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에 여념이 없으신 김대중 대통령님께
전국 500여개의 공익적 시민운동단체로 구성된 저희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공천반대자' 67명의 명단을 발표한 후 정치권은 물론이고 온 나라가 뜨거운 열풍에 휩싸여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과 일본 등 주요 국가의 언론들 역시 낙천·낙선운동으로 조성된 우리 정치상황에 높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추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최근 상황을 '시민정치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언론들도 '선거혁명'이라는 개념을 주저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왜 이 시점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정치개혁이 모든 개혁의 근본이자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감히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정치개혁은 우리 정치의 잘못된 틀을 바꾸는 것인 동시에 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사람을 바꾸는 문제입니다. 개혁은 제도개혁과 더불어 사람의 교체를 동시에 요구합니다. 제도가 바뀌어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고, 마찬가지로 사람이 바뀌어도 사람의 행동을 규율하는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실효성이 없다고 봅니다. 모든 개혁이 그렇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치개혁은 다른 모든 개혁에 영향을 미치는 법과 제도를 관장하는 정치영역의 개혁입니다. 정치개혁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은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군사정권을 물리치고 문민정부를 선택한 바 있으며, 다시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서 국민의 정부를 선택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권력의 수평적 교체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엇 하나 바뀐 것이 없습니다. 지난 2년간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도 말했지만 정치개혁은 고작 선거법 협상 수준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나마도 선거법 협상결과는 국가기구인 중앙선관위가 요구한 선거자금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최소한의 합리적인 조치들마저도 모조리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스스로 약속했던 국회의원 정수 축소를 식언하는 대신 선거자금을 50% 증액하고 선거구를 개리맨더링하는 식의 안하무인격의 범죄행위를 자행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될 법한 일입니까?
대통령님께서는 우리 헌법을 잘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면서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권력의 유일한 주인이자 궁극적인 주인입니다. 그런데 헌법과 법률에 의해 일시적으로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가들이 국민 알기를 머슴처럼 알고, 국민의 소리를 옆집 개짓는 소리처럼 듣고 있습니다. 이런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만나면 서로 비난하고 날치기하고 싸우는 것 아니면 돌아서서 야합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리배 짓입니다. 누가 이런 정치를 지지할 것이며 누가 이런 정치가들을 존경하겠습니까? 그 결과 수십년 동안 참고 참았던 국민들이 더는 참지 못하겠다고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저희 총선시민연대는 정치단체가 아닙니다. 정치를 하려는 것도 아니며 정치권의 역할을 간섭하거나 대신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저희는 나라의 발전과 사회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익적 시민운동단체입니다. 그러나 국민주권을 위임받은 정치가들이 국민의 뜻을 거역할 때, 혹은 정치권이 나라를 위해서 담당해야 할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때 저희는 국민의 이름으로 언제든지 정치가들을 심판할 수 있는 합헌적 권리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저희의 이러한 행동은 대통령님께서 야당 총재시절 군사독재정권을 향해 분노하고 저항하셨던 것과 하등 다를 것 없는 것입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국민의 고유한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 할 것입니다. 과거에는 군사독재정권이 불의의 대명사였다면 지금은 정치권 전체가 국민들에게는 불의로 간주되고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저희 총선시민연대가 67명의 공천반대자 명단을 발표한 것은 국민의 한결같은 지탄을 받는 정치권이 스스로 자기를 개혁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여당도 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정치로는 새천년을 설계하고 주도하기는커녕 해결해야 할 수많은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 사회를 혼돈과 질곡 속으로 빠트릴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국민과 정치권의 관계에서 본다면 국민들이 정치권을 극도로 불신하고 배척하는 상황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정치가 극도로 불신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교정하지 못하는 불구의 정치상황에서 국민들이 정치권 밖에서 정치개혁의 한 방법으로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안될 인사들의 명단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저희는 감히 대통령님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저희 총선시민연대에서 발표한 공천반대자 명단을 몇몇 시민단체의 사사로운 의견으로 가볍게 보아넘기지 말아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희 행동을 치기어린 정치행위로 보시거나 일시적인 감정풀이로 생각하시지 말아 달라는 것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총선시민연대에 참여한 500여개 단체의 목표가 단순한 낙천이나 낙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충분한 정치개혁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 정치가 국민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소망스런 정치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낙천·낙선운동은 정치개혁을 위한 중요한 출발점일 뿐 결코 끝이 아닙니다. 저희가 공천반대자 명단을 발표하게 된 것은 저희의 판단이라기 보다는 국민의 뜻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희 시민운동단체는 그러한 국민의 절실한 염원을 제대로 읽은 것 뿐입니다. 공천반대자 명단을 발표한 후에는 국민들의 뜻을 더욱 강렬하게 체험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는 원래 저희가 추구했던 공익적 시민운동단체로서의 대의를 정치개혁으로 결집하여 국민들이 바라는 정치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타협하지 않고 국민적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대통령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저희가 이번에 발표한 공천반대자 명단은 15대 전·현직 국회의원에 국한된 것입니다. 저희는 이번 검토대상에서 제외된 나머지 출마예상자들을 대상으로 적절한 시기에 2차 명단을 발표할 계획입니다. 특히 14대 국회 및 그 이전의 전직 국회의원, 전·현직 관료, 기업가 출신 등이 주요 검토대상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는 이번 명단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부정부패"보다 "은밀하고 드러나지 않은 부정부패"의 정도가 말할 수 없이 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검토대상이 된 15대 국회의원 중에서도 추가로 부정부패 등 문제점이 확인될 경우 공천반대자로 발표할 계획입니다. 이것과 병행해서 공천반대자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 일체를 정보공개 차원에서 인터넷 등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공개할 뿐만 아니라 공천반대자 명단에는 빠졌지만 공천과정에서 특별히 유의해야 할 인사들의 명단은 별도로 작성하여 각 정당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저희 총선시민연대는 대통령님께서 총재로 계시는 새천년민주당 뿐만 아니라 한나라당과 자민련 역시 공천반대자로 분류된 인사들을 공천함으로써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되는 정치적 무리수를 자초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저희는 공천반대자들의 공천을 끝까지 반대할 것이며, 만일 그중 일부가 공천될 경우 선거가 끝나는 날까지 이들을 대상으로 한 집중적인 낙선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이들 부적격 인사들이 다시는 정치권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희 총선시민연대 뿐만 아니라 각 지역 차원에서 속속 결성되고 있는 지역협의회 역시 마찬가지이며, 국민들의 생각 또한 한치도 다를 것이 없다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교수단체, 노동단체, 학생단체들이 저희와 뜻을 같이 하기로 이미 결의한 바 있습니다.
대통령님께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대통령의 자리를 매우 중요한 자리입니다. 대통령의 판단이 결코 한 정당의 총재의 판단으로 머물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전국의 수많은 시민운동단체들과 국민들이 부적격 정치인 퇴출을 위한 낙천·낙선운동에 발벗고 나서게 된 경위를 충분히 이해하시어 대통령님께서 국민의 편에서 민주적으로 공천과정을 진행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촉구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자 여당 총재의 입장에서 국민의 정부가 지난 2년간 정치개혁에서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한 채 결국 국민적 저항을 받게된 배경을 면밀하게 검토하셔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정치개혁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도록 획기적인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간곡하게 당부드립니다. 저희 역시 정치개혁을 열망하고 정치개혁에 참여하는 모든 시민운동단체들과 협력하여 포괄적인 정치개혁을 위한 방안을 연구제시하면서 그것의 입법화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IMF라는 어려운 경제적 조건과 소수파 정당이라는 어려운 정치적 조건에서 개혁과 안정과 발전이라는 대단히 복잡하고 상충되는 국정과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대통령님의 확고한 개혁철학과 국정운영철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한국정치 50년사에서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정부라는 초발심으로 돌아가셔서 국민의 정부가 국민의 편에 서서 우리에게 부여된 긴급한 과제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시길 촉구합니다. 이런 전제 아래서 6월 이후 구성될 16대 국회가 존경받는 국민의 국회가 되고, 대통령님의 정부가 진정한 국민의 정부로서 거듭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0년 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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