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4 2024-07-01   3752

[기획2] 복지국가와 진보정치는 어떻게 만날 것인가?

김진석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들어가며: 왜 지금 복지국가와 진보정치의 정합성을 논의하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왜 지금인가? 왜 지금 복지국가와 진보정치의 정합성을 고민하는가? 지난 22대 국회의원 총선거 이후 한국 사회 진보정치의 현황을 고려한다면 그 답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21세기 한국의 진보정치는 새로운 변곡점을 통과하는 중이다.

지난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이 2004년 선거를 통해 원내 정당이 된 이후 분당과 통합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통합진보당과 정의당까지 이어오던 20년 원내 진보정당의 흐름은 이번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통해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원내 진보정당의 지위와 역할은 지난 2017년 창당한 진보당이 넘겨받았다. 결과적으로 현재 한국의 의회정치에서 진보정당의 계보는 국회 내 거대 보수 양당 가운데 하나인 민주당과의 적극적인 선거연합 전술을 구사한 진보당이 이어가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생존을 추구한 정의당은 국회에서 자리를 잃어버렸고, 선거연합을 통해 원내 진출을 받아들인 진보당은 자신의 공간을 확보한 셈이다.

복지국가의 맥락에서 이 상황을 정리하자면 비교적 일관되게 복지국가의 지향을 고수해 온 정의당이 이번 총선을 통해 원외로 밀려났고, 국면에 따라 복지국가의 의제를 영민하게 활용해 온 민주당이 원내 절대적인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진보당은 이와 같은 민주당과의 연합을 통해 원내 진보정당의 자리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상황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복지정치 환경과 조건을 맞아, 복지국가와 진보정치, 진보정당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여전히 유효한지, 진보정치와 복지국가는 여전히 상호정합성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복지국가 줄다리기 – 진보정당과 민주당

제22대 국회의 구성, 그리고 그 속의 진보정치의 구성과 역할에 연관된 세 개의 주체인 더불어민주당과 진보당, 그리고 정의당은 복지국가의 지향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한 차별성이 있다. 우선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한때 현 더불어민주당의 계보에서 강령과 당헌에 명시되어 있던 보편적, 혹은 포용적 ‘복지국가’의 이상이 같은 당의 강령과 당헌에서 축소되어 개별 정책 영역의 하나로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로 주지의 사실이다. 지난 2019년 문재인 대통령 집권 시기 당시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은 강령 전문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공정·정의, 안전, 포용·통합, 번영, 평화’를 시대 가치로 삼고, 서민과 중산층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 것이다. (중략) 셋째, 포용적 복지국가 실현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통합된 사회를 만든다.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 각자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삶의 기본선을 보장하여 지속 가능한 통합사회를 구현한다. 계층, 지역, 세대, 성별 갈등을 포용과 연대, 화합과 상호부조의 보편적인 사회정책을 통해 조정하며 극복해 나간다.” (2019년 12월, 더불어민주당 강령 전문 중에서)

포용적 복지국가 실현을 명시한 더불어 민주당의 강령은 현재 자취를 감추고 위의 내용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다.

“우리는 ‘공정, 생명, 포용, 번영, 평화’를 핵심 가치로 삼아 ‘내 삶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중략) 셋째,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고 일하는 모든 사람의 노동권을 보장하며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포용 사회를 실현한다.”(2024년 6월, 더불어민주당 강령 전문 중에서)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강령에 복지국가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는 1.경제 영역에서 “복지국가의 발전에 필요한 세수 기반을 확충한다.”라는 표현으로 조세 정의와 재정민주주의 구축을 설명하는 과정이며, 다른 하나는 9.복지 영역에서 “보편적 복지국가 체제를 수립함으로써 사회통합을 실현한다.”라는 표현이다. 둘 다 당이 지향하는 국가 비전의 제시라기보다는 경제, 복지 등 강령의 주요 영역에서 제시하는 바를 보충하기 위한 개념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내 진보정당의 계보를 잇고 있는 진보당 강령에 나타난 복지국가의 지향 관련 사항은 사뭇 다른 접근을 취하고 있다. 우선 진보당의 강령에 나타난 국가의 비전은 “자주 국가”이자 “중립적 통일국가”로 요약된다.

“진보당은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자주 국가를 건설하고, 모든 분야에서 평등사회를 실현하며, 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 세상을 실현한다. (중략) 3.우리 민족의 힘으로 남북 사이에 합의한 모든 공동선언을 이행하여 자주, 평화, 번영이 보장된 중립적 통일국가를 건설한다.” (2024년 진보당 강령 중에서)

‘국가’의 비전을 제시한 위 두 개의 문장 이외에 진보당이 구현하고자 하는 사회상을 “자주자립경제체제”, “노동 중심 사회”, “평등사회”, “생태사회”, “정의로운 사회” 등으로 요약하고 있으며 “보편복지사회”도 이들 사회상의 목록 가운데 하나로 포함하고 있다.

“6. 교육·의료·주거·이동·에너지·정보 이용의 권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모든 생애 주기에 질 높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편복지사회를 실현한다.” (2024년 진보당 강령 중에서)

지금은 원외 정당으로 물러났지만, 정의당의 강령에는 여전히 “정의로운 복지국가”의 지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정의당은 당 강령의 부제를 “함께 행복한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향하여”라고 정하고 ‘우리의 목표,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향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승자 독식을 넘어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 정의로운 복지국가로 나아갈 것이다. 정의로운 복지국가는 먼 미래의 이상이 아니다. 집권한 정의당 정부가 만들어 갈 대한민국의 새로운 모습이다. 정의로운 복지국가는 생애 전 과정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누구나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공정한 환경과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정의로운 복지국가는 국가 운영의 목표와 발전의 척도를 바꿀 것이다. GDP 중심의 양적 성장은 더 이상 발전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일에 대한 존중과 안정, 공평한 소득분배, 일과 여가의 균형, 안전하고 깨끗한 환경, 공동체 참여, 문화의 향유 등 삶의 질을 결정하는 모든 분야를 개선해 국민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국가 운영의 목표가 될 것이다.” (2024년 정의당 강령 중에서)

정의당이 지향하는 국가의 상으로서 정의로운 복지국가의 지향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정의로운 복지국가의 내용은 단순히 보편적 복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원리로서 복지제도의 운용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 질서로서의 의미를 가짐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정의로운 복지국가는 보편적 복지에 머무르지 않고 시장과 자본의 탐욕을 감시하고 조정해 분배의 격차를 줄여 가는 정의로운 심판관이 될 것이다. 또한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가치의 투자자가 될 것이다. 정의로운 복지국가는 백 년 앞을 내다보고 미래 세대와 자원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미래의 기획자가 될 것이다.” (2024년 정의당 강령 중에서)

하지만, 정의당이 지난 2022년 9월 제11차 정기 당대회에서 채택된 재창당 결의안을 통해 다음과 같이 재창당의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1. 대안 사회모델을 제시하는 정당이 돼야 한다. 정의로운 복지국가 강령은 진보적 국가 모델로써 더는 유용하지 않게 됐다. 거대 양당보다 더 많은 복지를 약속하는 것이 정의당의 정체성이 될 수 없다. 노동시장 내부의 양극화, 플랫폼 노동과 같은 고용구조의 변화, 지구적 위기로 현실화 된 기후 위기, 사회적 약자를 향한 차별·혐오의 확산, 신냉전과 전쟁 위기 등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담은 대안 사회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2022년 9월 정의당 재창당 결의문 중에서)

결국 기존 ‘정의로운 복지국가’의 지향이 사실상 “거대양당보다 더 많은 복지를 약속”하는 데 그쳤다는 성찰에 근거하여 정의로운 복지국가로 포괄하기 어려운 기후위기 등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담은 대안 사회모델을 제시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것이다. 위에 언급한 재창당 결의문 채택 이후 대안 사회모델을 제시하고 이를 새로운 강령에 반영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했으나 정의당이 기존의 정의로운 복지국가가 아닌 새로운 대안사회모델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있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현재 의회정치 구도에서 그나마 복지 친화적인 정치세력으로 알려진 원내 정당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사회를 ‘복지국가’로 개념화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복지국가 역사의 한 국면에서 복지국가를자신이 지향하는 국가의 모형으로 선언했던 더불어민주당은 상당 부분 전선에서 퇴각한 것으로 보이며, 원내에서 진보정당의 계보를 잇고 있는 진보당 역시 애초에 복지국가보다는 자주국가와 통일국가 등의 국가모형을 우선순위에 두고 보편복지사회를 그 국가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상의 한축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당이 지향하는 국가의 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정의당은 지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원외 정당으로 물러남으로써 국회 내에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정당이나 정치세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된 상황이다. 또한,원외 정당으로서 힘겨운 버티기에 들어간 정의당이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활용하게 될자산 가운데 하나인 재창당 결의안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의로운 복지국가’의 비전을 넘어서는새로운 대안 사회모델을 추구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점을 고려했을 때 복지국가의 구현을 최우선에두는 정치세력이나, 정당은 최소한 의회정치 영역에서는 당분간 찾아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진보정치와 복지국가, 어떻게 만날 것인가?: 복지국가 고쳐쓰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사회 진보정치와 복지국가의 의제가 만나는 연결고리는 최소한 쇠약해지고 있거나 소실한 것으로 보인다. 제도로서의 복지, 사회의 성격으로서의 복지를 여전히 지향하는 정치세력과 정당이 있겠지만 국가운영의 모형으로서 복지국가를 우선순위에 두는 정치세력과 정당은 점점 힘을 잃고 있거나, 스스로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복지국가로의 지향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진보정치는 복지국가와 어떻게 만날지 고민이 필요하다. 이 고민의 맥락에서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에 주어진 과제를 복지국가 고쳐쓰기의 맥락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복지국가 고쳐쓰기의 기획을 서둘러야 한다. 복합적인 위기와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복지)국가는 이 변화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와 전환을 요구받는다. ‘유럽의 발명품’이라 불리는 복지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 미국 패권 중심으로 구축된 국제질서 아래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황금기에 역사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낸 것도,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위기와 함께 기나긴 위기에 처한 것도 모두 변화와 위기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전환의 과정이었다. 1980년대 케인스주의가 신자유주의라는 ‘기획’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정부 주도로 사회 정책과 제도를 운영해 오던 주요 선진 복지국가들에서조차 신공공관리론이라는 이름 아래 공공의 역할 축소와 민간의 역할 확대의 흐름을 수용하고, 전방위적인 민영화의 흐름을 맞이하게 된 것도 가까운 사례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 복지국가는 디지털 전환과 다양한 층위의 불평등, 그리고 기후위기까지 이르는 전 지구적·보편적 위기를 고스란히 내재화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구조와 가족구조의 유례 없는 급격한 변화라는 개별적 위기까지 마주하고 있는 그야말로 복합위기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심각한 위기와 급격한 변화의 시기마다 새로운 시도와 전환을 통해 대응해 온 우리 복지국가는 작금의 복합위기 상황에서 여전히 새로운 시도와 전환을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그 과정에서 심화하는 불평등 문제, 저출생과 고령화, 1인 가구의 증가로 요약되는 인구구조와 가족구조의 급격한 변화, 그리고 국경을 넘나들며 그 심각성을 각인시키고 있는 기후위기의 심각성은 더 이상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하기를 회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님을 보여준다. “역사적 복지국가”로부터 과감히 탈피하여 임박한 새로운 위기와 급격한 전환의 조건과 환경에 맞게 복지국가 고쳐쓰기의 과제를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이 기꺼이 자신의 과제로 끌어안을 때 비로소 복지국가와 진보정치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앞서 언급한 정의당의 “정의로운 복지국가” 강령 폐기 선언은 이어지는 논의와 노력의 결과에 따라 복지국가 고쳐쓰기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월간<복지동향> 2024년 07월호(제3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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