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한 일이 아니다”라는 평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대통령선거를 거치고, 이제 새로운 정치권력이 형상을 갖추려는 시기에 스스로 그 중요성을 드러낸 책이다. 3년여 전 처음 출간되었을 때 접했던 평가는 잘해야 ‘학자적 사명감’의 발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나마 평도 드물었다. 이제 저자가 더 이상 학자가 아닌 정책담당자로서의 중책을 기꺼이 맡기로 한 듯 보이는 만큼, 학자적 관점에서의 단점은 더 이상 단점이 아니고 반면 장점도 더 이상 장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건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라면 이 책은 새 정부의 정책 이념과 지침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첫머리에서 던지는 도전은 “한국 정치경제의 과거모델은 무엇이 문제였는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도전의 본질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제도적 틀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으로 묶여 있다. 오늘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갖는 초미의 관심을 몽땅 묶어버린 대담성에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스멀거린다. 아울러 “현재의 한국 정치경제상황은 개혁에 저항하는 좌우의 연합으로 규정할 수 있다. 즉 신자유주의와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재벌중심의 현상유지세력과 신종속이론의 입장에 서서 현실적 대안도 없이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강성노조세력 간의 (의도하지 않은 이해관계의 일치에 의한) 연합이 형성되어 있다”는 현실진단에 이르면 저자의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인”관과 어울리면서 그 흔한 양비론을 거쳐 제3의 길 운운으로 빠지지 않을까 불안감은 높아지기만 한다.
그러나 “시장이란 그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사회에 총체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윤리, 관습, 제도, 가치기준 등과 관계없이 별개의 것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혼란의 핵심은 시장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제도의 마련은 그러한 제도의 마련으로 인해 피해보는 집단과 이익을 보는 집단 간의 정치적 갈등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도형성을 위한 에너지로 집결해 나갈 수 있는 정치적 지도력의 부족이… 위기의 본질이다”는 일성(一聲)은 저자의 인식이 대단히 현실적이고 현시점에서 건강하다는 것을 시사해 주기에 끝까지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문제점을 평가하고 제도적 모순을 집어내는 일관된 주제는 정치ㆍ경제적 권력의 집중과 이렇게 집중된 권력중심들 간의 유착이다. 아울러 미래의 제도개혁방향은 권력의 분산으로 요약된다. 권력의 분산은 ‘실질적’ 민주화의 핵심이며, 이 실질적 민주화를 통해서 분산된 권력은 사회제도의 개혁에 필요한 정치적 지도력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다.
집중된 권력간의 유착은 사회가 교정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근본 요인이며, 이것은 공동체의식의 약화와 이익집단 앞에 취약한 국가를 낳고, 결국은 시장경제체제의 작동 자체를 위협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IMF위기가 던진 메시지이다. 발전국가모델은 집중된 경제력과 집중된 정치권력의 유착을 합리화해 주는 틀로서 더 이상 우리 사회에 대해 의미를 갖지 못한다. 1996년 말의 노동법개정 파동은 “노동부문의 희생을 전제로 한 정부와 재벌 간의 발전국가연합을 통한 탈출구 모색”의 대표적 실패사례이다. 노동법파동은 결국 정치리더십의 공백으로, 더 나아가 IMF사태로까지 연결되었다.
결국 “개혁의 핵심 과제는 각 부문별로 집중되어 있는 권력구조를 얼마만큼 분산구조로 바꿀 수 있느냐, 그리고 그 분산된 힘의 중심들간에 유착이 아닌 상호 견제와 균형의 메커니즘을 얼마만큼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로 요약된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은 필수적인 것이며, 국가는 시장에서 무조건 빠져야 한다고 외쳐대는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들의 발상은 위험하다. 시장경제는 공중에서 그냥 떨어지거나 국가가 무조건 뒤로 빠지기만 하면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조 위에 기업과 정치권, 정치권과 금융, 금융과 기업 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데, 정당민주화와 정치자금의 문제, 공정거래위원회의 위상, 국세청의 정치적 중립, 은행의 감시자 역할, 은행경영의 독립, 중앙은행의 독립, 법조개혁과 교육개혁에 이르기까지 그간 우리 사회에 제출되어 왔던 개혁적 입장의 정책제안들이 대체로 큰 무리 없이 연결되어 정리된다. 여기에서 이 책의 강점, 즉 정책지침서로서 다종다양한 개혁적 입장의 정책제안들을 서로간의 모순을 최소화하면서 자리매김해 주려는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
정책담당자라는 입장에서 이 책을 바라보면 학자적 관점에서 보일 만한 많은 약점들, 예를 들어 절충론적 견해의 결함, 지식인의 중립성과 국가자율성에 대한 불충분한 개념화, 부적절해 보이는 사례연구들 같은 것들은 상대적으로 왜소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정경쟁 및 반독점의 이념과 유연성 제고를 가장 강하게 지지하고 있는 잠재적인 정치세력,” 즉 개혁의 대안적인 주체세력으로서 중산층을 상정하는 문제는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저자가 “새로운 제도와 전략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세력이나 이익집단들간의 세력관계의 재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사회세력이나 이익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중산층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즉각 제기되기 때문이다. 다만 “좌, 우를 넘어서”라는 부제가 시사하듯이 저자가 80년대 서구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계급정치’담론의 시대로부터 본격적인 ‘대중정치’담론의 시대로 우리 사회가 들어섰음을 주장하려고 의도했을 수 있겠다고 애써 해석해 보고 싶은 것은 새 정부가 지고 있는 막중한 책임에 대한 공감 때문이려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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