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3 2013-03-14   804

[복지동향 173호] 편집인의 글

편집인의 글

이진석 l 서울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

작년 12월 19일 저녁 이후 나는 TV뉴스를 본 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다. 구독하던 신문도 끊었고, 구독 만료가 된 주간지도 구독 연장을 하지 않았다. 포털에서 눈에 띄는 기사를 클릭해서 보게 된 것도 최근에 이르러서이다.

나는 지난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 참여했었다. 공약을 정리하고 다듬는 작업에 밤을 꼬박 새운 날이 헤아릴 수 없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에 전력을 다 할 수 있었다. 설레고 가슴 벅찬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 결과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아무리 해도 모자란다.

그러나 나의 반성과 사죄의 대상은 말 많은 호사가들이 아니다. 선거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럴 줄 알았다.”는 독설을 내뱉는 논객들은 더더욱 아니다. “이래서 졌고, 저래서 졌다.”는 평가를 쏟아내는 비평가들도 아니다. 배설물 같은 글로 사이버 공간을 도배하는 SNS상의 빅마우스들에게도 나는 하등 관심이 없다. 선거 기간 내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던 수많은 단체들에게는 연민의 감정만을 느낄 뿐 반성과 사죄의 마음은 전혀 없다.

나의 반성과 사죄의 대상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1,470만 명의 국민과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1,580만 명의 국민이다. 물론 여기서 말 많은 호사가, 논객, 비평가, SNS의 빅마우스 등 기껏해야 수 천 명에서 수 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제외된다.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국민에게는 캠프의 실력 부족으로 큰 실망과 상처를 안긴 점을 무릎 꿇고 반성하며 사죄드린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에게 잠시 원망의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국민의 절반에 이르는 분들이 직면한 삶의 불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우리의 공약은 이 분들이 겪는 삶의 불안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신뢰를 얻지 못했다. 어떤 이가 “선거 결과는 선거 운동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간의 축적된 활동의 결과로 좌우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선거 결과는 예견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국민이 겪는 삶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했고, 신뢰할만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고, 국민이 우리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두둑한 밑천도 그 동안 만들지 못했다. 이런 이해 부족과 실력 부족을 반성하고 사죄드린다.

이번 선거 결과를 사회 진보에 대한 우리의 철 지난 우월감과 자만에 대한 통렬한 죽비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그건 진보가 아니다. 나는 옳았지만, 보수의 선동에 현혹된 무지한 국민이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도 진보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그간 자신이 신주단지 모시듯 가져온 주의주장을 벌써부터 리바이벌하는 것도 성급한 처신이다. 세상의 변화에 귀 기울이고, 나의 변화에도 개방적인 것이 진보의 기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5년 전, 10년 전의 인식이 지금의 인식과 대동소이하다면, 세상을 바꾸기 위한 5년 전, 10년 전의 해법이 지금의 해법과 대동소이하다면, 지금 잠시 행동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5년 전, 10년 전과 지금이 똑같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적 믿음의 반열에 들어간 것으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나는 사회 진보를 다룬 글은 다음의 두 가지 원칙으로 읽으려고 한다. 첫째, 국민이 직면한 지금 당장의 삶의 불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둘째, 국민이 직면한 삶의 불안을 지금 당장 바꾸어 줄 수 있는가? 이번 호 복지동향의 심층주제는 ‘우리 교육의 현실과 개선방향’이다. 독자들께도 이런 두 가지의 원칙으로 심층주제 글들을 읽어보시길 권유드린다.

월간 <복지동향> 2013년 03월호(제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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