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분배가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인지 여부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망각하거나 적어도 도외시하고 있다. 그것은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복지는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다.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복지지출이 있다면,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러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원리는 무엇인가, 정의로운 분배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아쉽게도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지극히 성장론적 담론 하에서 이러한 더 본질적인 문제들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시오노야 유이치(塩野谷祐一)의《경제와 윤리—복지국가의 철학》(박영일 譯)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차근차근 되짚어 보는 데 매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역자의 소개대로 저자는 케인즈와 슘페터 연구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경제학자이지만, 이미 70년대부터 복지경제의 이론, 특히 복지정책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끊임없는 탐색을 해 온 바 있다. 이 책의 원본은 도쿄대학 출판부가 기획한 공공철학총서의 한 권으로 2002년에 출간되었으며 이미 2005년 영역된 바도 있다. 경제학과 윤리학의 분리가 낳은 부정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두 학문의 재통합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접근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센(A. K. Sen)의 문제의식에 비견될 수 있으나 복지국가라는 구체적인 제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재통합을 시도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복지국가의 철학적 기초를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말하는 복지국가란 단순히 복지제도의 총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보장이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국가체계이다. 따라서 이 책은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질서 전반에 대한 철학적 탐색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책은 크게 1, 2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사회철학의 기본적 가치에 대해 논함으로써 윤리학과 경제학 사이의 결합을 위한 개념적 틀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회과학의 실천적 원리들은 나름대로의 철학적 가치에 근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행위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평가하는 효용에 바탕을 둔 선(善, good)의 이론이, 사회제도가 정의로운지를 평가하는 데에는 권리에 바탕을 둔 정(正, just)의 이론이, 인간존재의 바람직한 모습을 평가하는 데에는 능력에 바탕을 둔 덕(德, virtue)의 이론이 관련된다. 저자는 이 세 가지 규범을 하나의 종합체계로 통합하고자 하며, 이 과정에서 선보다는 덕을, 덕보다는 정을 우선시한다. 나아가 효율과 정의, 자유와 탁월에 대한 엄밀한 개념규정과 동시에 후생주의(역자는 효용주의라고 번역하였다)와 롤즈의 정의론에 대해서도 일정한 평가와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공리주의와 롤즈의 자유주의적 분배정의론으로 양분되는 사회철학적 논의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저자가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덕이나 탁월(excellency)이란 개념이 다소 생소할 수도 있다. 저자는 “인간존재의 바람직한 모습은 인간이 가진 능력이나 본성을 최대로 함양하고 발휘하는 것에서 찾고, 그 삶의 방식을 평가하는 가치개념”이 덕과 탁월이라고 하면서 이 가치 개념의 근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찾는다.
2부는 앞서 설명한 대로 현대 복지국가의 세 기둥을 형성하는 제도, 즉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보장의 윤리적 기초를 해명하는 데 할애된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시장의 경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적인 화두이다. 저자는 경쟁의 자유가 진취, 향상, 근면, 사려 등의 덕목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 이러한 경쟁동기 자체에 대한 평가와 경쟁의 다른 측면에 대한 평가를 분리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경쟁이 갖는 이 긍정적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경쟁의 결과 발생하는 부정적 현상들을 차단하기 위해 무엇인 필요한가인데, 저자는 이를 자유로운 동기, 공정한 규칙, 유덕한 목적으로 요약한다.
한편 가치의 다원성을 허용하면서도 이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민주주의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계(aggregation)라는 논리적 해결책이나 교섭(bargaining)이라는 기능적 해결책 못지않게 토의(deliberation)라는 규범적 해결책에 주목할 것을 저자는 역설한다.
사회보장제도의 필요성은 이제까지 정의의 측면에서와 효율성의 측면에서 제시되어 왔다. 사람들에게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저수준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정의론 측면에서의 정당화라면, 보험가입자와 보험공급자 사이의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발생하는 시장의 실패(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비책의 부재)를 예방하여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 효율성 측면의 정당화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이념적 기초보다 더 우선하여 탁월의 이념을 위치시킨다. 인간에게는 단지 생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적 실천을 한다는 것, 이를 통해 인간적 번영과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사회보장제도는 인간이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도록 지원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적 주장이다. 이제까지의 전통적 사회보장은 단지 ‘안전망’의 역할만을 강조해온 자신의 역할을 소극적 영역에 한정시켰지만, 이제는 ‘도약대’로서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복지국가의 철학적 기초에 관한 근본적 탐색이 현실의 정치적, 정책적 선택 방향을 바꾸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리에 대한 고민 없는 제도 설계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반드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하나는 복지 영역의 확대를 둘러싼 논의가 토론과 합의보다는 목소리와 힘에 의해 좌우됨으로써 제도의 정치적 안정성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도를 구성하는 각 부분간의 정합성이 확보되지 못함으로써 제도의 기능적 안정성 또한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매우 현재성이 있다. 이밖에도 저자가 사회보장 개혁의 몇몇 쟁점(복지국가 위기론, 저출산․고령화의 본질 등)에 대해 보여주는 통찰력은, 이들 문제를 외생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선진국의 경험을 인용하기 바빴던 연구자들이나 정책당국자들에게 창의적이고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항상 철학적 수혈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지만 실천에 옮기기에 현실은 너무 긴박하다고 느껴왔던 ‘복지쪽’ 사람들에게, 속으로는 사회선택이론의 난해함에 좌절하면서 겉으로는 그 공허함을 탓해왔던 ‘경제쪽’ 사람들에게(이런 구분이 통용되는 현실이 달갑지는 않다) 《경제와 윤리》는 딱 손에 잡히는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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