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사무처 2000-02-28   720

[영화이야기] 박하사탕 씹어먹기

나는 왜 박하사탕을 보았는가. 그 달콤 싸한 박하사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박하사탕이 침샘을 자극한다면 영화 ‘박하사탕’은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시간의 역순배열,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에 도전장을 던지다.

지금 내 눈앞의 상황은 곧 다가올 영상의 결과이며 방금 지나간 것의 원인이다. 시간의 재배치와 분절로 새로운 시공간이 탄생하고 한 인간의 삶이 다르게 펼쳐진다. 그리고 시간을 거꾸로 흘러 천천히 움직이는 카메라는 바로 우리들의 시선이다. 나 아닌 타인을 현재부터 몇 걸음씩 거슬러 올라가며 자근자근 씹어먹는 과정, 박하사탕은 이창동식 김영호 알아가기다.

중요한 고비 때마다 나타나는 기차레일. 잘 보면 알겠지만 에피소드마다 기차와 기찻길이 등장한다. 기차는 박하사탕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정해진 철길을 달리는 기차, 기차는 김영호의 투영이다. 사랑하는 윤순임을 태워보내기도 하고, 사무실 여사원과 바람을 피울 때 한줄기 남은 그의 소시민적 양심처럼 희미하게 지나가기도 한다. 철길 위에 놓인 기차, 선택은 없다. 오직 길을 따라서 달려야만 한다. 다만 늦게 혹은 빠르게. 그렇다면 이 기찻길은 혹시 우리사회가 아닐까? 도망갈 수도 없는? 지난날(혹은 지금도) 우리 곁에는 수많은 김영호들이 있었다. 그들은 역사의 가해자였고, 역설적으로 최악의 피해자이다. 그 알량한 선택의 여지조차도 박탈당했기 때문에, 자초하고 있는 듯한 김영호의 그 고달픈 선택에 우리가 환멸을 느낀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다. 따지고 보면 그의 삶과 우리의 삶이 동시에 우리사회의 피멍 속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A-B-C-D-E-F의 구성과 F-E-D-C-B-A의 구성

마지막 장면에서 촌스런 행색의 김영호는 철길 아래서(영화의 앞부분에서 그가 자살했던) 꽃을 바라본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 눈물은 험난할, 또는 험난했던 그의 삶을 회고하거나 예견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그 순간 이미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 머지 않은 미래에 바로 그 철길아래서 이미 목숨을 던졌음을 알고 있다. 여기서 시간은 한낱 관념이자 약속이므로 시제의 일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김영호로 투사되고 잇는 실존의 절박성이다. A에서 F였던, F에서 A였던 간에, 서로간의 순서(시간)를 없애버린다면, 1979년의 봄은 김영호의 현재이고 1999년 봄은 그의 과거이다.

만일 영화 ‘박하사탕’이 빗나가기만 하는 비극적인 ‘관계’에 중심했다면 그것은 그저 또 하나의 신파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또 한 때의 참혹한 경험이 드리운 어두운 그늘 속에서 평생 헤어날 줄 모르는 어떤 실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영화가 우리를 이토록 할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콤 쌉싸롬 하기는커녕 우리를 괴롭게만 하는 영화, 우리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치는 영화, 전경과 군사독재에 대항에서 우리 밖으로만 돌팔매 하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우리의 정중앙을 향해 스스로 돌팔매를 맞게 하는 영화,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최소한 너덧 시간 동안 아무하고도 아무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한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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