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용 | 동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기쁨은 예상치 않은 순간에 마주칠 때 더 커진다. 여행도 그렇다. 유명한 관광지보다 동네의 우연한 만남에서 감동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내가 잠시 일본에 머물 때 숙소 근처 자주 가던 식당이 있다. 가정식 메뉴에다 평점이 좋아서 방문하였는데, 할아버지가 요리를 담당하고 할머니는 서빙을 하는 노포 식당이라 처음 들어설 때부터 왠지 편안한 느낌이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왼쪽 테이블에 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와 엄마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많이 지쳐 보였던 엄마는 식사 후에 혼자 어디를 다녀오기도 하고, 주인 할머니와 차분한 대화에 눈시울도 보여 뭔가 사연이 있는 딸인가 싶었다. 세 번째 방문했을 때 이번에는 오른쪽 테이블에 또 다른 엄마와 아이 셋이 있었다. 역시나 주인 할머니는 이들과 아주 친한 관계로 보였다. 아이 둘은 숙제를 하고 있었고, 네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막내 아이는 천방지축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장난을 걸고 있었다. 나 또한 식사를 마치고 같이 골목길을 걸어 나오면서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취한 여러 동물 흉내 내기 소통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에 검색을 하였다. 도대체 이 식당은 무엇일까?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식당 내 소품들이 기억나기도 했다. 벽에는 어린이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누군가 그린 한 포스터에는 북쪽 섬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기부금 모금액이 쓰여 있기도 했다. 그리고 곧바로 어렵지 않게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식당은 지난 십년 간 일본 전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어린이 식당(子供食堂)이다. 내가 있던 중규모의 도시 내에만 300여 개가 있었고 전국에는 1만 개가 넘게 운영되고 있다. 이 식당의 작동 원리는 간단하다. 마치 작년 초 윤석열 탄핵 정국 당시 키세스 청년들에게 시민사회가 고마움과 연대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인근 식당과 카페에 선불결제를 보내주던 것과 같다. 일본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심각해진 위기 아동들을 위하여 시민사회가 자발적으로 동네 식당에 아동 가족의 식사를 후원하기 시작한 것이 마을돌봄 공간으로 확산된 것이다.
아이디어 자체는 통상적 자선처럼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면 나름 수십 년 사회복지를 전공한 내 흥미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감동한 것은 어린이 식당 내의 평면적 연결이다. 이 만남은 정부가 만든 하향식 복지사업도 아니고, 결식아동 돕기와 같은 기부활동도 아니고, 수많은 이름의 위기가정 발굴 민관협력 또는 자원동원 사업과도 다르다. 관공서 홈페이지에는 이 장소를 ‘아이의 거처’로 설명하고 있다. 아이와 가정을 동네가 지켜보는 공간이며, 고립되기 쉬운 아동이 집과 학교 밖에서 안심하고 시간을 보내는 제3의 장소로 소개된다. 또한 이 공간은 주민들이 수시로 만나서 교류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본 어린이 식당의 키워드는 ‘이바쇼(居場所)’ 즉 마음을 두는 곳이라고 한다. 도움을 주거나, 주고 싶거나, 응원하고 싶은 누구나가 이 공간에서 동네의 아이들을 보살핀다. 이러한 열린 공동체 돌봄에서 다음의 세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누구나 돌보는 것이 좋은 돌봄이다. 좋은 돌봄은 1.5인칭 돌봄이라는 말이 있다. 돌봄을 두고 이쪽과 저쪽을 구별하지 않는 돌봄, 즉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경계가 없는 돌봄이다. 이 식당에서는 돌봄의 행위와 행위자가 없다. 식당은 원래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곳이고, 주인은 아이들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분들일 뿐이다. 비용은 누가 지불했는지 알 수 없다. 공생돌봄, 아이들과 부모, 그리고 주인은 서로에게 의지가 된 재미있는 일상의 만남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인격적 관계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우리처럼 돌봄이 사회복지시설 종사자의 일이어야 할까? 지역사회통합돌봄에 따른 개별 서비스의 성과를 누가 가져가는가와 같은 논의가 필요할까? 예컨대, 방과후 아동돌봄을 초등돌봄교실, 다함께 돌봄센터, 그리고 지역아동센터라는 제도별 선택지로 마련하고 돌봄 제공자는 제도별로 각기 정해준 보육교사, 돌봄교사, 사회복지사, 청소년지도사 등의 구분된 자격증 소지자가 제공하는 서비스여야 할까? 노동과 임금을 교환하는 직업인은 소명으로 일하기 쉽지 않다. 매뉴얼에 따라 접근하는 전문가의 서비스가 인간의 깊은 내면적 고립감과 파편화된 관계를 치유하는 데 한계가 있음은 당연하다.
둘째, 문턱 없는 돌봄이 좋은 돌봄이다. 어린이 식당의 경우 이용 아동의 경제적 곤궁을 파악하기 위한 소득 증빙 절차는 요구되지 않는다.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다수의 어린이 식당은 이용자격 조건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경로식당처럼 저소득 계층에 시군구가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찾아오는 이들이 요청하면 식사를 제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화 과정에서의 관찰, 지역사회의 소문 등을 통해 대상자의 상황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조금을 일부 지원하는 지자체 또한 대상자 선별사항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어린이 식당이 문턱 없는 곳, 즉 행정적 그리고 심리적으로 아동 가족이 밀려나지 않게 배려한 조치다. 반대로 공적 자원을 배분하고 약자를 지원하는 복지 제도는 불가피하게 합리성과 투명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동네의 아동에게 밥값을 지원할 때도 결식아동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해 분류하고 심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동은 자신의 결핍을 증명해야 하며, 성인이 되어서도 잊히지 않는 감정인 실존적 모멸감을 경험하게 된다.
셋째, 어디서나 돌봄이 좋은 돌봄이다. 돌봄은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식당에서, 거리에서 어디서나 있다. 굳이 돌봄의 장소를 보육, 복지, 요양 시설로 한정할 이유는 없다. 일본 중소도시 생활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거리다. 거리에는 자전거가 많은데, 상당수의 자전거 뒤와 앞에 카시트가 달려있다. 가족 돌봄의 모습이 그려진다. 노인들은 제복을 입고 경비, 안내, 자원봉사 등 곳곳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고, 그들의 도움은 곳곳에서 마주친다. 노인들의 사회참여가 자기돌봄의 최우선 순위 방향임은 분명하다. 교복 입은 학생들도 주중 대낮에도 심지어 휴일에도 많이 보인다. 학교마다 부서활동 홍보와 수상이력을 쓴 현수막이 넘치도록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밴드, 수영, 야구, 영화동호회 등 방과후 활동으로 평상시 돌아다니는 또래집단이 꽤 많은 듯하다. 굳이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프로그램이 필요할까? 돌봄이 필요한 이유는 나의 행복과 자유를 실현하기에 타인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인데, 돌봄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태와 무엇이 될 수 있는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생존만 돕는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동네에서 어린이, 학생, 노인들을 보기 어려운 것이 이제 상식이다. 학교와 학원, 그리고 집안에 갇혀 있지 거리에 없다. 심지어 학생들에게는 체험학습도 수학여행도 없다.
돌봄의 평면성, 돌봄은 어떠한 위계도 없이 각자 모두가 열려있는 평면에서 만나야 한다. 누구의 어떠한 돌봄이 더 중요하거나 우위에 있지 않다. 물론 돌봄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여성에게, 복지시설에게, 돌봄노동자에게, 국가에게 책임을 지우려는 욕심이 든다. 그러나 돌봄의 위계를 두는 순간 돌봄의 다양한 물질적 존재들을 삭제하고 돌봄의 네트워크적 속성을 해체하게 된다. 삶의 당연한 조건으로서 돌봄을 맥락화한다면, 그리고 돌봄의 네트워크 내 사적공간과 공적공간이 평면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우리의 돌봄은 그리 힘들지도 고립되지도 않을 것이다. 타인에게 맡기고 모른 척하기 위해 돌봄을 말하지 말자. 그보다 우선 지금까지도 누군가 꿋꿋이 돌봄을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 모든 돌봄의 존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자.
월간<복지동향> 2026년 6월호(제3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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