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3-07-08   1239

<변희재의 미디어펀치> “방상훈씨, 정연주씨, 나와주세요!”

변희재 정치칼럼사이트 ‘시대소리’ 운영위원 pyein2@hanmail.net

수구파와 전면전을 벌였을 때, 개혁진영 최고의 아킬레스건은 어디일까? 논리와 명분 등에서 모두 압도하면서도 사실상 한국에서 아직까지도 수구세력이 대부분의 권력을 쥐고 있는 데에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마치 수구파들의 이데올로그 조갑제 <월간조선> 사장의 “성공한 모든 사람에게는 장점이 있다”는 말처럼, 수구세력이 명분 없이도 버틸 수 있는 무기 하나 정도는 갖고 있다. 나는 그 무기가 바로 텔레비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치개혁을 하자는 개혁세력이 있다고 치자. 이들의 최대의 적은 어디일까? 수구정당일까, 수구신문일까? 강하게 반발하는 적은 적이 아니다. 아예 무관심한 부류, ‘정치개혁이 된다 해서 나에게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라고 생각하는 말없는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난공불락 최대의 적이다. 사람의 에너지라는 것이 분명히 한계가 있다면, 텔레비전에 모든 에너지를 다 빼앗겨버린 시청자들이 다시 개혁의 선봉으로 나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따른다. 현재의 텔레비전이 반개혁적이고 수구적인 이데올로기로 채색되었다는 것 말이다. 이것이 곧 텔레비전에서 수구파들을 적극 지원한다는 뜻은 아니다. <조선일보>에 방송평론을 쓰며,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전여옥의 말을 들어보자.

“국민은 언론과의 전쟁도, 이데올로기도 도배된 방송도 원하지 않는다. 국민이자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안정된 사회 속에 풍요로운 삶’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TV도 그렇다. 국민들은 TV를 통해 70-80년대 한국 대학생들처럼 의식화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수준높은 교양프로그램과 삶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오락 프로그램, 그리고 치우침없는 정직한 뉴스를 원한다.”

나는 이러한 전여옥의 글을 보며 어떠한 공포감을 느꼈다. 230만 조선일보의 독자들 앞에서 대놓고, “우리 국민들은 개혁이고 뭐고 다 관심없고 오직 뇌없는 TV만을 원한다.” 이 말을 당당히 뱉은 것이다. 그럼 전여옥이 현재의 수구화된 뇌없는 TV에 만족을 하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TV의 몰상식과 무식함에 시청자들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800만 분의 1의 불가능한 확률로 로또복권 당첨이라도 되면 난 TV가 없는 곳으로 몸을 피하겠다. 눈 앞에 들이댄 촛불로도 얼마든지 심각한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이제 TV는 우리 사생활을 위협하는 ‘치명적 무기’가 되었다.”

이것도 전여옥의 말이다. TV가 없는 곳으로 피하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TV평을 왜 썼으며, 국민들이 뇌없는 TV를 원하느니 하는 말은 뭐하러 했던가? 그냥 TV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혼자서 TV 없는 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면 될 것을 말이다. 그 정도는 로또복권 당첨 없이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점도 그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전여옥의 이 두 문단의 글을 보고 얼마 전 KBS노보에 <누가 전여옥을 두려워하는가?>라는 글을 기고했었다. 그건 전여옥이 두렵다는 것의 역설적인 표현이었다. 전여옥 하나만의 객기가 문제가 아니라, 수구세력들의 TV에 대한 시각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무서운 것이다.

그 이후에 한나라당은 7월 1일 상임위를 통과한 2002 KBS 결산안을 부결시키는 행태를 보인 데 이어, ‘KBS 예산안 심의’를 위한 방송법 개정이라는 공영방송 말살 음모를 확대하고 있다. 아무래도 정연주 사장 부임 이후 KBS가 진정한 공영방송이자 개혁방송으로 재탄생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거슬린 것 같다.

그러더니 KBS의 <시민프로젝트 나와주세요>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주변을 배경으로 생중계를 하자, 이번에는 조선일보의 문화부 차장 김명환이 칼들고 나선다. 김명환은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기자실 개방 등에 관한 홍보운영안을 내놓자,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빗대며, 자신의 이념의 진보성을 과시했던 적이 있다. 어쨌든 그는 나치나 파시스트 정권은 거부한다는 선언을 한 것 아닌가? 그런데 나치의 유대인 학살보다 더 한 동족 살인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 집에서 법정 추징금 내라고 카메라 좀 들이댔더니 완전히 게거품 물고 KBS를 물어뜯는다.

“연희동 현장의 여자 리포터는 전 대통령측에서 아무런 응대가 없는데도 무려 5분을 끌면서 소득없는 생중계를 해댔다. “질질 끌며 떼쓰며 5분, 10분만 버텨라. 그러면 시청률이 나온다”는 일본 PD들 말과 똑같았다. 가십성 스캔들도 아니고 엄중하게 따져물어야 할 추징금 문제를 놓고 개그맨들이 포함된 패널들이 “나와주세요”를 합창했다. 잘잘못을 진지하게 따지려 하기보다는 공개 망신이나 주고 보자는 인민재판식 인격테러이고 집단린치다.”

김명환 기자의 열변을 듣고 보니 오히려 방송에서 이런 파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명환 기자는 일반적인 방송비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으면 되는 TV에 무언가 불편하고,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회의 치부를 적나라한 방식으로 드러낸 것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전여옥이 주문을 외운 “국민들은 TV를 통해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전제를 엎어버렸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국민들이 그것을 원하는 날에는 전여옥이든 김명환이든 끝장이라는 것을 생존 본능으로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텔레비전의 위력은 엄청나다. 신문 칼럼 하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 엄청난 TV를 개혁진영에서는 그냥 두손 놓고 보고만 있었다. 전여옥, 한나라당, 조선일보에서 어떻게 해서든 ‘뇌없는 TV’를 유지하려 온갖 수를 다 쓰고 있을 때도, 개혁진영에서는 TV가 깨어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비판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는데 인색했다.

이것은 단지 TV에 개혁프로그램에 관련된 콘텐츠 한두 개 제공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내면에 깊숙이 무의식으로 자리잡은 불평등, 차별, 폭력의 문제 등을 TV에서 교양은 물론 오락, 드라마, 쇼 등 그 어떤 프로그램에서 다뤄도 전혀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TV라는 매체의 가치와 위상을 가장 높은 곳까지 끌어올리는 초대형 프로젝트이다.

김명환 기자는 그의 글을 이렇게 정리했다.

“네티즌들 중에는 다음 번엔 정연주 KBS 사장 집에 찾아가 한밤중에 카메라를 들이대 보라”고 제언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왕 시작했으면 정 사장 자녀들의 병역의혹을 잘근잘근 씹으며 캐물어 달라는 냉소적인 요청이다. 이런 네티즌들의 요청에 KBS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의 김동민 교수가 네티즌을 대신해서 명쾌한 답을 주었다.

“KBS <시민 프로젝트 나와주세요>에 요청한다. 이왕 시작했으면 방상훈 사장 일가와 조선일보 간부들의 병역의혹을 잘근잘근 씹으며 캐물어 달라. 조선일보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도 진실을 밝혀달라. 그리고 이왕이면 박정희를 불러들여 기생파티를 했고, 김영삼씨가 당선 후 찾아가 인사를 했다는 흑석동 대저택의 비밀에 대해서도 밝혀달라. KBS는 덕수궁보다도 더 넓고 웅장한 방 사장 집에 카메라를 댈 기획을 하라.”

그래, 그렇게 갈 때까지 가보자. 정연주 사장이든, 방상훈 사장이든, 개혁의 소재가 되는 모든 사람을 TV에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아직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뇌없는TV’만을 원한다면 전여옥이든 김명환 기자든 TV가 없는 곳으로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변희재 (정치칼럼사이트 ‘시대소리’ 운영위원)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