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호] 권두언_전환의 길목에서 : 저물어 가는 민주화 20년, ‘국민성공 시대’가 오는가

이병천 ㅁ 홍윤기 / 공동편집인

2006년 작년 이맘때쯤 한참 회자했던 연말 사자성어(四字成語)가 ‘밀운불우’(密雲不雨)였음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짙은 구름이 빽빽하게 끼었지만 꼭 내려야 할 것 같은 비는 정작 내리지 않는 상태를 잘 묘사했다 하여 여기저기서 시대의 화두로 인용되곤 했다. 이 경구를 놓고 지난 일 년을 되돌아보면 이 세월은 ‘밀운불우’라는 사자성어가 묘출했던 사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물론 변화는 있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자연의 비-정치적 비가 아니라-는 꽤 많이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드러나야 하건만, 비가 내릴수록 하늘은커녕 점점 더 많은 비를 예고하고 더 시커멓고 더욱 커다란 구름장들이 더 많이 모여 들었다. ‘다우운집(多雨雲集)’의 형세라고나 할까?

전국적으로 거의 상향평준화된 부동산 가격, 극소수 인구에 반 이상의 국토가 집중된 토지 소유의 양극화가 투기사회 대한민국의 부조리를 압축해 보였다. 폭등하는 사교육비 및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악순환을 빚고 있는 교육 양극화, 유아부터 영어교육 전쟁터로 마구 집어넣는 아귀다툼이 학벌사회 한국을 졸라맸다. 그 뿐인가. 신자유주의 양극화 성장체제가 구조화됨으로써 대다수 국민들은 일자리 불안, 주거 불안, 건강 불안, 출산 및 보육 불안, 노후 불안 등 ‘민생 5대 불안’에 내몰려 민생고에 시달렸다. 대중문화와 정신문화 지도층의 권위를 여지없이 실추시켰지만 거의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용두사미가 된 학벌 분규, 그리고 가장 유력하면서도 연일 쏟아지는 검은 인생 편력의 의혹으로 국민의 불감증 수준까지 올려버린 어떤 야당 대선후보의 후안무치함, 급기야 한 시민의 고백으로 드러난 대한민국 대표 재벌 삼성그룹의 엄청난 비리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뻗친 가공할만한 비리와 지배 커넥션은 또 어떤가. 이제 뭐가 더 남았을까?

87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짙은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서는 2007년 들어 이렇게 더 많은 구름장이 켜켜이 밀집하는 세상을 보면서 탄식의 한숨이 절로 나올 것이다. 그동안 많은 성과를 거두어 적어도 정치와 사회의 분위기만은 어느 정도 청량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작 가장 큼직하고 가장 위력 있는 몸통들은 이제야 그 마각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것도 우리들이 한 세대 이상 달성하려고 분투했던 민주주의의 마당에 깔린 멍석 한가운데로 버젓이 들어온다. 민주화로 나름대로 정상화되었다고 믿었던 정치권력, 그리고 구조조정으로 꽤나 공정 경쟁질서가 형성된 것처럼 생각했던 시장경제. 그동안 참 큰 착각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이들 시커먼 구름 주변에 짧게는 지난 5년간, 길게는 97년 이후 10년간 자기 생활에서 살맛을 잃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이 시대 대다수 국민들이 운집해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화로 집권한 정치세력으로는 도무지 살맛을 되찾을 수 없다고 믿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검은 구름의 몸통 안으로 들어간다.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다시피, 도대체 여론조사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주 많다. 그렇지만 거의 실시간대로 대중들의 심중을 읽어내고자 하는 다방면의 탐사들은 이른바 ‘민심(民心)’이라고 하는 것의 둘레모습과 속주름을 비교적 또렷하게 그려준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민심의 속내는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성장 경쟁과 이른바 ‘국익’ 경쟁에서 닦달당할 대로 닦달당하며 내몰리는 우리 사회 시민과 민중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번뇌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것이 우리를 안타깝게 만든다.

특출나게 유력한 야당 대선 후보의 인생이나 언행의 정당/부당을 넘어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의 정신적 행태는 여러 가지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다른 후보들의 지지율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이 야당 후보의 행적에 대해 대다수 국민들은 결코 도덕적 불신감을 감추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가 소속한 정당 안에서도 도덕적 권위를 완전히 인정받지 못한 이 후보에 대해, 국민들은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국민 대다수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앞날의 비전에 있어서 대단히 불투명한’ 후보를 지지하고 있음을 뚜렷이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나는 잘못된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는 의식을 그의 지지자 자신들이 또렷이 알면서도 그를 지지한다는 것이고, 대부분은 자신의 선택을 투표 당일까지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한다. 유권자의 과반수가 BBK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비율의 대중은 그 사건에 관한 특검법은 반대한다.

이제 거의 제국적 실체를 드러낸 삼성에 대해서도 이 국가 시민의 정신적 행태는 온전하게 납득할 수 있는 모양새가 아니다. 다수 국민들은 한 시민 변호사의 양심 고백이 적나라하게 실상을 헤쳐 보이자 압도적 다수가 특검법을 지지했다. 그러면서도 그것에 버금가는 비율의 사람들은 희대의 불법․비리 재벌이자 무노조 재벌인 삼성을 여전히 좋은 기업으로 인식하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대학 졸업예정자, 이 땅의 청년들은 삼성에 취직하는 것을 거의 고시 합격에 맞먹는 행운과 영광으로 여긴다. 삼성은 사실상 대한민국 청년의 성공 아이콘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대다수는 삼성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또렷이 인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 땅의 시민과 민중이 그야말로 뭘 몰라서 잘못된 정치세력이나 재벌권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영악하리만치 그들의 실체를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들이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87년 이후 민주화 20년의 끝자락에서 새롭게 등장한 퇴행성 정치세력 아니면 사방에 문어발식으로 비리 커넥션을 뻗친 시장 권력에 의탁하지 않고도, 자기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갈 수 있다는 자신과 저력이다. 다시 말해 이 땅의 민중과 시민은 온갖 고통과 희생과 헌신으로 이 나라의 살림살이를 일궈냈으며, 참여와 연대의 거대한 대열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이 땅에 정치적 영광을 가져왔었다. 그러나 이 땅의 시민과 민중은 그 기초위에 새 희망을 열 실체적 근거인 공적 연대성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진 채 성공 신화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민주 공화국으로서 모두를 위한 대한민국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상황과 국민의식, 그리고 ‘시대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크게 변했다. 2003년 참여정부의 출범 시기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금석지감이 있다. 주가조작을 하건 말건, 위장전입과 위장취업을 하건 말건, 탈세와 부동산 투기를 하건 말건, 많은 국민들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식의 멘탈리티를 갖고 성장과 불로 소득에 대해 큰 기대를 나타낸다. 왜 이렇게 되었나. 민심이 번민하면서 돌아 선 이유는 뭔가. 이 물음을 우회하기는 어렵다. 또 누구는 불행의 시대를 끝내고 ‘국민 성공 시대’를 열겠다고 호언한다. 정말 여기에 희망이 있다는 말인가.

민주화 20년이 저물어 간다. 과연 ‘국민성공 시대’가 오는 것인가. 시민사회운동은 정치권력과 시장 권력의 새로운 비리 유착을 깨고, 정치에서의 독재(獨裁), 행정에서의 독선(獨善), 시장과 자본에서의 독점(獨占)의 삼독(三毒)을 씻고, 잃어버린 이 땅 시민과 민중의 저력과 가능성, 그리하여 민주 공화국의 가능성을 다시 일깨우는 새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성찰의 시간이 요구된다. 그러면서 긴 호흡으로 바닥에서부터 다시 “함께 꾸는 꿈이 현실이 되는” 시민적 진보, 광장의 진보정치의 새 길을 일구어야 할 것이다.

이번 시민과 세계 12호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주제 기획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관료 동맹과 공공성의 위기>, 특집 <삼성 이건희 제국을 넘어 민주 공화국으로>, 그리고 동시대 논점 <2007 대선과 대한민국의 새로운 선택>은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만들어진 본 호의 주요 기획들이다. 모두 참여사회연구소의 심포지엄이나 포럼을 통해 발표된 것을 수정 보완한 글들이다. 그 외에 대안 담론으로서 사회투자 전략론과 시민경제론에 대한 글을 수록했다. 이는 국내외적으로 상당히 논쟁적인 주제들로서, 앞으로도 논의를 이어 갈 생각이다.

시민적 진보와 녹색 진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은 본 잡지가 추구하는 기본 강령에 속한다. 태안 반도의 대참사는 위험사회 한국의 생태 민주적 전환의 긴급함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우리는 독자들이 석유 정점으로 도래할 파국의 위험, 그리고 식량 위기 및 식품 안전 문제를 다룬 글들을 대한민국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큰 문맥 속에서 읽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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