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권으로서의 재생산권 – 낙태, 사후피임약을 중심으로
윤정원 l 연구공동체 건강과 대안, 산부인과 전공의
건강권으로서의 낙태권 – safe abortion
한해 2천만 건의 안전하지 못한 낙태가 이루어지고 이들의 대부분은 낙태가 불법인 개발도상국에서 이루어진다. 개도국에서는 막대기나 옷걸이 같은 이물질을 자궁에 삽입하기, 표백제나 테레빈유, 유기용제 마시기, 질에 독초 삽입 등의 방법으로 한해 20만명이 위험한 낙태를 시도한다. 낙태 관련 합병증으로 매년 800만명이 고통받는데, 이들 중 500만명만 치료를 받을 수 있고, 67,000명의 여성이 사망한다. 안전한 낙태만 가능하다면 전체 모성사망 의 20~50%가 줄어든다.
안전하지 못한 낙태가 주요한 공중보건의 이슈인지는 오래다. 1979년 UN 34차 총회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에 관한 협약’(CEDAW)에서 재생산-성적 건강과 권리를 여성의 인권으로 보장되야 하는 가장 기본적 권리로 선언하였고, 이어진 카이로 회의에서는, “안전하지 못한 낙태의 후유증을 치료하는데 즉각적이고 양질의, 인간적인 의료지원을 제공할 것, 낙태를 받는 여성들에게 낙태 후 상담(가족계획과 피임, 정신적 상담)을 통해 원치 않는 임신과 반복되는 낙태를 막을 수 있도록 할 것, 법으로 낙태가 금지되어 있는 나라의 경우에서도 안전한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 등을 발표했다. 낙태권은 보편적 인권으로, 성관계, 임신, 출산, 낙태를 개인이 자유롭고 책임있게 결정할 수 있으며, 낙태와 관련한 정보와 시술 수단에의 접근권, 그 과정에 있어서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받는 것을 골자로 한다.
낙태를 건강권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은 비단 개발도상국에서의 모성사망만이 그 예가 아니다. 의료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미국에서도 최근 낙태로 인한 모성사망이 점점 늘고 있는데, 이는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들, 히스패닉이나 흑인과 같은 유색인종에서 안전하지 못한 낙태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 초 프로라이프의 낙태시술의사 고발 후 단속과 처벌이 늘어나면서 불법으로 유통되는 낙태약물이나 무허가 낙태에 여성들이 의존할 수 밖에 없어졌다는 보고가 속속 나오고 있다. 단지 의료기술의 낙후 때문만이 아니라, 법과 현실의 부조리, 빈부격차,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조건 때문에 좌지우지되는 낙태권의 불평등에 대해, 정의로서의 낙태권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의 재생산권 관련 동향
30년은 넘은 재생산권, 재생산 건강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된 것은 2010년 2월 3일,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 시술병원 3곳을 검찰고발 하면서부터이다. 이어 3월 1일에, 보건복지부의 신년계획 중 [불법 낙태 예방 종합 대책]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낙태의 근본 선행요인인 원치 않는 임신을 줄이기 위한 성교육이나 피임에의 접근성 향상 보다는, 미봉적인 낙태 ‘금지’ 및 ‘미혼모 지원’을 골자로 하고 있다. 낙태를 줄이면 출산율이 높아질 것 이라는 일차원적인 생각은 사실 2009년부터 이명박 정부 미래 기획 위원회의 저출산 대응 정책 회의들에서 나온 내용이다. 2009년 11월 25일 보건복지부 전재희 장관은 저출산 대응 정책 중의 하나로 낙태 줄이기 캠페인을 채택하고 낙태를 단속하겠다고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렇게 국가의 출산장려 드라이브와 프로라이프 단체들의 행동력이 결합되어, 형사고발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이슈 파이팅을 시작하였으나, 논의의 장을 확장시킬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역시 양 진영의 입장이 팽팽해 결국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 공론화의 수준까지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러던 중 2012년 8월 23일 낙태 시술 조산사에 대한 처벌에 대해 제기된 위헌소송이 결국 합헌으로 판결을 받고, 2012년 10월 17일에는 위에서 프로라이프 의사회에 의해 고발되었던 사건이 대법원까지 끌어간 끝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형을 확정 받게 된다. 이어 2012년 11월에는 고3 학생이 수능 시험이 끝난 뒤, 임신 23주에 낙태 시술을 받던 중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역시 모자보건법의 임신 24주 조항, 청소년의 임신과 임신중절, 미혼모 문제 등에 대한 논의의 계기가 될 수 있었으나 뒤따른 대선정국에 묻히고, 당시에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실정법을 잘 준수하여 진료에 임해달라’는 회원 전체공문을 돌린 바 있다.
재생산권 관련 이슈들 중에 주의깊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또 한가지 이슈는 사후피임약 일반약전환이다. 2012년 6월 식약청의 피임약 재분류 발표안(사후피임약은 일반약 전환, 일반피임약은 전문의약품 전환) 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는 여성의 의약품 접근권과 안전성에 대한 논쟁 보다는 의사협회와 약사회의 이권다툼으로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면서 결국 2012년 8월 29일 중앙약심 의약품재분류 회의에서 현안을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급 마무리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국가별 낙태 비용 해결 정책
낙태비용을 개인이 부담하느냐 공공재정에서 부담하느냐는 곧, 낙태를 의료행위로 보느냐, 국가보건체계가 뒷받침되어 있느냐 라는 질문들과 연결된다.
국가 공공보건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는 나라들은 대부부분 낙태 시술이 공공재원에서 지원된다. 덴마크, 독일, 루마니아, 영국 등 NHS 가 있는 나라에서는, 공공병원에서 받는 시술은 무료이거나 아주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다. 핀란드는 시술비용은 NHS에서 무료로 지원하고, 입원비는 개인이 부담하도록 되어있다. 프랑스는 전국민의료보험제도에서 낙태 시술비용의 80%를 지불해 준다. 환자가 부담하는 비용은 시술비의 20% 정도인데, 이마저도 저소득층에는 무상으로 해준다.
무상의료시스템이든 전국민 의료보험 시스템이든, 기본적인 진료비 지불 체계가 갖추어져 있는 경우라도 공공병원이 아니라 민간영리병원에서 시술을 할 때, 환자가 본인부담으로 해결해야 하며 그 금액이 높아지고 차이가 많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오스트리아는 전국민의료보험제도가 있지만 낙태가 보험적용되지 않아, 민간병원별로 $388-$1085 로 차이가 크다. 일본 역시 의료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지만, 공공병원은 분만, 수술 등으로 낙태시술을 할 시간이 없고 민간병원이 거의 시행하게 되는데(이는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이 비용은 $1000-$3000로 병원별로 차이가 크다.
국가의 공공보건시스템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개도국의 경우에는, 예상되듯이 개인의 부담이 대부분이다. 인도는 법적으로 낙태가 허용되어 있고 보건소나 국립병원에서는 무료로 시행되나 그 시설이 낙후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 일정 수준 이상의 의료시설에서 시술을 받으려면 $16-20 정도의 개인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네팔의 경우 합법화도 되어있고, 오히려 가족계획과 산아제한과 함께 정책적으로 장려되는 분위기이지만, 국영병원에서 시행 받는데도 $13정도의 개인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비용이 어느 정도인가, 합법과 불법의 비용차이가 얼마만큼인가, 국가가 비용을 대주는가 개인의 책임인가라는 문제는 의료 이용 접근성과 직결된다. 과테말라의 경우 산모의 생명이 위협되는 경우나 강간, 근친상간의 경우만 낙태가 합법화되어 있으나 연간 6만5천건의 낙태가 암묵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37%의 국민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 하는 과테말라에서 민간 병원에서 낙태시술을 받기 위해서는 $128-1026가 필요한 데 비해, 산파에게 받는데는 $38-128가 든다. 85%의 국민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사는 우간다에서 전문의료인에게 낙태시술 받는데 드는 비용은 $6-58인데 비해 불법시술은 $6-18 가 필요하다. 선진국의 8%만이 안전하지 못한 낙태인데 비해,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의 낙태건수의 95%가 안전하지 못한 낙태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결국 보건의료시스템의 구축과 재정지원이 안전한 낙태와 직결되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경우, 현재 모자보건법상 허용되는 낙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수가가 책정되어 있다. 임신 8주이내 55,190원, 8주-12주 75,790원, 12주-16주 88,430원, 16주-20주 126,300원, 20주- 179,040원. 단속분위기가 형성되기 이전 시술금액이 평균 30만원 정도였던 점을 볼 때 합법화에 따른 경제적 유인동기 감소가 산부인과의들의 가장 큰 걱정이 아닐까 싶다. (아니나다를까 산부인과의사회에서 제시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에는 국민건강보험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조항이 들어있다.) 낙태시술의 80%정도가 임의비급여로 자의적으로 책정된 금액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전체 의료비 및 환자들의 부담을 상승시키고, 정확한 통계 및 역학조사가 어렵게 한다. 건강보험적용이 전제되지 않는 합법화는 시술 접근성에 있어서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 합법화와 함께 건강보험적용, 수가적정화까지 같이 고민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약물적 낙태(Medical abortion)
약물적 낙태는 비수술적인 방법으로, 약을 복용함으로써 태아가 조기 낙태되게 하는 이른바 ‘먹는 낙태약’을 말한다. mifepristone 은 태아가 자궁 안에 잘 있도록 해주는 호르몬 프로제스테론 생성을 억제하여 임신을 유지하게 어렵게 만든다. 이에 이어 자궁수축 유도제를 추가 복용하면, 진통이 생겨 태아가 자궁 밖으로 배출된다. mifepristone 은 세계 보건기구 WHO에 의해 그 안전성과 효과를 인정받았고, 마취가 필요 없다는 장점으로 개도국이나 낙후된 의료환경에서 이점을 가지기 때문에 2005년에는 필수의약품 목록에 등재되기까지 하였다. 낙태 성공률은 90-95%에 달하며, 부작용으로는 자궁수축에 따른 복통이 가장 흔하고, 1-2%는 심한 출혈로 수술적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약물적 낙태는 7주 이전에는 수술적 방법보다도 안전하고, 9주까지는 그 안전성이 확립되어 있다. 이 시기 이후에는 불완전 낙태의 가능성 때문에 수술적 낙태가 권고된다.
낙태약물인 mifepristone 의 개발과 시장화는 의학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경로를 걸어왔다. 처음 이 약물을 개발한 프랑스의 제약회사 Roussel Uclaf 의 이름을 달고 연구되던 RU-486은 시장에 출시되기 전부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1988년 9월, 6년간의 임상시험 끝에 이 약이 mifepristone 이라는 성분명으로 프랑스에서 낙태용 약물로 승인되자 거센 낙태반대 시위 및 대중의 우려들이 속속 대두된다. 결국 1988년 10월, Roussel Uclaf의 이사진들은 시장철수를 결정하지만, 프랑스정부와 보건국에서 공중보건을 위하여 약물을 계속 생산해 줄 것을 요구한다. 프랑스 보건부장관 Claude Évin은 “나는 낙태 논쟁이 여성에게서 의학진보의 결과물을 빼앗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 지금부터 mifepristone 은 단지 제약회사의 상품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도덕적인 상품moral property of women 임을 프랑스정부가 보장할 것이다” 고 말했다. 결국 mifepristone은 1990년 2월부터 mifegyne이라는 상품명으로 병원에서 판매되기 시작한다. Mifegyne은 곧 1991년 7월부터 영국에서, 1992년 9월부터 스웨덴에서 승인받았고, 2000년 9월부터는 미국 Danco 제약에서 Mifeprex라는 상품명으로 승인을 받았다.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Roussel Uclaf로부터 판권을 넘겨받은 Exelgyn 제약이 계속 Mifegyne을 생산중이며, 이후 2012년 까지 중국, 프랑스, 영국, 독일, 그리스, 스페인, 미국, 대만, 인도, 베트남, 러시아 등 50개국에서 승인 후 판매중이다.
미국의 경우 2000년 9월 FDA가 시판을 승인한 후에도, 논쟁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약의 효과와 안전성 그리고 수술적 처치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기존의 낙태수술(인공임신중절수술)을 대치할 수 있는 치료법으로 여성단체들과 앨 고어 민주당 대통령후보 등 낙태옹호론자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으나 생명옹호론자와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는 즉각 반대의사를 표명해 미국 대통령 선거의 주요 이슈로까지 등장하게 된다. 현재 Mifeprex는 7주 이내의 경우에서, 병의원에서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다. 많은 프로라이프 단체들이 시장 철수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로비를 하고 있지만, 약물적 낙태의 비중은 꾸준히 늘어나 2008년 임신중절의 17%를 차지했다. (9주미만의 임신 중에서는 25%이다.) 현재 미국내의 낙태약 관련 논의는 원격의료와 의무기록 전산화 등을 이용해서 오지 여성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낙태약 자판기를 설치하는 것을 고안하는 데까지 진행되었다.
유럽의 경우, 낙태가 고도로 제한된 아일랜드와 폴란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Mifegyne을 허가하였다. 이탈리아는 바티칸 교황청에서 지속적으로 반대의견을 냈으나 결국 2009년 도입되었고, 현재는 병원 내에서만 사용 가능하다. 현재 핀란드에서는 2009년 행해진 낙태의 84%가, 스코틀랜드는 70%가,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는 68%가,, 영국은 9주미만 낙태의 52%가 약물적 낙태로 이루어진다.
세계 최초로 낙태약물이 허가된 곳은 사실 개발국인 프랑스가 아니라 중국이다. 임상시험은 1995년부터 진행되었고, 1988년 10월 중국이 세계최초로 mifepristone을 허가했지만, 자국에서도 아직 승인 받기 전이라 Roussel Uclaf 사에서 공급을 거절하였다. 이에 1992년 중국정부는 자체제약회사를 설립하고 복제약을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로 의사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수술적 방법과 약의 가격이 비슷해지면서 현재는 지역에 따라 수술적/약물적 방법의 활용율이 다른 편이다.
뉴질랜드의 사례는 아주 고무적이다. 1999년 프로초이스 의사들이 직접 Istar라는 비영리 수입회사를 만들어서 MedSafe(뉴질랜드 식약청)에 Mifepristone을 수입판매하는 것에 대한 허가를 신청하였다. 이는 2001년 8월 결국 승인을 받게 되었고, 2001년 10월부터 처음 사용되게 된다.
우리나라는 사용여부 검토나 도입 논의가 한번도 진지하게 고려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관련 법 상에서도 모자보건법에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라는 조항으로 수술적 낙태만이 언급되고 있다. 물론 새로운 의료기술의 도입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은 항상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의학적 안정성이 충분히 보장되었고, 많은 국가들에서 상용화되어 있는 이 때, 낙태 논의가 전 영역에서 시작되고 있는 현재는 도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더 없이 좋은 시점으로 보인다.
이런 와중에 2010년 초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시술의사고발로, 낙태시술비가 급격히 상승하고 시술을 거절하는 병의원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이에 편승하여 중국산 낙태약이 불법 유통되고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취재진이 직접 인터넷에서 구한 연락처로 25만원을 입금 한 후 하루 만에 중국산 낙태약이 배달되어 왔다고 한다. 하혈과 복통 등 부작용 사례가 보고되면서 경찰수사도 이루어져, 올해 2월에는 1년 동안 1억 원 이상을 챙긴 불법 낙태약 유통 조직이 검거되었다고 한다. 사용 자체가 금지인 낙태약을 인터넷을 통해 쉽게 사게 되고, 이 과정이 의료상담이나 복약지도가 전혀 없이 진행되다 보니 계류유산(죽은 태아가 자궁 안에 남아 있는 것)과 같은 부작용은 물론 출혈이나 불완전유산, 패혈증의 경우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도 있는 상황이다. 세계 각국에서 낙태약이 허용되고 있지만, 부작용과 오남용 방지를 위하여 의사처방 하에서 복용할 수 있도록 엄격히 규제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음성적인 시장이 확대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공론화를 통한 도입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사후피임약
모든 임신 중에서 절반 가량이 의도하지 않은 임신이다. 이 중 절반 정도가 피임 수단을 사용했지만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거나 실패한 경우이고, 나머지 반이 피임 수단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 – 갑작스런 성관계, 성폭력 등 – 였다. 사후피임약을 사용할 수 있고 여성이 그 정보들을 아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임신과 이로 인해 이어지는 낙태를 막을 수 있기에 중요하다. 일각에서는 사후피임약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면 피임 노력을 덜 할 것, 남성이 콘돔을 덜 쓰려 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연구 결과, 여성들은 사후피임약을 상비로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정기적인 피임수단들(콘돔이나 피임약)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정기적인 피임수단들이 더 피임율이 높기 때문에, 그리고 사후피임약이 가지는 메스꺼움, 구토, 두통과 같은 부작용들, 다른 피임수단들에 비해 더 높은 가격 때문에 사후피임약을 주요 피임수단으로 여기기는 힘들다. 정리하면, 사후피임약은 차선책(정기적인 피임수단들에 이은)이지만 반드시 활짝 열어놓아야 하는 통로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사후피임약이 도입된 것은, 2001년 노레보정이 수입되면서였다. 이 후 노레보의 특허가 만료된 후 현재는 5-6종의 사후피임약이 상용화되어있는 상태이다. 2011년에는 성관계 후 5일까지로 유효시간이 증가한 엘라정이 전문의햑품으로 도입되었다. 의약품 전문 조사기관 IMS데이터에 따르면 응급피임약의 연도별 매출액은 2002년 13억원에서 2006년 34억원, 2008년 41억원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2009년 1월 서울시내 30개 산부인과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결과 우리나라 가임기 여성 10명 중 3명은 응급피임약 사용경험이 있었고, 주 이용 계층은 20대 미혼여성(66.7%)이었다. 이렇게 여성들의 삶과 건강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 사후피임약에 과연 여성 자신이, 자신을 위해 주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때이다.
세계보건기구 WHO와 전문가단체들은 사후피임약이 의학적으로 안전하고, 모든 여성에게 동일 용량을 처방하면 되기 때문에 의료인의 진단이 필요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사후피임약이 전문의약품이 될 지, 일반의약품이 될 지는 의학적인 판단이라기 보다는 사회,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현재 응급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의사의 진료를 받은 후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다. 하지만 2009년 6월 한 신문사의 탐방조사결과, 12곳의 약국 중 처방전 없이 응급피임약을 판 약국이 10곳이었고, 처방전 없이 찾아온 고객에게는 최대 5만원까지 값을 올려 받은 약사도 있었다. 20곳의 산부인과 의원 중 보호자가 대신 와도 무관한 곳이 14곳이었고, 일부는 간호사면담만 받은 후 처방전을 주기도 하였다. 처방전가격 역시 비급여 항목이기 때문에 병원에 따라 1만- 3만원으로 천차만별이다. 사실상 전문적인 피임상담과 복약지도를 받지 못하고 있음이 명백한 진료/조제행태임에도 전문의약품의 지위로 남겨 두는 것은 결국 여성들의 응급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병원 휴진이나 비용 때문에 재 때(72시간 내) 약을 복용하기 힘들게 될 뿐 아니라, 정확한 약품 정보와 약값, 진료비에 대해 알 의료소비자로서의 권리도 박탈되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어떻게 응급피임약에 접근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 현재 사후피임약이 상용화되어 있는 나라는 154개국이다. 이 중 처방전 없이 약국 카운터에서 직접 살 수 있도록 된 나라는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프랑스, 인도 등 71개국이나 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사후피임약을 공공병원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17세 이상의 여성들에게 사후피임약의 약국판매가 2006년 8월 이후부터 가능해졌다. 현재 제약회사와 여성단체들이 미 식품의약청에 연령제한을 없애도록 신청, 심사가 진행되는 중이다. 또한 2010년 8월, 성관계후 5일까지 효과가 있는 제제인 ella 의 판매가 승인되었고, 2013년 4월부터는 17세 미만 청소년들에게 까지도 사후피임약이 일반의약품으로 전환되었다.
캐나다에서는 2005년 4월 이후 의사의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약사와의 간단한 상담 이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Canadian Women’s Health Network와 같은 여성단체, 의료단체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가능하게 되었다. 처방이 꼭 필요했던 2005년 이전과 비교해서 두 배 이상 판매가 증가하여, 3년간 63만 8천정이 판매되었다. 2008년 5월부터는 약사와의 상담도 필요없이 구입이 가능해졌는데. 이는 여성이 개인적인 사생활을 약사에게 말해야만 약을 구입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거부감, 충분히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에 대해 여성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가능해 진 것이다.
외국의 사례들로 본 재생산권의 확장의 역사
1. 멕시코
전통적으로 라틴아메리카는 카톨릭문화권의 영향으로 낙태에 대한 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니카라과나 엘살바도르, 칠레의 경우 치료적 낙태까지 포함한 모든 경우의 낙태가 금지되어 있는데, 이는 통치 세력이 카톨릭 교회와 긴밀한 정치적 제휴를 맺고 있는 곳들이다. 멕시코의 경우 1910 멕시코 혁명 후 정교분리가 이루어져, 다른 나라보다는 진전된 낙태법, 생명이나 건강침해의 경우에 한해 합법화된 낙태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불법 낙태의 후유증은 심각하여 70년대 여성사망원인의 5위, 한해 2-3천명이 사망하는 정도였다. 멕시코 낙태 합법화 움직임은 1970년대 신페미니즘운동과 함께 시작하여 1980년대 ‘자발적 모성’ 권리로서의 합법화 운동까지 계속된다. 이 와중에 1999년, 빠울리나라는 13세 소녀가 성폭행 후 낙태시술을 받지 못하여 출산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후 여론에 힘임어 2000년 성폭력에 의한 낙태가 합법화된다.
멕시코의 집권당은 보수적인 국민행동당인데 비해 수도인 멕시코시티는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민주혁명당이 집권해왔다. 2000-2006년 멕시코시티 시장이었던 민주혁명당 Andrés Manuel López Obrador 가 부정개표를 포함, 0.58% 차이로 국민행동당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면서 대중적 분노가 결집하게 된다. 이어 멕시코시티의 시장으로 취임한 민주혁명당의 Marcelo Ebrard 가 낙태 합법화를 추진하고,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없었던 민주혁명당 의원들까지 집권당에 반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낙태합법화에 찬성하는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에 힘입어 2007년, 멕시코시티내에 한해 12주 이내 낙태를 완전 합법화하는 법안이 통과된다. 현재 낙태시술은 공공의료기관에서 무상으로 시행되며, 출산과 낙태에 대한 상담과 피임기구도 무상제공된다. Pro-Vida(Pro-life의 멕시코표현) NGO에서 7만명의 반대 서명이 포함된 탄원서를 제출하고, 여당이 대법원에 위헌신청을 하는 등 보수의 반공이 격렬하였으나 결국 2008년 8월 합법화가 정식 공표되었다.
2. Women on waves
네덜란드의 여성액티비스트단체인 Womens on waves(파도 위의 여성들) 은 아일랜드, 폴란드, 포르투갈 등 낙태가 불법인 나라들을 찾아다니며, 여성들을 싣고 공해상으로 나가 mifepristone 같은 응급 약물로 인공임신중절시술을 시행해준다. 이들의 선박은 임신중절 시술보다 여성의 건강과 낙태권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2004년 포르투갈에서는 군함 두 대가 본디엡호의 입항을 저지해 충돌을 빚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포르투갈에서는 낙태 논쟁이 촉발됐다. 이는 이듬해 사회당의 선거 승리로 이어졌고, 사회당 정권은 07년 4월 국민투표를 통해 여성에게 낙태권을 부여했다. 우리도 이 낙태선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3. 아일랜드
낙태관련 법이 가장 극단적인 나라로 항상 꼽히는 (모든 경우에 낙태가 금지인) 아일랜드는 최근 큰 변화를 겪었다. 1992년 아일랜드 대법원이 임신부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 낙태수술을 할 수 있다고 결정했지만 아일랜드 정부는 지금까지 관련 법률을 제정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의사들은 낙태수술을 거부하고 있으며 한 해 4,000~5,000명의 임신부들이 영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해 왔다. 2012년 10월, 아일랜드에 거주하던 인도인 임산부가 태반조기박리로 응급 수술 및 임신 종결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나, 병원에서 태아의 심박이 아직 뛰고 있다고 수술을 거부하여 결국 패혈성 유산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전국적인 낙태법 개정 여론이 확산되고, 결국 2012년 12월에 산모의 건강과 생명이 위험할 경우에는 낙태를 허용하는 것으로 개정되기에 이른다. 올해 초 Belfast 지역에 최초의 낙태 시술 병원이 문을 열었다.
정리하며
생명 대 선택의 이분법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safe abortion’ 에만 초점을 맞춰 글을 전개했음에도, 할 이야기,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안전한 낙태에의 접근권은 단지 시술이나 약 자체뿐만이 아니라 법적 층위, 의학적 배경, 건강보험체계,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하나하나 연결되어 있다. 우리 사회엔 Pro-life 는 있어도, Pro-Choice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출산이든 낙태든, 그것이 진정 여성의 오롯한 선택이었던 적이 있는가. 낙태비디오가 아니라 월경주기 계산하는 법을 학교에서 배우고, 약국에서 약사와 눈을 마주치며 피임약 주세요 말할 수 있고, 반항하는 파트너의 성기에 내가 좋아하는 향의 콘돔을 끼울 수 있으며, 임신했다고 학교에서 퇴학당하지 않고, 결혼여부와 관계없이 출산지원이 될 때, 낙태와 출산이 다 건강보험적용이 될 때, 무엇을 선택하든 소독된 진료대에서 경험 있는 의료진에 의해 적절한 시술을 받을 수 있을 때, 아이를 걱정하지 않고 직장을 다닐 수 있을 때, 내 아이가 엄마만 있는지 부모가 다 있는지에 따라 차별 받지 않을 때, 우리는 출산을 ‘선택’할지 낙태를 ‘선택’할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적어도, 안전한 낙태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월간 <복지동향> 2013년 07월호(제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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