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예산안 날치기 통과 등 어수선한 정치와 연평도 사태 등 하수상한 연말에 대법원이 나름 명쾌한 판결을 내놓았다. 대법원은 유신체제에서 권위주의 권력을 극단으로 이끌었던 긴급조치 제1호를 원천무효로 선언하였다. 헌법을 비판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는 영장 없이 체포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이 긴급조치는 민주주의와 법치를 정면으로 부정하여 헌법에 위반된다고 본 것이다. 이어 대법원은 이전에 내려졌던 긴급조치 제1호 관련 판결들을 모두 폐기하였다.
과오 바로잡을 후속판결 기대
지난 군사정권의 법유린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막걸리 보안법’은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폭력을 법의 외피 속에 숨기려는 염치는 있었기 때문이다. 긴급조치는 명목뿐인 법의 존재조차 부정한다. 그것은 국회가 만든 법률도 아니며 유신헌법이 정한 요건에도 충족되지 아니한, 대통령의 자의적 폭거에 다름 아니었다. 한마디로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법치까지도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법원이 이를 두고 현행 헌법뿐 아니라 당시의 유신헌법에조차 위반된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너무도 당연하기에 오히려 낯설기만한 이런 결론이 만시지탄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사법부가 인권과 정의의 보루라고 한다면 법의 대행자인 법관들은 법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이 패악에 단연코 저항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권력의 억압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조차도 그들이 권력에 편승하여 최상류층의 특권을 누렸던 사실로 인해 무력해진다. 시대의 질곡이었다는 역사적 변명 또한 민주화 과정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였던 그들의 비겁함으로 인해 의미를 상실한다.
여기에 면소판결을 내린 원심에 불복하여 대법원에까지 상고한 검찰은 더욱 수상하다.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구해 이 긴급조치를 영원히 무효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불복을 거듭한 그들의 행태는 역사를 유신의 시대로 되돌리겠다는 만용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판결은 두 손 들어 환영해야 한다는 머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반길 일만은 아니라는 가슴의 통증으로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고 하면서도, 판결문에서 지난 날의 사법과오에 대한 반성이나 유감의 뜻을 담은 문맥을 찾기 힘들다는 점은 이를 확증한다. 현대사를 연구하는 한홍구 교수의 말처럼 아주 예외적인 재심절차로써 자신의 과거사청산을 대체하려 하는 현재의 대법원은 여전히 ‘오욕과 회한의 나날’을 반복하고자 한다.
법의 이름으로 법을 유린했던 과거의 역사가 또다시 법치를 내세우며 법치를 부정하는 현재의 질곡으로 재생산되는 현실을 앞에 두고, 여전히 과거사를 떨쳐 버리지 못한 우리 사법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성찰할 수 있는 토대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권력에의 굴종을 강요당했던 사법의 과거사는 오래된 미래가 되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반성은 없이 긴급조치 무효선언
정녕, 긴급조치 제1호를 위헌무효로 선언하고 그 피해자를 35년 만에 복권시킨 이 판결은 민주화의 역정에 한 획을 그은 소중한 업적이다. 사법의 탈정치화를 내세우며 인권과 정의를 저버렸던 사법 자체의 도그마를 넘어 법원 자체가 민주화의 한 축이 됨을 공언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역사 앞에서 주춤거리며 유신잔재의 청산에 소극적이던 헌법재판소에 대해서도 그 존재 이유를 반성하게 만든 대사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판결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역사학은 ‘기억의 한 형식’이라는 벤야민의 말을 인용하자면, 과거사를 재구성하고 사법과오를 국가범죄로 털어내는 것은 최고법원인 대법원에 주어진 이 시대의 역사학이다.
내친김에, 이 판결이 생략해 버린 많은 언술들이 더 이상 멈칫거림 없이 당당하게 활보하는 후속의 판결들이 줄 잇기를 기다려본다.
* 이 글은 12/22 경향신문 시론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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