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1999년 05월 1999-05-01   880

자원활동가, 들러리가 아니다

자원활동가, 들러리가 아니다

상근 간사 6∼7명에 자원활동가 30∼40명이 움직이는 외국의 시민단체들을 볼 때마다 참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걸음마를 막 뗀 우리 시민운동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과 함께. 시민운동이 학생운동의 연장에서 벗어나려면 폭넓게 시민들을 껴안아야 하고 그 핵심인 자원활동 영역이 안정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시민운동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었다.

작년 중반부터 참여연대에는 조그만 변화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생들로 차 있던 사무실이 머리희끗한 중·장년층, 주부, 회사원,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로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이다. 한 구석에서 조용히 신문스크랩을 하거나 전화상담을 하든지 강의내용을 녹취하는 일, 간행물 발송, 컴퓨터파일 정리 등 많은 일들이 자원활동으로 이뤄지고 있다. 작년 12월부터 시작된 자원활동가교육은 벌써 5기에 접어들었고 매달 수강자가 3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기별 모임을 조직하여 서로 공부하고 토론하는 등 어느 모임보다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회원 모임에 가면 자원활동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느낄 수 있고, 설문조사에서도 자원활동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회원이 상당히 많았다. 할 일은 쌓여 있는데 일손은 부족한 시민단체의 고질적 현상에서 벗어나려나 하는 반가움과 함께 우리도 곧 성숙한 시민사회로 들어설 것같은 기대감이 앞선다.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사회봉사 활동을 하는 학생들을 제외하고 총 118명. 그 중 작은권리찾기와 아파트문제 관련 전화상담을 하는 시민권리국 자원활동가가 단연 수적으로 우세하고, 국제인권센터는 서구적 자원활동 개념을 도입하여 가장 안정된 자원활동가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자원활동가들 중에는 시민운동이나 사회변혁에 대해 남다른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보다는 의외로 평범한 시민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남보다 잘나서 큰 일을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복사를 하고 팩스를 보내고 편지를 접는 일 같은 허드렛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

총무팀에서 자원활동을 하는 이순희 씨(55세)도 그랬다. 작년 말부터 일주일에 두 번 나와 신문스크랩을 하는 그녀는 전에 참여연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던 평범한 주부였다. 아이들이 다 성장해 막내가 대학 3학년이고, 그동안 하던 일도 접고나자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어 시민단체 자원활동을 하게 되었단다.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잡지에서 자원활동 안내 기사를 보다가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참여연대를 선택했다. 간사들도 잘 모르게 조용히 왔다 가는 그녀는 여러 신문을 꼼꼼히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남에게 조그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좀더 대화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과학기술민주화모임의 자원활동가 이수연 씨(29세)는 참여사회아카데미에서 과학기술 강좌를 들은 게 인연이 되어 과민모 자원활동을 지원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에 나와 회원카드를 정리하고 입력하는 그녀는 하루종일 이혜경 간사와 수다를 떨다 간다고 한다. 필요한 자료를 뽑아 주기도 하고, 이야기도 많이 해주는 이 간사와의 관계 때문에 일이 더 즐겁고 과민모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단다.

전에 자원활동에 대해 한 간사에게 질문했더니 ‘자원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허드렛일밖에 없으며 간사들 업무량이 너무 많아 아직 자원활동 체계를 만들어 놓지 못했다’는 답변을 들었다며, 그때 몹시 섭섭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자원활동가들은 대단한 일을 하러 오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일을 하든간에 일의 경중을 떠나 간사들이 나를 이 부서에 속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주길 원하는 거죠.”회원사업국에서 매주 회원배가 캠페인에 나가 소위 ‘따까리’ 역할을 하는 박우철 씨(21세)도 같은 말을 한다. 서울대에서 작곡을 전공하는 그가 생뚱맞게 캠페인에 나가 뒤치닥거리 하는 게 괜찮냐는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대답한다. “꼭 필요한 일이고, 누구에겐가 도움이 된다면 어떤 일이든 즐거울 거예요.”

일만 있고, 사람은 없는 관계

자원활동가 그룹을 활성화시키고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업무의 일부를 담당하도록 하는 일은 누구나가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는 시급한 일이다. 국제인권센터는 일찍부터 ‘오작교’라는 자원활동가 그룹을 활발하게 운영해 온 모범 케이스. 통·번역뿐 아니라 일상업무를 보조하는 자원활동가 22명으로 구성된 ‘오작교’는 한달에 한 번 정기모임을 갖고 사업에 대한 교육과 논의를 하고 있다. 이들은 프로젝트별로 팀을 만들어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지고 사업을 벌여 나간다. 국제연대사업을 맡은 자원활동가들은 국제회의가 있을 때 간사 대신 참석한다. 책 한 권을 번역할 때도 페이지를 나누어 각자 하기보다는 처음부터 함께 공부한다. 일의 진행이 조금은 더딜지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양영미 간사는 말한다.

국제인권센터 사무실 벽에는 요일별, 시간별로 오는 자원활동가 명단이 빼곡이 적혀 있다. 대부분 정해진 시간은 꼭 지키려고 노력하며, 만일 못 지키더라도 사전 연락은 반드시 하는 게 정해진 규칙이다. “외국에서는 신상에 어떤 변경이 생기더라도 자원활동 시간은 꼭 지키는 것이 보통이죠. 우리는 아직 그런 자원활동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습니다.” 독일에서 시민단체 활동을 오래 했던 양영미 간사의 말이다.

가장 많은 자원활동가가 활동하고 있는 시민권리국은 요즘 매주 토요일마다 전화상담과 생활법률에 관해 교육을 하고 있다. 사실 그동안 민원상담은 넘치고 간사들은 일에 치이다 보니 자원활동가들이 새로 와도 제대로 된 교육없이 바로 상담에 투입됐고, 정해진 시간만 왔다 가는 일의 속성상 서로 얼굴을 익히기도 어려웠다.

“교육 시간이 가끔 토론장으로 변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워요. 이번 교육에 대해 자원활동가와 간사들 모두 대만족이구요. 앞으로도 이런 교육을 정례화해 계속 해나갈 겁니다.” 얼마 전 창경궁으로 다같이 소풍을 다녀온 뒤로는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고 이수효 간사는 말한다. 서로 인간적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 느꼈다는 것이다.

‘자원활동을 하면서도 뭔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라고 어떤 자원활동가는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해 자원활동가 교육을 담당하는 최유미 회원사업국장은 “일만 있고 사람이 없는 관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자원활동가들은 어떤 일이라도 할 생각으로 오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조그만 배려가 큰 힘이 되고, 자기도 이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죠.” 비록 많은 부분을 맡고 있지는 못하지만 자기도 이 단체의 한 부분이라는 소속감이 자원활동가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보상일 것이다. 자원활동가와 간사가 함께 움직여나가는 시민단체라는 의식을 간사들 쪽에서부터 먼저 가져나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김라 본지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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