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석 |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들어가며 : 돌봄, 돌봄 관계, 돌봄 위기
메리 데일리(Mary Daly)는 “의존적인 성인이나 아동의 신체적, 정서적 필요를 충족하는 데 관련된 행위와 관계들로서, 이러한 행위와 관계가 할당되고 수행되는 규범적, 경제적, 사회적 체계를 포함”1하는 것이라고 돌봄의 정의를 정리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돌봄의 정의는 돌봄을 행위의 측면에서 관계의 측면으로 확장함으로써 관계로서의 돌봄에 내재한 다양한 행위자의 존재를 부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사회경제적, 규범적 맥락 안에 돌봄 관계를 위치 지운다는 점에서 중요한 함의와 분석적 유용성을 가진 정의로서 이 글에서도 이와 같은 정의에 기반하여 돌봄을 논의하고자 한다.
돌봄에 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돌봄은 인간 존재의 필수적인 조건이며,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돌봄은 개인의 삶을 떠나지 않고 생애주기를 관통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 한다고 얘기한다. 이런 의미에서 돌봄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모두의 관심사(interest)이자 일(business)이다. 돌봄 관련 연구와 문헌들은 돌봄이 모든 개인에게 권리이자 책임임을 확인시켜준다.
돌봄에 대한 일반적 정의와 성격 규정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에 관한 관심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데는 부인할 수 없는 배경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구조와 가족구조의 변화, 그 규모와 속도 모두에서 변화 정도는 돌봄과 돌봄 관계, 돌봄 위기를 둘러싼 사회적 공론장이 펼쳐지기에 부족함이 없다. OECD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20년 넘도록 초저출생 국가2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합계출산율 기준으로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출산율이 낮은 나라([그림 1] 참조), 2024년 이미 초고령화사회로 접어들었을 뿐만 아니라([그림 2] 참조) 지난 20년 동안 고령화의 진행 속도만 놓고 보면 역시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그림 3] 참조) 우리나라가 직면한 인구구조 변화의 현실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리나라의 노인부양비3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전망이며, 2075년이 되면 78.8명으로 주요 비교 대상 국가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수준에 이른다는 전망이다([그림 4] 참조).
여기에 더하여 가족구조의 변화도 돌봄과 돌봄 관계, 그리고 돌봄 위기에 대한 고민을 심화시키고 있다. 1인 가구가 가장 보편적인 가구구성으로 자리를 잡은 지 이미 오래이며, 이에 더하여 규모는 크지 않으나 비친족가구의 비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1인 가구의 경우 특히 60세 이상 여성 노인들의 1인 가구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 이들 집단 내 돌봄 위기에 대한 사회정책적 대응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다른 한편 우리나라 맞벌이 가구의 비율이 2021년 현재 53% 수준으로 OECD 평균(64%)에 비해서도 10%p 이상 낮은 수준이며, 스웨덴(79%)이나 덴마크(78%), 네델란드(78%)와 같은 국가들에 비교하면 25%p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유례없는 초저출생 상태가 2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인구위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자본과 사회의 안정적인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력 공급을 위해서도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과 맞벌이 가구의 비율 증가는 충분히 예측되는 변화에 해당한다.
인구구조 및 가족구조와 관련하여 현재 이미 발현되고 있거나, 앞으로 발현될 것으로 보이는 변화의 양상들은 모두 돌봄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중차대한 문제가 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 내 돌봄, 특히 여성에 의한 돌봄이라는 전통적인 대응 방식이 작동하기 어려움을 가리키고 있다. 돌봄과 돌봄 위기는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중차대한 현안이 되고 있다.
돌봄권과 돌봄 관계
돌봄은 종종 돌봄서비스로 대치된다. 돌봄 관련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그 논의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경향이다. 돌봄이 서비스로 대치되는 순간 돌봄의 본질로서 돌봄 관계는 감춰지고, 그와 함께 돌봄 관계에 관여하고 있는 행위자들, 즉 돌봄 필요자 혹은 수혜자와 돌봄 책임자, 돌봄 제공자의 역할과 책임,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사라진다. 돌봄을 서비스로 대치하는 곳에서는 돌봄노동을 지시하고, 그 결과로서 돌봄서비스를 제공받는 돌봄 수혜자, 그리고 돌봄노동을 수행하고 이 결과물로서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돌봄노동자 혹은 돌봄 제공자 사이의 종속적 권력관계만 남게 되고, 돌봄 제공자와 돌봄 수혜자 사이의 상호의존적 관계성은 잘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또한, 돌봄을 서비스로 보는 경우 돌봄 행위가 돌봄 제공자로부터 분리되는 소외 현상이 발생하며, 이 과정을 통해 마치 돌봄이 상품처럼 전달하고 교환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메리 데일리(Mary Daly)는 아프거나, 나이가 들거나, 장애가 있거나, 의존적인 존재로서의 아동을 돌보는데 관여되는 “행위와 관계(activities and relations)”가 돌봄이라고 정의한다.4 버지니아 헬드(Virginia Held)는 돌봄이 이성과 감성을 포괄하는 행위이며 인간을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접근이 필요함을 강조한다.5 우에노 지즈코는 돌봄이 상호작용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돌봄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상호행위(interaction)이고 복수의 행위자(actor)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6 우에노 지즈코의 상호행위로서의 돌봄 정의는 돌봄을 어느 한쪽에 귀속시키지 않고 사회적 관계로 접근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돌봄을 관계적으로 정의하고 이해한다면 돌봄과 관련한 권리, 즉 돌봄권 역시 관계적으로 이해되고 정의되어야 한다. 현재의 사회정책 담론 영역에서 논의되는 돌봄권은 돌봄 수혜자의 권리, 즉 돌봄받을 권리라는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영유아, 아동, 노인, 환자에 대한 적정한 보호와 돌봄,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이 일상생활을 존엄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상생활지원을 받을 권리가 돌봄권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돌봄권이 돌봄을 받을 권리, 즉 돌봄 관계 안에서 돌봄 수혜자의 배타적 권리로 이해되는 경우 돌봄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책무 역시 돌봄 수혜자의 돌봄받을 권리 보장에 제한되는 문제를 낳는다. 이 경우 돌봄 관계에 관여하고 있는 다른 행위자들, 즉 돌봄 관계 안에서 가족 등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돌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인 돌봄 책임자와 실제로 돌봄 수혜자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돌봄 제공자, 혹은 돌봄노동자의 돌봄권은 주변부화되거나 심지어 지워진다.
그렇다면 돌봄 관계에 관여하는 행위자 모두를 고려한 돌봄권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당연하게도 돌봄 관계에 관여하는 행위자 각자에게 고유한 돌봄권을 정의하고, 이들 각각의 돌봄권이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그 행위자들이 관여하는 돌봄 관계의 돌봄권 실현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메리 데일리는 돌봄에 대한 인권적 접근을 통해 돌봄의 권리는 돌봄을 받을 권리와 돌봄을 할 권리, 그리고 돌봄을 하라고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로 구성된다고 하였으며, 우에노 지즈코는 이에 더하여 돌봄을 받으라고 강요당하지 않은 권리까지 포함한 총체적인 집합이 돌봄의 권리를 구성한다고 강조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돌봄 관계 안에서 돌봄권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돌봄 수혜자의 돌봄받을 권리를 넘어서, 돌봄 책임자와 돌봄 제공자 모두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돌봄권 : 돌봄받을 권리와 돌봄할 권리
익숙한 정의에 따르면 돌봄 필요자/수혜자의 권리는 돌봄을 받을 권리에 해당한다. 하지만 돌봄 필요자에게 단순히 필요한 돌봄이나 서비스가 제공된다고 해서 항상 돌봄 필요자의 돌봄받을 권리가 충족된다고 볼 수는 없다. 단적으로 말해 돌봄 필요자가 제공받은 돌봄이 ‘불충분한’, 혹은 ‘부적절한’ 돌봄이었다면 외형적으로 충족된 것으로 보이는 돌봄 필요/욕구라 할지라도 돌봄 필요자의 돌봄권이 실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조리를 포함한 식사준비라는 일상생활 수행 능력이 부족한 노인의 돌봄 필요는 해당 노인의 취향을 고려하여 건강한 식단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균형잡힌 영양을 일상적으로 섭취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재료의 구입부터, 조리 방법, 그리고 해당 노인의 치아나 구강 상태, 소화능력까지를 고려한 음식 준비에 이르기까지의 총체적인 과정을 포함한다. 치아의 문제로 인해 저작식이나 연화식이 필요한 노인에게 일반식을 제공하고, 해당 노인의 식사와 관련한 욕구, 식사와 관련하여 돌봄받을 권리가 충족되었다고는 볼 수 없는 노릇이다.
결과적으로 돌봄 필요자의 돌봄권은 돌봄받을 권리의 보장과 함께 부적절한 돌봄이나 돌봄 필요자가 원하지 않는 돌봄을 받지 않을 권리, 즉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까지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돌봄권의 실현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돌봄 필요자의 돌봄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돌봄을 거부할 권리, 혹은 제공되는 돌봄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선택의 권리가 동시에 실현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제까지는 돌봄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돌봄받을 권리 실현의 조건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돌볼 권리, 혹은 돌봄할 권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돌봄 관계 안에서 돌볼 권리에 대한 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돌봄 관계에서 돌봄이 필요한 사람의 돌봄 욕구 충족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 즉 전통적으로 가족, 친구, 동거인 등 그 역할을 수행하는 돌봄 책임자가 있다. 다음으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돌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노동과 서비스를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돌봄 제공자가 있다.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 비공식적 관계에서 돌봄이 제공되는 경우 이들 돌봄 책임자가 돌봄 제공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가 있고, 이 경우 돌봄 책임자와 돌봄 제공자는 동일인이거나 구별이 무의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회화된 돌봄이 가족 내 돌봄이나 전통적인 비공식적 돌봄노동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돌봄 책임자와 돌봄 제공자는 구분될 수 있다. 이처럼 돌봄 책임자와 돌봄 제공자가 구분되는 경우 돌봄 관계에서 두 행위자의 역할과 책임, 돌봄 관계에 대한 접근 또한 구분된 이해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돌봄 책임자의 돌볼 권리는 가족, 친구, 이웃 등 자신이 돌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대상의 돌봄받을 권리를 충족하는 과정,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돌봄 책임자는 누구보다도 돌봄 필요자의 돌봄받을 권리가 충족되기를 바라는 사람이고, 이를 통해 돌봄 필요자의 평온한 일상과 존엄함 삶이 보장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전통적으로 대표적인 돌봄 책임자는 가족이며, 특히 성인 가족 구성원이 돌봄 책임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돌봄 책임자의 ‘책임’이 완수되는 것은 결국 돌봄 필요자의 돌봄 ‘필요’가 충족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에야 비로소 돌봄 책임자의 평온한 일상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돌봄 책임자에게는 본인이 직접 돌봄 제공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와 본인의 책임 아래 사회화된 돌봄, 즉 타인에 의해 돌봄을 제공받는 경우가 가능하며, 현대 사회에서 돌봄 책임자는 대부분 이 둘이 혼합된 방식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돌봄 책임자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생업과 돌봄 책임, 돌봄 제공 사이에서 끊임없는 조정의 업무를 수행해야 하며, 직접 돌봄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에도 돌봄 제공자와 돌봄 필요자, 혹은 또 다른 돌봄 책임자 사이에서 협의와 중재, 조정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돌봄 관계에 관여한다.
이와 같이 복합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돌봄 책임자에게 돌볼 권리는 돌봄을 하라고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와 관련되어 있다. 돌봄 책임자가 그 소임을 수행하는 데 있어 직접 돌봄 제공자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타인인 돌봄 제공자를 통해 필요한 돌봄을 제공하는 등 돌봄 필요에 대응하는 데 있어 돌봄 책임자가 강요가 아닌 선택을 통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돌봄 책임자가 역할 수행을 위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돌봄 책임자의 의지와 선호도 중요하지만, 의지와 선호를 현실화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과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아동에 대한 돌봄이나 노부모에 대한 수발,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일상생활지원을 본인이 직접 하고자 한다면, 적절한 수준의 급여가 지급되는 육아휴직이나 돌봄휴직·휴가 등을 통해 돌봄 책임자 자신의 생계나 경력을 유지하면서도 직접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작동하고 있어야 실질적인 선택이 가능하다. 돌봄 책임자가 직접 돌봄을 택하는 경우 경력의 유지나 생계에 미치는 경제적 타격이 심각한 수준이라면, 본인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경력과 생계의 유지를 위해 사회적 돌봄에 의존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돌봄 책임자가 돌봄 관계에서 자신의 선택을 자유롭게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 선택을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여하한 이유로든 본인이 직접 돌봄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돌봄을 통해 돌봄 책임자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하는 경우에도 역시 제도적 환경은 돌봄 책임자의 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육아를 책임지고 있는 부모가 일자리에 있는 동안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어린이집을 동네에서 찾을 수 없다면, 방과후 돌봄을 책임져줄 지역사회돌봄을 찾을 수 없다면, 거동이 불편한 노부모나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가족 구성원의 일상을 지원해 줄 적절한 돌봄서비스를 지역에서 찾을 수 없다면, 돌봄 책임자의 선택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사회적, 제도적 강요가 되는 것이다. 돌봄 책임자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즉 자신의 돌봄 관계에 기꺼이 받아들일 돌봄 제공자가 충분하지 않은 제도적 조건과 환경이라면, 돌봄 책임자에게는 경력과 생계의 질에 있어 심각한 희생의 감수, 즉 돌봄 패널티(care penalty)와 돌봄 공백(care deficit) 혹은 돌봄 위기(care crisis) 사이의 선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제도적·사회적 돌봄의 공백과 불충분은 직접 돌봄과 사회적 돌봄 사이의 선택에서만 이와 같은 강요된 선택을 낳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돌봄을 선택하는 경우에도 돌봄의 유형을 놓고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특히 노인 요양의 경우 시설 돌봄과 지역사회 돌봄, 혹은 재가 돌봄의 선택에서도 지역사회 내 사회적 돌봄의 양과 질, 종류의 충분성 여부는 돌봄 필요자 뿐만 아니라 돌봄 책임자의 선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역사회 돌봄, 즉 커뮤니티케어를 위한 지역사회 서비스 및 재가 서비스가 양과 질, 종류의 측면에서 어느 한쪽이라도 불충분한 경우 돌봄 관계에 관여한 행위자들에게 남겨진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강요가 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돌봄 책임자의 돌볼 권리는 돌봄 책임자와 돌봄 필요자의 단순한 선택과 합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결국 돌봄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개별 돌봄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제도적 조건과 환경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와 같은 돌봄 관련 사회적·제도적 조건과 환경이 불비한 상태에서 강요된 선택이 이루어지는 경우, 즉 돌봄 필요자가 되었든 돌봄 책임자가 되었든 강요받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선택을 한 경우 돌봄 관계 안의 행위자 누구에게도 돌봄권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돌봄 제공자, 특히 계약에 의한 관계가 아니라면 돌봄 책임을 지지 않을 제3자가 돌봄을 제공하는 경우에도 돌봄권, 즉 돌봄 권리의 보장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 돌봄, 공식적 돌봄의 영역에서 돌봄 관계에 참여하는 돌봄 제공자, 즉 돌봄노동자들 역시 돌볼 권리를 보장받아야 비로소 돌봄 관계에 적절한 기여를 할 수 있으며, 돌봄 관계 전반에 걸친 돌봄권을 실현할 수 있다. 돌봄노동자들의 돌볼 권리는 이들 돌봄노동자들이 자신이 속해있는 돌봄 관계에 집중하면서 양질의 돌봄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하다. ILO가 양질의 돌봄 일자리와 돌봄 경제를 위해 제안하는 일반원칙으로서 5R 체계는 돌봄노동자의 돌볼 권리 보장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7 특히 유급 돌봄노동자들에 적용되는 적정한 보상(reward)의 원칙과 대표성(representation)의 원칙은 주목할 만하다. 돌봄노동자들이 돌봄 필요자가 필요로 하는 돌봄의 제공을 통해 돌봄 관계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돌볼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고용 관계를 통해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며, 고용 관계를 포함하여 자신과 관련한 주요한 사회적, 특히 정책적 의사결정 과정에 이들 돌봄노동자의 대표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나가며
이쯤에서 좋은 돌봄에 관해 얘기해 보자. 좋은 돌봄이란 무엇인가? 좋은 돌봄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돌봄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고,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딛고 있는 돌봄의 정의, 즉 돌봄의 관계적 특성을 고려한 돌봄과 돌봄권, 이로부터 제기되는 돌봄받을 권리와 돌봄할 권리를 고려한다면 좋은 돌봄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대한 논의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즉, 좋은 돌봄이라면 돌봄 관계를 구성하는 행위자들의 돌봄권, 돌봄받을 권리와 돌봄할 권리를 충족할 수 있는 돌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돌봄받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돌봄을 강요받지 않는 방식으로 충분히 받을 수 있다면, 돌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중한 사람의 돌봄을 책임질 수 있다면,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이 적정한 보상과 인정을 통해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돌봄 관계에 집중할 수 있다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돌봄 관계 안의 주요한 행위자들의 돌봄권을 실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좋은 돌봄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이 관계적이라는 것은 돌봄 관계 안의 행위자들 사이에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관계적 특성과 일상적인 상호작용을 고려했을 때 돌봄 관계 안에서 돌봄권의 실현은 총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돌봄 책임자의 권리나 돌봄 제공자의 권리가 실현되지 않으면 돌봄 필요자의 권리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관계로서의 돌봄을 고려한다면, 돌봄권의 보장은 돌봄 관계에 관여하고 있는 행위자들 모두의 돌봄권이 보장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돌봄 관계에서 주요 행위자들의 돌봄권의 실현이 당사자들의 선택이나 당사자들 사이의 조정과 협의에 달린 일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적·제도적인 자원에 의해 그 행위자들의 선택과 조정, 협의가 끊임없이 규정되고 재조정된다는 점이다. 돌봄 관계 안에 관여하는 행위자들이 자신의 존엄한 일상을 위해, 또는 소중한 사람의 일상을 지원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위해 치러야 할 비용(care penalty)이 감당할 만한 것이어야 그 선택은 비로소 강요가 아닌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 비용은 개인이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다.
| 미주 |
- Mary Daly, 2001, Care Work : The quest for security. ILO, 36쪽 인용. ↩︎
- 합계출산율 1.3 미만을 의미함. ↩︎
- 20세에서 64세까지 경제활동 인구 100명당 65세 이상의 노인인구 수를 의미함. ↩︎
- Mary Daly, 2001, 앞의 책. ↩︎
- Virginia Held, 2006, The Ethics of Care : Personal, Political, and Global, Oxford University Press. ↩︎
- 우에노 지즈코, 2011, 돌봄의 사회학(조승미 등 역, 2024), 오월의 봄. ↩︎
- ILO, 2018, Care Work and Care Jobs for the Future of Decent Work. ↩︎
월간 <복지동향> 2025년 8월호(제3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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