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5 2025-09-01   11676

[복지칼럼] 새 시대에는 새로운 ‘공공의료’를

김진환 | 서울대학교 보건환경연구소 연구교수

정권이 바뀌자 사라졌던 ‘공공의료’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공공병원의 필요성을 부인하거나 민간의료의 역할만 강조하던 이들도, 막상 의료 현실의 위기 앞에서는 공공의 역할을 부정하기 어려운 듯 조심스러운 입장 변화를 보인다.

지난 몇 년 사이 감염병 유행이 반복되고, 의사들은 집단으로 진료를 거부했다. 지역의료는 붕괴 위기에 있고, 건강보험 재정은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는 전망이 많다. 고령화와 기후위기라는 예고된 도전까지 겹치면서, 우리 의료 시스템의 근본적 한계가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고, 익숙했던 방식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단행된 의료 ‘개혁’은 집단 진료거부에 참여했던 의대생과 전공의들에게 불이익 없이 복귀할 수 있도록 한 특혜 조치였다. 시민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의사들 눈치를 보며 치료받아야 하는가? 왜 사는 곳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의료가 달라지는가? 사람들은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며, 의료정책 결정 과정에 자신들도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공평하게 양질의 의료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언뜻 보면 공공의료는 이 모든 요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만능 해법의 다른 이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온 ‘공공의료’로는 이런 시민들의 절실한 요구에 답할 수 있을까?

건강보험의 틀에 갇힌 의료

우리는 오랫동안 ‘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를 곧 ‘의료의 기준’으로 여겨왔다. ‘필수의료’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를 뜻했고, 의료 접근성은 건강보험이 적용되는지 여부로 평가되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의료를 ‘재정과 급여’의 틀 안에 가둔다.

윤석열 정부의 의료개혁도 결국 건강보험 체계 내에서 가격 조정을 시도하는 데서 나아가지 못했다. 어떤 의료가 필요한지보다는, 어떤 의료에 수가를 청구할 수 있는지가 의료 제공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에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코로나19 범유행 시기의 경험이 보여주듯, 이 구조는 위기 상황에서 의료가 제 역할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공공병원이 많다고 의료공공성이 높다는 보장은 없다. ‘누가, 어떻게, 언제까지 시민의 건강을 책임질 것인가’라는 질문이 진짜 출발점이다. 의료기관이 국립이냐 민간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끝까지 책임지고 대안을 찾는 역할을 환자를 대신해 수행하는 지다. 지금처럼 공공병원은 적자에 허덕이고, 민간병원은 손해를 볼 것을 걱정하며 환자를 거부하는 구조라면, 어떤 위기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의료는 산업적 가능성을 안고 있는 시장이 아니라,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첫째, 공공성 높은 의료는 의료대란에도 멈추지 않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 이를 보장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소유의 공공성이기에, 공공병원을 말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공공병원마다 핵심 진료과목의 필수 인력을 국가가 직접 고용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응급실과 중환자실만큼은 24시간 돌아가도록 보장해야 한다. 민간병원이 어떤 이유로든 환자를 거부할 때, 공공병원은 “우리가 끝까지 책임진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일상적인 진료가 집 근처에서 해결되는 일차의료로 전환되어야 한다. 공공의료와는 멀리 떨어진 일처럼 취급되어 온 보건소, 보건지소, 보건진료소를 지역 기반 일차의료의 중심으로 재구성하자. 농촌을 중심으로 배치된 지역보건기관이 만성질환 관리부터 병원 의뢰까지 포괄하는 ‘동네 주치의 기관’으로 기능한다면, 서울 강남에 살든 전남 농촌에 살든 최소한의 일차의료는 동등하게 받을 수 있다. 일차의료 시장이 실패하는 곳에서 공공이 돌보는 의료를 만드는 데에 성공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셋째, 시민이 의료정책에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의사, 간호사, 시민이 공공의 복리를 중심으로 함께 결정하는 지역의료위원회를 설치하고, 어떤 병원이 필요한지, 어떤 진료과가 부족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직접 논의하고 결정하게 해야 한다. 의료는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니며, 시골살이를 해본 적 없는 도시의 전문가들이 결정할 사안도 아니다. 시민의 참여 없이는 의료도 민주주의도 작동하지 않는다.

권한과 책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공공의료를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서는 선언적 수준의 ‘지역분권’을 넘어 계획적이고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의 이양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동안 중앙정부가 일률적인 기준을 정하고 이를 지역에 하달하던 방식은, 각 지역이 처한 고유한 보건의료 문제를 해결하기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책임을 미루기에 편리했음은 물론이다.

이제 중앙은 기준과 예산을 책임지고, 지역이 스스로 문제를 진단하고 실행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은 응급의료 안전망이 시급할 수 있고, 또 어떤 지역은 만성질환 관리나 정신건강 서비스 확충이 우선일 수 있다. 지금의 의료정책은 지역별 다양성과 필요를 고려하지 못하고, 전국을 동일한 틀에 끼워 맞추는 방식을 기본으로 운영된다. 그 결과는 ‘의료 사각지대’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지역 격차다. 따라서 지역의 주민들이 지방정부와 함께 의료의 문제를 정의하고, 우선순위를 설정하며, 자원 배분과 제도 설계를 주도할 수 있는 권한과 역량을 갖출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실질적인 의료 분권의 핵심이다. 단순한 행정기구 분산이 아니라, 정치적·재정적 권력의 이전을 통해 책임을 부여하고, 동시에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민주적 통제를 조건으로 걸어야 한다.

거듭 강조하건대 권한의 이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의료가 특정 전문가 집단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시민의 참여와 감시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공공병원 운영부터 시작해, 지역 실정에 맞는 정책적 실험과 거버넌스를 허용하고, 그 운영 원칙을 시민의 필요에 따라 재구성하는 과정이 전개되어야 한다. 단번에 도달할 수야 없겠지만 방향은 명확하다. 시민은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공공의료를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의료인가?”라는 질문에 지역이 스스로 답할 수 있게 될 때, 공공의료는 더 이상 구호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공공의료의 미래는 중앙의 설계도가 아니라, 지역의 손으로 쓰는 응답들 속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공공의료를 새롭게 구성하기 위한 출발선은 어디인가?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고, 구조보다는 의지를 통해 가능한 개혁부터 시작해야 한다.

첫째, 공공병원에 대한 재정 투입을 지금 당장 두 배로 늘리자. 공공병원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무엇보다 재정적 안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예산 증액이든 총액 계약제든,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공익적 역할’을 요구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자원을 먼저 책임져야 한다. 특히 수익성이 낮아 전국 곳곳에서 사라진 소아과·산부인과부터 국가책임제로 전환하자. 국가가 직접 인력 배치와 인건비를 보장하고, 해당 진료과가 지역에 지속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적자가 나는 공공병원에 ‘버티라’라고만 요구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책임지고 유지하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예산 없는 공공의료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며, 지금 필요한 것은 책임 있는 자원 배분의 결단이다.

둘째, 지역 의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어느 지역에 외과 의사가 몇 명 있는지, 밤 10시에 응급실을 가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산부인과 의사 1명을 더 채용하려면 얼마가 필요한지를 시민들이 알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의료 인력이 부족하다”라고 막연히 말할 게 아니라, 지역별로 어떤 인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사람을 뽑으려면 돈은 얼마나 드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정보의 비공개는 곧 책임의 회피로 이어지며, 공공의료의 사각지대는 늘 정보의 사각지대에서 시작된다. 문제를 드러내야 해결도 가능하다.

셋째, 시민에게 진짜 발언권을 보장하자. 의료정책 결정 과정에 환자단체와 시민단체를 형식적으로 참여시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각 지역에 설치된 지역의료위원회에서 “우리 동네엔 정신과가 더 필요하다”, “응급실에서 밤에는 배 아파 수술해야 할 환자를 안 받으니, 대안을 찾아보자”라는 판단을 내리면, 그 결정이 곧 예산 편성과 병원 운영에 반영되고, 이후 변화를 추적해 확인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전문가들이 결정하여 통보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시민의 요구가 정책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시민 없는 공공의료는 존재할 수 없다.

새로운 공공의료를 향하여

지역에서 일할 의사를 양성하고, 국가가 책임지는 병원을 늘려나가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어디서, 어떤 원칙으로, 누구를 위해 의료를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잊지 않는 일이다. 공공의료는 단지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 국가가 의료를 어떤 철학으로 바라보는가를 드러내는 창이며, 시민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 우리는 의료를 어떻게 새롭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응답해, 끝내 국가를 움직이게 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월간<복지동향> 2025년 09월호(제3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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