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정부 보건의료정책의 현재와 미래
윤태호|부산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Ⅰ. 서론
1. 건강과 건강 결정요인
지방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의 궁극적 목적은 시민 또는 주민들의 건강을 향상하는데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 궁극적 목적인 “건강”은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신체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웰빙한 상태”를 의미한다. 문제는 이러한 웰빙한 상태에는 보건의료 외의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건강의 결정요인이라 불리는 이러한 요인들에는 의료서비스, 개인의 건강행태 등 전통적인 보건의료 부문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것 외에도 소득, 사회적 지위, 교육, 고용, 근로조건, 물리적 환경 등이 있다. 특히, 후자의 요인들을 생활조건 요인 또는 사회적 결정요인으로 부른다. 따라서 건강의 결정요인의 측면에서 보자면, 건강 향상을 위해서는 보건의료 부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2. 건강, 보건의료, 그리고 보건의료서비스
보건의료기본법에서는 보건의료와 보건의료서비스를 명확히 구분해 놓고 있다. 전자는 “국민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기 위하여 국가·지방자치단체·보건의료기관 또는 보건의료인 등이 행하는 모든 활동”이고, 후자는 “국민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기 위하여 보건의료인이 행하는 모든 활동” 으로 규정하고 있다.
보건의료기본법의 보건의료 정의에 따른다면, 지방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은 “시민(주민)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기 위한 모든 정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보건의료부처의 활동 영역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건의료 서비스는 보건의료 활동의 한 부분으로 “보건의료인”이 행하는 활동인 것이다.
이렇듯 건강과 보건의료, 보건의료서비스는 다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책에서는 서로 구분없이 서로 뒤섞여 사용되어 왔었다. 이로 인해 “건강=보건의료=보건의료서비스” 라는 등식이 성립되었고, 이 등식은 정책 활동에서 관행처럼 굳혀져 와서 이제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 되었다.
Ⅱ. 본론
1. 지방정부 보건의료정책의 현재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건강=보건의료=보건의료서비스”는 중앙정부 뿐 아니라 지방정부 정책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제 보건의료정책은 보건의료서비스 정책에 국한된다. 서비스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보건의료서비스라는 재화는 “정보 비대칭” 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받는 사람은 쉽게 대상화되기 마련이다. 결국, 보건의료서비스 정책은 주는 사람, 즉 보건의료서비스 제공자와 제공하는 내용에 의존하게 되고, 보건의료정책은 보건의료서비스 제공자 내지는 보건의료 전문가의 영역으로 굳혀지게 된다. 그리고 보건의료정책은 협소한 의미의 의료(인)정책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지방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앞서 지적한 의료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공중보건정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료정책과 공중보건정책의 정책목표는 동일하다.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보호·증진하며,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접근 방법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의료정책이 전문가 중심의 질병 진단과 치료를 중심으로 하는 반면, 공중보건정책은 사회의 조직화된 노력을 중심으로 하는 접근법을 취한다.
지금까지 지방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은 서비스 제공 중심의 의료정책에 의존해 왔다. 의료정책은 개인 중심의 서비스 제공에 의존하고, 의료전문가의 책임성과 병원의 역할을 강조하게 되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재원의 크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즉, 재원이 충분하지 않으면 실행하기가 어려운 정책들이며, 돈에 따라 좌우되는 정책들이 대부분을 이룬다. 취약계층에 대한 특정 서비스 제공 및 진료비 지원, 공공병원의 설립, 보건의료 국책 사업 유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전 국민이 2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르신들이나 취약계층에게 (건강보험 건강검진과 아무런 차별도 없이 중복적인) 무료검진을 했다는 홍보를 자랑스럽게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무엇이든 주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항상 지방정부 예산이 부족해서 다 주지 못한다는 푸념을 털어 놓는다.
이에 비해 공중보건정책은 건강을 위한 집단적 책임성을 강조하고,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들에 대한 정부의 리더십을 중요하게 간주한다. 공중보건정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재원이 물론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여러 부문들과의 협력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지역 주민의 건강 향상을 위하여 분절적인 정책들을 체계적이고 종합적 건강정책으로 재조직함으로써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건강 지향적 정책”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처 간 장벽을 허물어뜨리기 위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방정부의 능력인 것이다. 지역의 높은 자살률을 개선하기 위하여 전문가의 의료서비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지역의 다양한 보건, 복지, 주민단체 자원들과의 협력을 통해 자살의 위험에 처한 이들을 찾아내고, 예방적 활동을 하는 것이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중보건정책이 중요하고, 의료정책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지방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이 예산의 크기에 비례하는 의료정책에 지나치게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보건의료정책의 균형을 찾자는 것이다. 그 균형점을 찾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간과해 왔었던 공중보건정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방정부에서 뭔가 있어 보이는 병원이나 센터를 유치하는 등의 큰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으로 지역 주민의 건강을 개선하겠다는 것은 허구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서울대학교병원이 위치한 종로구가 서울에서 가장 건강 수준이 좋은 자치구가 아니며, 서울삼성병원이 위치한 강남구 일원동 역시 서울에서 가장 건강 수준이 좋은 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방정부에서 우수한 병원이나 센터를 유치한다고 해서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공중보건은 고도로 전문화된 의료서비스에 비해 하찮은 것, 열등한 것이 절대 아니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인류의 수명연장에 기여해 온 것은 의료서비스가 아니라 영양상태의 개선과, 환경위생 개선을 중심으로 하는 공중보건 활동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전염병이 주요한 건강문제였던 과거에서 공중보건이 전염병 예방을 위한 환경위생 활동이 중심이었다면, 만성질환이 건강 문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 시대에서 공중보건은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해결하려는 활동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방정부가 특정 영역의 전문가가 중심이 되는 의료정책에만 의존해서는 시민(주민)들의 건강향상을 목표로 하는 지속가능한 보건의료정책을 구현할 수가 없다. 특히,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방식의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2. 지방정부 보건정책의 미래
현재의 취약한 지역보건정책이 강화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방정부의 (보건의료) 예산이 늘어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건강정책으로의 인식 변화, 건강한 생활을 지원하는 보건의료정책으로의 변화, 지역 간 건강격차를 줄이기 위한 자원 배분 정책, 그리고 지역보건의료정책에서 주민참여와 숙의민주주의의 실현이 필요하다.
첫째, 의료정책에서 건강정책으로 인식 변화이다.
앞서 계속 지적한 바와 같이 지방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의료정책에서 건강정책으로의 인식 전환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공공병원 하나 더 짓고, 보건소를 중심으로 저소득층에 대한 방문보건을 확대하거나 무료진료사업을 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건강을 의료서비스의 제공과 동일하게 인식하고,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정책으로는 예산만 낭비하고, 지역 주민들의 실질적 건강 개선 효과는 거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지역주민들의 건강 개선이 정책목표라면 실질적으로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개선해야 할 것이며, 그 출발점은 건강정책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에 있다.
둘째, 건강한 생활을 지원하는 보건의료정책 실현이다.
의료서비스의 경우 대부분 민간의료기관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재원 역시 지방정부를 거치지 않고 모두 건강보험에서 직접 지출되기 때문에 지방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다. 하지만, 공중보건 활동은 지방정부가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민간의료기관뿐 아니라 국민건강보험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지방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은 지방정부 내 행정 권력에서 힘이 약한 보건소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데 있다. 더군다나, 많은 지방정부에서 보건소를 공중보건 활동의 중심 기관이 아니라 진료나 예방접종과 같은 대민서비스 제공의 중심기관으로 인식하며, 보건소 사업 역시 인력과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그 대상은 대부분 저소득층에 국한된다. 따라서, 법정 저소득층이 아닌 일반 서민이나 중산층들은 지방정부의 보건의료정책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방정부 보건의료정책의 중심이 개인에게 직접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보다는 다수의 주민들이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 또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전환이 되어야 한다. 즉, 정책의 초점이 개인이 아니라 인구집단에게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인들, 즉 건강의 결정요인을 해결하는 지방정부의 보건의료정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현재 여러 지방정부에서 “건강도시”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 사업은 주민들이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역의 사회적, 물리적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주민의 건강을 향상시키고 건강형평성을 달성하는 것이다. 건강도시 사업을 원칙에 맞게 제대로만 하더라도 좋은 지방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이 될 것이다.
셋째, 지역 간 건강격차를 줄이기 위한 자원 배분이다.
우리나라에서 미래에 가장 중요한 지역보건의료정책 목표는 지역 건강 격차의 해소가 될 것이다. 이미 선진국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도 건강 격차의 해소 없이는 전체 국민 또는 주민들의 건강수준을 향상하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는 지역에 보건의료자원을 배분할 때 단순한 인구수에 비례하는 방식의 자원배분이 아니라, 지역의 건강격차를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자원을 배분해야 한다. 그리고, 지역의 건강격차(지역 간 사망률 격차 등)를 지역균형발전의 중요한 평가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방정부에서는 지역의 필요에 맞는 지역보건의료정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지역에 따라 건강의 격차가 큰 지역이 있는 반면, 건강의 격차가 거의 없는 지역이 있을 수 있다. 지역 내 건강의 격차가 큰 곳이라면, 그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건강취약지역에 자원을 보다 집중화할 필요가 있다. 만약, 지역 내 모든 곳이 비슷한 수준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면 가용한 자원을 모두 활용하여 지역 주민 대다수에게 효과가 균등하게 미칠 수 있는 보건의료사업을 기획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건강정책에서 주민들의 참여와 숙의민주주의 실현이다.
미래의 지방정부 보건의료정책에서 운영의 공공성 또는 민주화를 구현하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한 핵심은 바로 참여와 이에 근거한 숙의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기존의 의료정책 패러다임에서는 전문가가 중심이고 주민은 대상화된 존재이므로 주민참여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전문적 지식이 없는 주민이 참여하게 되면 잘못된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는 선입견이 강하였다. 하지만, 건강정책의 패러다임에서는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관련된 지역의 여러 자원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므로 다양한 주민들의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지역의 필요에 근거한 계획 수립과 사업의 실행, 평가를 위해서는 참여자들이 의사결정을 하는데 형식적 대의민주주의가 아니라, 심도 있는 토의가 가능한 숙의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Ⅲ. 결론
지금까지 지방정부 보건정책의 현 주소와 이를 강화하기 위한 미래의 정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모든 정책은 정책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많은 지방정부의 보건의료정책들이 “주민 건강 향상”, “건강 격차 해소”를 목표로 내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수단들은 지엽적인 문제 해결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달성하고자 하는 정치적, 정책적 의지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미래의 지방정부 보건의료정책은 의료정책 일변도에서 의료정책과 공중보건정책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특히, 지금까지 간과되어 왔었던 인구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공중보건정책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보건의료에서 주민참여와 숙의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학문적 세계의 구호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방정부 수장의 정치적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건강은 곧 정치”이다.
월간 <복지동향> 2014년 01월호(제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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