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3년 02월 2013-02-15   1695

[여는글] 빠름, 빠름, 느림

여는글

빠름, 빠름, 느림

김 균 참여연대 공동대표

 

운전대만 잡으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이 있던데, 나도 그런 편이다. 운전이 거칠고 뭣보다도 길 막히는 꼴을 참지 못한다. 차선을 이리저리 바꾸고 샛길을 찾아 잽싸게 움직여야 직성이 풀린다. 명절 귀향 때 고속도로가 막힌다 싶으면 국도를 들락날락거린다. 차가 느리다는 사실 자체가 싫고 또 남들보다 약간이라도 늦게 가는 게 뭔가 억울하고 잘못하는 것 같아서 늘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나중에 시간을 따져보면 국도나 고속도로나 그게 그거고, 샛길로 가나 밀리는 큰 길로 가나 별반 차이도 없다. 늦은 듯해도 진득하게 한 길로 가는 게 오히려 더 빠른 경우도 적지 않다. 옆자리에 탄 집사람의 똑같은 잔소리와 비아냥거림이 수십 년 되풀이되어도 이 버릇을 아직껏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201302_참여사회2월호

 

빨리빨리 병과 숏 메모리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운전뿐만 아니라 내 삶은 군데군데 ‘빨리빨리’ 버릇에 중독되어 있다. 예컨대 여행을 가도 한 곳에 느긋하게 머물지 못하고 빈 시간이 생길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듯이 이곳저곳 쉼 없이 돌아다니고, 산을 가도 얼마나 빨리 정상에 오를 수 있는가라는 등의 시시한 기록 갱신에만 관심이 쏠려 앞사람 뒤통수만 보고 걷는 야간 행군 같은 산행을 한다. 휴대폰도 필요보다는 시류에 뒤지지 않겠다는 조급증 때문에 새 제품만 나오면 즉각 바꿈질이다. 또 뭔가에 늘 바빠 눈앞의 화급한 일들부터 서둘러 처리하다보면 정작 중요한 일들은 항상 뒤로 미루다가 결국에는 못하고 마는, 앞뒤가 뒤바뀐 이상한 하루하루에 끌려 다니며 살고 있다. 참 한심한 영혼이다. 그런데 사실은 나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빨리빨리’에 중독되어 있지 않을까. 먼 예를 들 것도 없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을 한번 보자. 정상적 사회라면 수십 년 걸릴 거대 토목사업을 삼사년 만에 해치우는 추진력과 속도, 또 그렇게 졸속으로 엄청난 일을 벌려도 아무 탈이나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고집스런 무지와 숏 메모리short memory는 참으로 놀랍다. 십여 년 전의 성수대교 붕괴와 연이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 우리 사회의 성과주의와 ‘빨리빨리’ 병을 우리가 얼마나 통렬하게 비판하고 반성했는지를 그새 다 잊어버리고 4대강 사업 같은 졸속공사를 또다시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 보면 우리는 잊는 것도 빠르다. 그래서 비꼬아 말하길 한국사회는 쉬 끓고 쉬 식는 양은냄비 같다고 한다.
누구는 이 ‘빨리빨리’ 심리를 한국인의 DNA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것을 고도성장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개발년대를 거치면서 사회가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바뀌다 보니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과 삶도 자연스레 그 속도와 변화에 적응하게 되었고, 또 이러한 빠른 변화에 대한 신속한 적응력, 즉 빨리빨리 심리는 다시 더욱 빠른 사회 변화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상승작용을 하였다. 그러니까 빠른 사회 변화와 빨리빨리 심리 구조는 쌍둥이 형제인 것이다. 그런데 변화에 잘 적응한다는 말은 지나간 것을 빨리 잊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과거의 행태를 잘 잊지 못하고 마냥 고집한다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더딜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 적응력은 숏 메모리에 다름 아니다.

 

변화 적응력의 득과 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자. 모든 사물에 양면이 있듯이 변화 적응력에도 양면이 있다. 긍정의 측면을 보면, 변화 적응력은 미지의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오늘을 바꾸고 혁신하는 도전적 기풍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경제가 IT산업에 경쟁력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 사회의 변화 적응력에 크게 기인한다. 기존의 것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고 새로움에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는 양은냄비 같은 심성이 급변하는 IT산업의 특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정체사회인 일본이 IT에서 죽을 쑤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또 하나, 진보적 가치 역시 새로움과 미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열린 자세에서 출발한다. 이에 비해 보수적 가치는 변화를 경계한다. 일테면 버크의 보수주의는 이성적 예측을 뛰어넘는 급격한 변화들이 초래할 불확실한 결과보다는 기존의 질서유지가 주는 확실성과 안정성에 자신을 의탁한다. 반면에 부정적 측면에서 보면, 숏 메모리의 사회는 과거의 기억을 쌓지도 않고 경험을 존중하지도 않는 사회이기에 부박하고 지혜롭지 못한 사회이기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빨리 변하는 사회는 살기가 불편한 사회다. 지나친 빠름은 삶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은 익숙함과 헤어지는 일에 익숙해지는 삶, 낯선 것들 속에서 부대끼면서 항상 긴장의 끈을 조여야하는 삶일 것이다. 아마도 사람의 변화 적응력에는 생물학적 그리고 문화적 차원에서 어떤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 한계를 넘으면 좋은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미 오래 전에 그 한계의 다리를 건너갔음은 분명한데, 그때 되돌아갈 다리를 함께 불살라버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개인 차원에서는 분명, 느린 삶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오래된 익숙함이 편안하기 마련이고 때때로 아름답다. 가끔가다 멈춰서서 삶을 뒤돌아 봐야 내 삶의 질서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느리게 가는 삶의 길이 의외로 더 빠르기도 하다. 오는 설날 성묘 갈 때에는 나이에 맞게 느긋하게 운전할 것이라고 다짐해본다. 하지만 막상 고속도로 정체를 만나면 또 고질병이 도져 국도를 헤집고 다니다가 집사람 타박이나 듣지 않을지 걱정이다.

 

김균
경제학자. 현재 고려대 교수이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노년이 지척인데 아직도, 고쳐야 할 것들이 수두룩한 미완의 삶에 끌려다니고 있음. 그러나 이제는 인생사에서 우연의 작용을 인정함. 산밑에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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