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는 시민의 사법참여 제도로써 배심제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모든 재판에서의 배심제 실시가 바람직하지만, 배심제에 대한 신중하고 체계적인 도입을 위해 처음 시행하는 단계에서는 <중죄> 형사사건에 한해 배심재판을 시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중죄> 사건의 경우, 한 사람의 미래 전체가 좌우되는 만큼 더욱 신중한 절차를 거치는 것이 마땅하며 구체적이고 명확한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이 상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다음의 내용들은 <중죄> 형사재판에서의 배심제 도입을 전제로 했습니다.
1) 배심제를 도입할 경우에도 실제 배심재판에 회부될 사건은 소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배심제를 도입해야 할까?
배심을 도입한다고 해도, 모든 사건에 배심재판이 이루어질 것은 아닙니다.
사법통계에 따르면 2002년도 전국법원의 제1심 형사피고인 총수는 208,506명이며 이 가운데 중죄 사건인 형사합의사건의 공판인원은 21,423명입니다. 이 가운데 피고인의 자백사건이 90%가량 된다고 본다면 <피고인이 혐의사실을 부인하는 사건>이 약 2천여 건, <배심재판을 받겠다고 신청하는 사건>이 50%로 예상하면, 연간 약 1천여 건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적은 수의 사건이 배심재판을 받게 될 것인데, 이 적은 사건을 위해 복잡한 규정을 만들고 시설과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배심재판의 회부비율이 5% 정도로 매우 낮지만 배심재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배심재판의 이용도가 매우 낮다 하더라도 배심제를 도입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우선 중죄일수록 유죄에 대한 중형이 선고될 것이며, 유무죄를 다투는 입장에서는 보다 신뢰성이 높은 제도에 기대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배심제의 제도적 존재 그 자체가 법관재판 혹은 간이공판절차의 운영 및 유·무죄의 기준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마련입니다.
배심제의 존재는 형사사법 전체의 민주화와 적법절차의 강화, 피의자 및 피고인의 인권보장에 크게 기여할 것이며, 형사재판의 각 당사자들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 국민들은 정서적이고 여론에 쉽게 흔들리며, 연고와 돈에 약하고, 주관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데 이들을 편견없고 공정한 심판자로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배심제의 도입에 부정적 태도를 띠는 이들은 사실 이러한 우려를 들어 전문가법원보다 배심법원이 못하다고 합니다. 사실 그런 측면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한국인의 국민성이 그렇다거나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한국인의 평균수준이 선진국의 그것보다 크게 떨어진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으며 이를 중화시키고 중립성과 독립성을 확보할 방안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가 관건인 것입니다.
배심제에서는 활발한 기피제도의 운영, 배심원들의 대외적 접촉의 차단, 그리고 특정인의 편견이 전체를 좌우할 수 없도록 하는 평의제도의 고도의 활성화 등을 통해 편견과 선입관을 줄이고 실체적인 사실확정에 이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각종 여론의 편파적 보도에 노출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배심원이나 판사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론을 들어 막연히 형성된 편견은 구체적인 재판과정에서 증거와 반대증거의 논란 속에서 시정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의 사법적·합리적 추론(judicial rational reasoning)은 배심재판의 일상화된 경험 가운데 더욱 신장될 것이 분명합니다. 배심원은 막연히 여론과 풍문에 흔들리는 존재가 아니라, 사실문제의 재판관으로서의 책임을 갖고 임하게 되므로, 이들의 초기 견해와 최종 견해 사이에 질적 차이가 생길 것은 당연합니다.
3) 배심원은 보통사람들인데, 비전문가가 난해하고 복잡한 사건을 취급할 수 있는가? 더욱이 재판은 법의 적용 문제인데, 법도 모르는 배심원들이 어떻게 재판관이 된다는 말인가?
우선, 형사사건에서 사실확정(fact-finding) 및 법적용의 두 단계 중에서 복잡한 법리논쟁이 제기되는 사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경험많은 법관들에게 들어보면, 형사사건에서 법률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이며, 사실확정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90% 이상이라고들 합니다. “갑이 을을 죽였는가 안 죽였는가”, “갑은 정당방위를 주장하는데 그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 등의 문제를 판단하는데 복잡한 법리논쟁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며, 복잡한 법적 문제도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쉽고 효과적으로 배심원들을 설득하고, 또 법관의 설시를 받아 판단하기에 그리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배심원의 판단은 제멋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엄격한 사법절차 속에서 법관의 지도를 받으면서 제기된 주장과 증거에 대하여, 내부의 평의를 거쳐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법관은 배심원 설시를 첫 단계, 최종 단계에 하게 됩니다. 첫 단계의 설시가 비교적 일반적이라면, 최종 단계의 설시는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입니다.
유죄판결을 위해서는 유죄판정에 필요한 사실의 구성요건 및 위법성, 책임의 요소를 제시하고, 그 요건 모두를 입증했는가, 그 입증도 의심할 나위없이 이루어졌는가를 숙고해보도록 합니다. 또한 공판절차에서 법관은 소송지휘권의 행사를 통해, 증거채택 여부를 통제합니다. 이런 법관의 태도는 배심원 평결을 압박하는 심리적 효과를 갖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물론 복잡한 사실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기죄, 횡령, 배임죄 등에서 기업의 복잡한 회계장부가 펼쳐지고 복잡한 전문용어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심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필요한 지식이 기본적으로 결여된 인사를 기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사건이 복잡해도 그 법적 평가는 비교적 단순하게 귀결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사기죄라면 “사람들의 거래생활에서 있을 법한 기망인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기망인가”는 다양한 직업과 경험을 가진 인사들이 모여서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사실판단에서 배심원의 무지와 편견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법관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관에게도 부닥치는 사건 매 건이 새로울 수 있습니다. 단순한 사실의 확정도 쉽지 않은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예컨대 수뢰사건에서 피고인은 안 받았다고 주장하고, 증인은 주었다고 주장할 때, 고속도로에서 과속위반을 단속하는데 교통경관은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렸다고 주장하고, 피고는 90킬로미터로 달렸다고 주장한다면, 이 때 판사는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해야 할까요? 이런 단순한 사실의 판정에서 판사 또한 어느 쪽을 손들어주어야 할지 난감한 것은 똑같습니다.
사실판단은 전지전능한 신의 입장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며, 증거의 조각을 맞추어 추론하는 불확정한 퍼즐맞추기와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실제로 사실관계 확정에서 판사는 대개 배심원 판단을 존중하고 신뢰하며, 배심원 판정은 판사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는 긍정적 면이 적지 않습니다.
4) 돈과 시간이 너무 들지 않은가? 돈 없는 사람은 좋은 변호인을 못 구해 오히려 불리하게 되지 않는가?
비용의 측면은 배심재판을 주저케 하는 한 요인이 된다고 합니다. 배심원후보를 소환하고, 선정하는 데 많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또 배심원으로 봉사하는 기일동안 일당을 지급해야 하는 부담도 매우 클 것입니다. 하지만 배심제는 이러한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긍정적 효과가 있습니다.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배심원이 될 시민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조명해 봅시다. 시민들이 생업을 잠시 접고 통상은 사흘 이내, 조금 길 경우 1주일 이내, 극히 드물게 복잡한 사건에는 그보다 더한 기일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러나 확률 면에서 배심사건은 10년에 한번 돌아올까 말까한 사법참여의 기회일 것이며, 어쩌면 평생에 한번 돌아올까 말까한 기회일 것입니다. 자신이 재판관이 된다는 체험은 실제로 대단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으며, 그 체험은 가족과 이웃과 함께 공감되어질 것입니다. 동원예비군, 민방위 등 국가적 동원체계에 익숙해 있는 우리 국민들에게, 자신이 사법의 주체로서 참여한다는 자각을 심어줄 수 있다면 배심원 비용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고 봅니다.
배심관련 비용과 관련하여 지적되는 점 중의 하나는 변호사 비용입니다. 변호사의 능력에 따라 배심평결이 좌우된다는 ‘영화같은’ 믿음은 꽤 퍼져있고, 그 때문에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배심의 권한을 축소시키려고 노력하는 곳이 바로 돈 많은 대기업이나 권력자들입니다. 시민들은 가진 자들이 엄청난 비용으로 호화 변호인단을 구성했을 때, 그에 대해 마냥 호감을 갖지 만은 않을 가능성이 오히려 큽니다. 시민들은 직업법관보다 사회경제적으로 덜 가진 쪽에 속할 것이며, 문화적 가치적으로는 훨씬 다양하고 소수자집단에 가까운 사람도 섞여 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현재 형사사건에서 전관예우 등에 대한 비판에서 상징되는 비합리적인 고액수임료로 인한 고통의 사례가 적지 않고, 이것이 형사정의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숱하게 지적되어온 바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변호사의 존재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배심제 성공의 관건은 검사에 대응한 변호사들의 활동반경의 확대와 변론기법의 충실화에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당사자대등주의로 이루어지려면, 모든 사건에 대해 충실히 변론할 집단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것입니다. 형사사건을 전담하는 공익형사변호인(public criminal defender)의 활약이 필수불가결할 것이며, 그를 위한 비용은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비용은 현행 제도하에서도 똑같이 요구되는 바이며, 배심제를 도입할 때는 이런저런 핑계로 이 비용의 지출을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5) 배심재판을 시행하고 있는 미국의 일반 시민들의 평가는 어떠한가?
미국 변호사협회(ABA)가 지난 1998년 미국 전역의 18세 이상 1천명(배심원 경험자는 27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는 이렇습니다. 배심제도에 대한 미국민의 평가는 전체적으로 매우 긍정적인데, ▲배심원으로서의 경험이나 배심원으로 소환되었던 경험에 대해 좋았음(31%), 상당히 좋았음(25%), 그저 그랬음(19%), 환상적이었음(14%), 부정적이었음*7%), 모르겠음(4%) 항목으로 긍정적 답변이 70%였고 ▲배심제도가 피고인의 유·무죄를 가리는 가장 공정한 방법이냐는 질문에 대해 적극적 동의 및 동의가 75%(적극적 부동의 및 부동의 12%, 동의도 부동의도 아님 10%)로 배심제도가 공정하다는 평가가 훨씬 높았습니다.
6) 생계에 바쁜 한국인들이 과연 배심원 소환에 응할 것인가?
지난 2003년 12월 대법원이 전국 6대 광역시에 거주하는 20세 이상의 성인집단 1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배심원 제도에 직접 배심원으로 참여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57.0%), 매우 그렇다(8.2%), 아니다(32.8%), 매우 아니다(2.0%) 4개 항목으로 답변돼 총 65.2%의 긍정적인 답변이 있었습니다.
특히 배심원으로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답변한 응답자들만을 대상으로 ▲이삼일 정도 생업에 지장이 있더라도 배심원으로 참여할 의향이 있느냐고 질문해 58.7%의 긍정적 응답(그렇다 50.9%, 매우 그렇다 7.8%)이 나타났습니다. 이와 관련, 부정적 응답은 총 41.3%(아니다 39.9%, 매우 아니다 1.4%)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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