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6-01-22   1217

<안국동窓> 대통령의 신년연설을 보고

2006년 1월 18일 밤, 노무현 대통령은 ‘책임있는 자세로 미래를 대비하자’는 제목의 신년연설을 했다. 이 신년연설은 모든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전파낭비’니, ‘시청자의 볼 권리 침해’와 같은 비판을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사실 그런 면이 있다. 대통령의 신년연설이나 기자회견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모든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동시생중계하는 ‘총화단결’식 방송은 이제는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민주화와 다원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가장 재미있는 반응은 한나라당에서 나온 것 같다. 한나라당은 1월 26일로 예정된 박근혜 대표의 신년연설을 야당의 ‘반론권’ 차원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연설과 똑같은 시간에 생중계해 달라고 방송3사에 공식요청했다. 참, 웃기는 요청이다. 대통령이 무슨 여당 대표의 자격으로 신년연설을 했나? 그리고 대통령의 신년연설을 보니 한나라당의 ‘한’자도 언급하지 않았던데 무슨 ‘반론’인가? 이런 식이라면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등장할 때마다 한나라당의 대표를 똑같은 비중으로 등장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계진 대변인은 ‘제1 야당 대표로서의 반론권’이라고 주장했는데, ‘제1 야당 대표’라고 이런 ‘특권’을 주장해도 옳은 것인가? 그리고 다른 야당은 모두 ‘핫바지’인가? 이런 ‘특권’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행태 자체가 한나라당이 상식과 이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혹시 시대착오적 ‘사학법 반대투쟁’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무마하고자 이런 ‘특권’을 주장하는 잘못을 또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통령의 신년연설은 ‘대한민국 기적의 대행진’을 계속 이어가자는 호소로 끝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자면, 그 기적은 분명히 낡은 성장주의의 기적이 아니다. 박정희식 경제성장으로 대표되는 낡은 성장주의는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의 총량성장을 요구했다. 그 결과 본격적인 근대화가 진행되고 불과 40년만에 한국은 수출 2천억불을 달성하고 GDP 기준으로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나라 크기로는 세계 109위밖에 안 되는 조그만 나라가 경제 크기로는 세계 10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성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이루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나락같이 깊은 노동의 착취와 자연의 파괴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고도성장이 이루어졌으나 삶의 질은 선진국은커녕 개발도상국의 평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장의 역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의 질은 계속 악화될 뿐만 아니라 경제 자체가 진정한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는 한마디로 ‘고급화’라고 할 수 있다. 경제구조, 산업구조, 기술의 모든 면에서 노동과 자연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박정희식 성장방식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 우리는 ‘선진국’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고급화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우리의 삶의 질이 고급화되지 않는다면, 이 사회의 고급화가 이루어질 수 없고, 따라서 경제의 고급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 신자유주의의 영향에 따라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는 이 사회가 고급화는커녕 오히려 ‘사회해체’의 구렁텅이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회의 고급화는 무엇보다 양극화의 해소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양극화의 해소는 이 사회의 고급화를 위한 필수적 투자이다. ‘세금폭탄’ 운운하며 이 투자를 가로막고 나서는 세력은 바로 이 사회의 고급화를 필사적으로 가로막고자 하는 낡은 성장방식의 기득권세력이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인 이 나라는 고급화를 향해 나아가야 하고, 이를 위한 자원은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다. 문제는 올바른 정책과 정치적 의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성공화국’의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신년연설은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과제를 대체로 설득력있게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정권과 정부가 과연 올바른 정책과 정치적 의지를 갖추고 있는가? 이 나라 최대의 기업이 저지르는 어마어마한 탈세와 불법에 눈을 감으면서 ‘조세개혁’을 외친다면, 과연 누가 그 외침에 깊이 공명하고 따르겠는가? 강력한 투쟁을 통하지 않고 기득권세력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을 ‘선진국’의 역사가 보여주지 않는가? 지금 우리는 파괴적 고도성장을 넘어 선진적 안정성장으로 나아가야 하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세력은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이미 오래 전부터 각종 위기론을 설파하며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 ‘책임있는 미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러한 기득권세력의 행태에 강력히 맞서고자 하는 올바른 정책과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점에서 이 정권과 정부는 불행하게도 그 동안 제대로 ‘신뢰’를 쌓지 못했다.

대통령의 신년연설에서는 ‘8ㆍ31조치’의 성과를 강조했다. 그러나 강남의 집값은 여전히 폭등하고 있다. 강남만이 아니다. 강북에서도 부동산 투기의 바람은 결코 잦아들지 않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참여정부의 ‘국가균형발전계획’ 때문에 부동산 개발과 투기의 전국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불로소득 환수제의 시행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고 토건국가형 국가균형발전계획을 밀어붙인다면, 부동산 투기는 더욱 더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8ㆍ31조치’는 그저 ‘뻥’이요, 그 약속은 그저 공염불일 뿐이다. ‘지역개발주의’에 편승해서 정권을 재창출하고자 하는 정치공학에서 비롯된 이러한 토건국가형 국가균형발전계획에 대해 이 정권과 정부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신년연설의 끝부분에서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은 반드시 하겠습니다. 뒤로 미루지 않겠습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책임 있게 해나가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19년을 미뤄왔던 방폐장 문제가 마침내 해결됐습니다”고 감격스럽게 말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가슴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2005년 11월 2일에 방폐장 후보지들에서 어떤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잘 알고 있다. 방폐장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 다만 이 정권과 정부도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낡은 사회체계인 ‘박정희체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적나라하게 증명해 보였을 뿐이다.

대통령의 신년연설이라는 것은 어디서고 업적에 대한 분홍빛 자랑과 미래에 대한 장미빛 전망의 범벅이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진정성과 가능성이다. 진정성은 반성에서 비롯되고, 가능성은 결의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제 고도성장의 성과를 최대한 선용해서 복지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어야 할뿐만 아니라 파괴된 자연을 지키고 되살리는 것이기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의 신년연설은 반성도 결의도 모두 충분하지 않았다. 참으로 ‘책임있는 미래’를 위해 깊은 반성과 곧은 결의가 따르기를 기대한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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