마트폰으로 가장 많이 하는 검색이 일기예보인지도 몰라. 농사지은 지 나름 3년이 되어 남자가 지은 쌀, 고추, 감자, 배추, 가지, 오이, 들기름 등을 직접 공수 받다 보니, 마트에 가는 횟수가 줄었어. 가끔씩 시내에 나갈 때,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만나면 태워드리거든. 딱히 할 얘기가 서로 없는 듯해도, 날씨 이야기로 시작해 농사로 흐르는 대화는 끝이 나지 않아.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 할 이야기가 이렇게 많다니 참 신기해. 또 내가 학교 마을 도서관에서 일하잖아. 아이들이 오늘은 무슨 일로 싸우나 오늘은 무슨 일로 웃나가 나의 주 관심사가 되어 버렸어. 가끔씩 마을 공부방 선생님들과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면 2~3시간은 후딱 지나가더라고.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아이들의 취직이며 연애까지 걱정할 판이야. 예전엔 꿈도 꾸지 못했던 대화들이야. 운전을 좋아하는 내가 주로 차를 모는데, 남자가 옆에 타고 있는데 여자가 차를 몰면, 마을 분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때도 있어. 이런 부분은 좀 기가 막히긴 하지. 우리는 화목 보일러를 써. 나무로 난방을 하지. 도시에서는 버튼 하나로 도시가스를 쓸 수 있는데, 여기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불 보러 추운 밖으로 나가야 해. 내가 따뜻하기 위해서 바로 옆 사람의 노동력이 절실하게 필요해. 남자의 노동력이 내 삶의 질을 바꾸더군. 물론 도시에서 살다가 산골에 같이 와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나, 바로 여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빛을 발하기는 하지. 존재와 노동력의 교환이랄까.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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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게 편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산골에서 농사짓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사는 것을 보니, 함께 사는 것이 든든하고, 노동력이 집안의 자산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마음으로 느낄 때가 많아. 가끔씩 놀러오는 손님이 너무 반가워 ‘버선발로 손님 맞는다’는 느낌이 절절할 때도 있고. 손님의 몸이 건장하다 싶으면 ‘이 때다’ 싶어 뭐 시킬 일 없나 주위를 돌아보게 되고. 혼자 사는 사람 보면 빨리 시집장가 가야 할 텐데 하며 예전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남의 가족사 걱정을 내가 하고 있더라니까. 웃기지? 나도 내가 기막히기도 하고, 갑자기 나이 든 것 같아 속상할 때도 있어. 하지만 생활 패턴을 바꿔보는 것의 가장 큰 매력은 다른 시각을 가져보는 것 아니겠어?

‘아저씨 예전에 이랬잖아요. 지금은 왜 이래요?’라고 무턱대고 서운해 했던 아저씨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아저씨한테 연락을 해볼까 해. 같이 쐬주를 기울이면서 사는 이야기 나눠 보고 싶어. 좋아하는 사람과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그게 도시에서든 산골에서든 꼭 만들어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싶어. 내 나름의 힐링 타임인 셈이지. 오늘 시간 돼? 그럼 자주 마주치던 동료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한테 연락해봐. 올 여름 너무 더웠잖아. 이 무더위를 어떻게 이겨냈는지 친구 이야기 한 번 들어봐. 선선한 가을바람 안주 삼아 친구와 함께 쐬주를 기울이면 더 좋고.

도시여자
춘천의 별빛산골교육센터에 산골유학 온 도시 아이들을 돌보며 지낸 지 벌써 3년. 마음만은 성격만은 원하든 원치않든 여전히 도시여자.
 

*<살림>은 네 명의 필자가 번갈아 연재합니다.
도시여자 님의 글은 2013년 1월호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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