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3년 01월 2013-01-12   1685

[살림] 도시여자의 산골 표류기-겨울편

살림

도시여자의 산골 표류기

겨울편

도시여자

 

겨울 좋아해?
같이 사는 남자가 농부잖아. 난 남자가 농사를 적당히 하다가 때려치웠으면 좋겠어. 돈은 안 되고, 일은 힘들고. 근데 시간이 갈수록 농사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왜 농사를 좋아할까 궁금해. 어렸을 때 해본 일도 아니면서. 언제 한 번 만나면 물어봐 줘. 난 잘 모르겠어. 봄이 오기 전부터 고추씨를 구해 집안에서 물주고, 초봄에는 비닐하우스를 짓고, 바람에 날려 또다시 짓고. 여름엔 감자를 캔다, 들깨를 심는다, 턴다, 고추를 거둔다, 말린다, 닦는다……. 새벽부터 엄청 바빠. 열심히 일하긴 하지만 워낙 고된 일이라 옆에서 보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아. 같이 농사일을 하지 않는 난 심심해. 그래도 봄, 여름, 가을 좀 정신없이 살더라도 겨울에 여행을 갈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 벼르고 별러 며칠 전 2박 3일 지리산으로 여행을 갔어. 친구가 주민들과 함께 만든 카페에서 만화책을 보면서 하루 종일 뒹굴뒹굴. 밤에는 술로 회포를 풀고. 신나게 놀고 돌아오면서 생각했어. 겨울엔 여행하면서 살 거야.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찾아갈 거야. 남자가 농부여서 참 좋아. 그럼, 그럼. 좋고 말구.

 

근데 웬걸?
집에 돌아오니, 난방을 위해 기름을 넣은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았나 봐. 집은 냉골이고, 나무 보일러를 때니 얼었던 관이 녹으면서 터졌던 곳에서 물이 솟아 철철 흘러넘치는 거야. 남자는 보일러를 고치겠다고 새벽 내내 영하 20도의 매서운 바람과 사투를 벌였어. 1년 내내 열심히 살다가 고작 2박 3일 집 좀 비웠다고 이런 대가를 치르다니. 너무 혹독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내가 사는 마을로 들어오려면 춘천 시내에서도 여러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특히 마지막 고개에서는 차들이 빙그르르 돌기 십상이거든. 난 얼마나 조심하는지 몰라. 오늘도 잠시 나갔다오면서 논둑에 박힌 차를 발견했어. 흔히 있는 일이지. 작년에도 초행길인 차가 고개에서 빙그르르 돌진해와 내 차를 박더군. 기름이 너무 비싸기도 하고 주요 난방 수단이 나무 보일러이기 때문에 산으로 직접 나무를 하러 나가는 남자에게도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긴 마찬가지지.

 

나… 있잖아……
이러니 겨울을 좋아하게 생겼냐고. 근데, 어쩜 좋아. 얼굴이 빨개지려고 해. 나 고백할 게 있어. 나… 있잖아……, 겨울이 좋아지고 있어. 남녀도 서로 달라서 싸우다가 정들고 좋아지는 경우가 있잖아. 나랑 겨울이 그래. 도시에서 살 때는 겨울의 존재에 대해 잘 몰랐어. 출퇴근할 때, 밥 먹으러 온풍기로 공기를 데운 건조한 사무실에서 잠시 나올 때. 이렇게 얼핏얼핏 만났어. 월동 준비를 한다고 하지? 여기 산골에서는 월동 준비를 단단히 해야 돼. 집 이곳저곳 꼼꼼히 둘러보고, 김치도 하고, 장도 담그고.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일이야. 그래서 이곳저곳 기웃기웃 거려서 얻어 먹어. 산골에 산다고 꼭 다 내 손으로 해먹어야 할까? 수십 년 손맛을 단련해 온 어르신들과 친해져 구해 먹는 것이 내 스타일인 것 같아. 이번에도 그렇게 구한 김치와 장으로 월동 준비 끝. 십 년이 걸릴까. 이십 년이 걸릴까. 언젠가 나도 내 손으로 해먹을 수 있겠지 뭐. 올 겨울은 어떻게 지내나. 어떤 난방이 효과적인가. 난방비는 어떻게 마련하나. 지금은 나무를 때는 집에 살아서 남자도 어디 가서든 나무 걱정이야. 근데 참 희한하지? 겉으로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처럼 보였던 겨울이었지만, 난 어느 순간부터 일 년 내내 겨울을 만날 준비로 분주했던 거야. 비록 내 방식으로 월동 준비를 하지만, 준비하면 준비할수록 겨울은 내게 그리 무서운 존재는 아니었어. 오히려 내가 그동안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살았던 것들을 생각하고 보는 시간을 주더라고.

 

겨울의 맛
그네를 타면 몸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하잖아. 그네가 아이들한테 재미있는 것은 단지 높이 올라가서가 아닐 거야. 높이 올라가서 정지되어 있다면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하염없이 내려다보면 되지. 근데 높이, 다시 낮게. 다시 높이, 다시 낮게. 이 과정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마음이 쿵쾅쿵쾅 뛰는 거지. 우리나라 사계절이란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겨울의 매서움이 봄, 여름, 가을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게 해주는 거야. 겨울에 웅크렸다가 온몸의 기지개를 켜고 활짝 날아오르게 하는, 그리고 다시 웅크려 에너지를 모아주는 시간들. 그게 바로 겨울이 아닐까? 내 안에 까지고 상처받았던 곳을 구석구석 핥아주고 매만져주고 달궈줬다가 봄이 되면서 더욱 높게 뻗게 해주는 거야. 고개로 굽이굽이 막아 사람이 느끼는 고립감을 최대로 높인 강원도의 겨울은 겨울의 이런 매력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것 같아. 내가 어떤 상상까지 했는지 알아? 눈이 1미터 쯤 오는 거야. 그러면 겨울을 핑계 삼아 더욱 몸을 흠뻑 끌어당겨 최대한 웅크릴 수 있겠다고. 그럼 내 안 더욱 깊은 곳까지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다시 올 수밖에 없는 봄의 시간이 찾아오면 다시 몸을 최대한 뻗는 거야. 찬 공기 속을 가로 지으며 다가온 연둣빛 냄새를 향해서. 그 순간 기지개를 펴는 맛이란.

 

겨울도 날 좋아할까? 겨울도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 아니면 어떡하지? 짝사랑인가? 그렇다면 슬프지만, 그래도 겨울이 좋아. 짝사랑이라도 자존심 상해 하며 내 자신에게 ‘나도 사실은 겨울에 관심 없어. 좋아하지도 않아’라고 거짓말하지 않겠어. 솔직하게 말할 거야.

 

겨울!
사랑해!!!

 

도시여자
춘천의 별빛산골교육센터에 산골유학 온 도시 아이들을 돌보며 지낸 지 벌써 3년. 마음만은 성격만은 원하든 원치 않든 여전히 도시여자.
<살림>은 네 명의 필자가 번갈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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