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 / 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
《시민과 세계》2007년 상반기호는 ‘거리의 정치학’을 화두로 삼았다. 한상희는 연대와 행동으로 구성되는 ‘거리의 권력’을 강조하면서 집시법 자체를 ‘폭력’이라 규정했다. 그런데 안진걸은 그 권력을 구성할 소통과 연대가 활성화되려면 집회․시위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회․시위가 절대적인 자유를 가져야 하지만 교통체증이나 일방적이고 낯선 소통방식, 깃발, 경찰과의 충돌, 엄청난 소음 등은 더 이상 시민들의 지지와 동의를 얻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누구의 주장이 현재 한국의 상황에 더 맞을까? 입 막힌 사람들이 몸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공간인 거리에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어느 정도로 보장되어야 할까?
책《직접행동》을 지은 에이프릴 카터라면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할까? 카터는 설령 법을 어기는 행위라 하더라도 그 행동이 권리나 정치적 접근성의 박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대규모 집회나 시위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카터는 그런 우려 역시 “대중적 저항방식을 통할 때에 흔히 가장 가난하고 가장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을 자력화할 수 있다는 민주적 정당화 논리에 비추어 평가해야 한다”(338쪽)고 얘기한다(카터는 그런 대규모 저항이 비폭력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전제를 단다). 설령 법을 어기더라도 사회적 불의에 맞서고 공공선을 확보하기 위한 직접행동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동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바로세우는 노력이다.
이 책의 원제인 《직접행동과 오늘날의 민주주의(Direct Action And Democracy Today)》가 말해주듯이 카터는 직접행동이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카터는 직접행동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쟁들에 답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비폭력 직접행동이 무엇인가를 밝힌다. 일단 카터가 주장하는 직접행동은 과거 아나키스트(anarchist)들이 주장했던 직접행동과 다르다. 카터의 직접행동은 “통치자나 자본가를 암살함으로써 대중에게 혁명을 고취하려 했던 아나키스트들의 ‘행동을 통한 선전 선동’”(46쪽)과 다르다. 카터는 그런 활동을 직접행동이 아닌 게릴라 전술로 보며, 직접행동은 비폭력성이라는 원칙을 가져야 하며, 그 근거는 간디의 철학에서 끌어낸다. 그리고 카터는 직접행동을 개인의 행동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직접행동은 사회적 불의에 맞서는 집단적인 행동이고 그런 점에서 “직접행동은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동기에서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뜻한다.”(44쪽)
책에서 드러나듯이 오늘날 직접행동은 지향해야 할 윤리적인 관념이 아니라 역동적인 실제 현실이다. 직접행동은 억압적인 체제에 저항하는 행위로 나타나고, 필리핀이나 세르비아에서처럼 민주적인 제도를 수립하기 위해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처럼 민주적인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벌어지기도 하고, 민주주의의 빈 공백을 채우기 위해 출현하기도 한다. 대의정치에서 소외된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직접행동을 벌이기도 하고, 석유회사와 같은 다국적기업을 반대하는 불매운동이나 저항운동이 벌어지기도 하며,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는 댐건설을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운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최빈국을 위해 외채탕감을 주장하는 직접행동, 다자간투자협정을 반대하는 운동, 세계무역기구(WTO)를 반대하는 운동, 토지를 요구하는 농민들의 직접행동,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원주민 공동체, 농민, 학생, 노동자, 실업자 등이 벌이는 다양한 형태의 직접행동이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살아있는 현실이게 한다.
그런데 카터는 이런 직접행동이 다른 모든 정치행위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카터는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직접행동이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고 발전시키는 방안이라고 본다. 카터는 “토크빌처럼, 참여민주주의가 시장사회의 부정적인 측면과 대중여론의 조작이라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상쇄해준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직접행동을 참여적 기능을 충족시키는 추가적 수단으로 보자고 주장”(532쪽)한다.
따라서 카터는 대의제도와 직접행동이 서로 보완하며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모델을, 즉 직접행동과 의회제도의 공존을 모색한다. 카터는 독일 녹색운동처럼 “완전히 혁명적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유민주주의 테두리 내에서 정책이나 제도변화를 모색”(94~95쪽)한다.
직접행동을 외치면서도 대의제도를 인정하자는 주장이 조금 애매하게 느껴진다면, 이 책을 거꾸로 읽으면 좋다. 카터는 현실의 사안이나 운동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고 여러 사상가들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그런데 8장인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의 실천이다’는 책을 쓰는 자신의 구상을 직접 드러내기 때문이다. 카터는 이 책의 초점이 권위주의 정권이나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직접행동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전 지구적 맥락에서 직접행동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491쪽)에 있다고 밝힌다. 그런 점에서 카터는 직접행동의 정치사상적 의미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작업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지구화라는 맥락에서 직접행동의 이론적 의미를 밝히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이런 이론들을 활용하고 지구화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이론을 활용하여, 국민국가 내부, 그리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직접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것이다.”(491쪽)
이와 관련해 카터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한다. 하나는 세계화 상황에서는 한 국가 차원의 직접행동보다 전 지구적 차원의 직접행동을 벌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입장이다. 즉 절차적 민주주의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직접행동은 그 방법과 목표가 분명하게 일치하지 않을 경우 정당성의 위기를 겪을 수 있다. 그래서 “국민국가에서 공적 토론이 더 용이한 수단”(528쪽)이라면, 초국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직접행동은 그 정당성을 쉽게 확보하도록 한다. 특히 초국적 운동과 현장의 직접행동형 반대운동이 힘을 합할 때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또 하나, 카터가 직접행동을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는 “직접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력화 효과(empowering effect)를 경험한다는 것”, 즉 “직접행동에 가담하는 이들이 공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냄으로써 자부심과 존엄성을 갖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며 타인과 연대감을 고양할 수 있”(515쪽)기 때문이다. 직접행동은 시민의 능동성을 자극해서 “민주적 조직방식을 실험해볼 수 있고 새로운 민주주의 사상을 생각해낼 수도 있다.”(492쪽) 따라서 직접행동은 민주주의를 지속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힘을 생성한다.
정리하자면 《직접행동》은 개인이 하고 싶은 바를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능동적인 대안이다. 카터는 이런 직접행동이 다른 정치행위와 어떤 차이점을 갖는지 설명하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지역적이고 전 지구적인 직접행동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카터는 그런 직접행동을 주장하는 사람들 내부의 다양한 입장 차이에 관해서도 설명한다. 그러다보니 《직접행동》은 직접행동을 어떤 특정한 입장으로 해석하는 논쟁적인 관점보다 직접행동에 관한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는 일종의 ‘개론서’의 성격을 띠는 듯하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자유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 서로 어울릴 수 있다는 카터의 설명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가 인용하는 사례들은 주로 자유민주주의가 확립되지 않은 제3세계의 직접행동들이다. 카터가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도 실제 사례를 그렇지 못한 국가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자유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듯하다.
사실 나는 자유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기에 카터의 논의가 전혀 무의미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하에서도 직접행동이 가능하고 오히려 직접행동이 자유민주주의를 보완하는 힘이라는 주장은 분명 신선한 지적 자극을 준다. 그러나 나는 직접행동이라는 개념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기괴한 결합물(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다)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서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들춰보면 조금 무안하기도 하지만 2004년에 쓴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한양대출판부)에서 나는 근대의 대의정치를 직접정치로 전환시키는 근본적인(radical)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율적인 개인을 만드는 과제가 자율적이고 강한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나는 선거보다 추첨제도가, 그리고 집단적인 힘을 생성하는 코뮨(commune)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는 자유민주주의가 개인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작은 인간’으로 만들며 그들이 직접행동에 나서고자 하는 능동성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수동성의 중심에 바로 비폭력(비폭력은 ‘비폭력주의’와 다르다. 비폭력주의는 폭력적인 수단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자치와 자립이라는 의미도 가지기 때문이다)과 대의제도가 자리를 잡고 있다.
나는 카터가 비폭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실제로 직접행동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경우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외칠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무조건적으로 비폭력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이 너무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폭력을 사용했는가?”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물음보다 “왜 폭력을 사용했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카터는 그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
카터는 비폭력을 얘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직접행동과 아나키즘을 분리시키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직접행동의 비폭력성을 체제의 폭력성 또는 정치폭력과 구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은 이렇게 얘기했다. “자본과 정부의 전반적인 폭력과 비교할 때 저항세력이 행사하는 폭력이라는 정치적 행위는 넓은 바다에 떨어진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 폭력적 저항이, 이 사회에 감내할 수 없는 불평등 요소들이 존재하고 이로 인한 갈등이 심각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가장 강력한 반증임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저주받은 아나키즘》) 체제의 체계적이고 기계적이며 압도적인 폭력을 얘기하지 않고 짓눌린 자들이 대응하는 폭력만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아직도 공권력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국민이 목숨을 잃기도 하는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그런 체제의 폭력에 대해 너무 둔감한 게 아닐까?
그리고 대의민주주의 제도도 직접행동의 능동성을 감소시킨다. 카터의 주장처럼 법에 호소하고 자유민주주의적인 절차에 따르고 난 뒤에 직접행동에 호소해야 한다면, 우리는 누가 법을 만들고 누가 법을 해석하는가라고 먼저 물어야 한다. 법치주의는 “법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고 규정하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법은 이미 불평등하다. 왜냐하면 자유주의가 전제하는 평등함은 현실세계의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지 않아서 현실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한항공의 조양호 전 회장, 두산그룹의 박용성 전 회장,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 한화 그룹의 김승연 회장이 명백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반면에 KTX여성노동자들이 500일을 넘게 싸우고도, 뒤이어 새마을 여성노동자들이 반년을 넘게 싸우고도 여전히 그 해법을 찾지 못하는 세상, 이랜드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구속되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현실이기 때문에 직접행동이 필요하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대의정치체계와 사법권력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은 채 직접행동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강자를 위한 법이 제정되고, 강자를 위해 법이 해석되는 현실에서 직접행동은 대의제도 자체에 맞서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직접행동의 ‘논리’만이 아니라 직접행동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는 ‘저항의 정치’가 필요하지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구성의 정치’가 더 절실하다. 그러기 위해 직접행동은 현실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틀을 짜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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