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3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이 만났다. 두 정상이 손을 맞잡고 7천만 겨레를 향해 번쩍 치켜든 날, 민족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세계의 마지막 냉전지역으로 남아 있던 한반도에 화해협력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알린 쾌거였다.
민족사의 분수령이 된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6·15공동선언은 어느새 ‘6·15’란 보통명사가 됐고 남과 북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남쪽에서는 동토처럼 견고했던 북에 대한 대결의식이 봄눈 녹듯 녹아 내리고 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휴전선을 넘어 북녘 땅을 밟고 있다.
북쪽도 변해왔다. 남북의 상생을 위해 군사요충지라 할 금강산과 개성을 열어 놓았고 월드컵 대회 때 남쪽 경기를 인민들에게 보여주었다. 더 의미 있는 것은 남북관계, 나아가 한반도와 동북아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나가는 모습이다. 그 변화의 동력은 다름 아닌 6·15공동선언이다.
반외세에서 민족 주체로 바뀐‘자주’개념
공동선언 당시 남쪽에서 가장 많은 논란이 되었던 것은 1항이다. 조갑제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은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1항을 가리켜 “북의 주한미군 철수 요구로 이어질 것이 분명한 표현”이라며 북을 “우리를 흥분시켜 놓고 대한민국을 소매치기하려는 세력”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6·15 공동선언 1항을 이른바 자주의 원칙이라고 한다. 회담에서 두 정상은 자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놓고 의견을 주고받은 일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주변국가들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을 중심에 놓고 자주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강대국의 부당한 간섭에 맞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는 것으로 대답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자주는 한반도 주변의 복잡한 정세를 고려한 자주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자주는 50년 간 지속돼온 미국의 대북 봉쇄 압박정책에 맞선 ‘자주’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6·15정상회담 이후 남북이 이해하는 자주의 지평이 크게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남쪽이 강대국의 부당한 간섭에 맞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는 문제로 확장하고 있고, 북은 적극적인 대외관계 개선을 통한 우호선린 관계의 확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북은 과거와 달리, 더 이상 남쪽을 미국의 ‘예속정권’ 이나 ‘식민지’로 규정하지 않는다. 미국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과거처럼 북은 미국을 향해 ‘철천지 원수 미제’라는 수사를 남발하지 않는다. 미국이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철회하기만 한다면 더 많은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대미 관계개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는 6·15를 통해 북이 공존과 공생이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적극적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6·15공동선언 이후 북은 ‘자주’라는 말보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을 더 즐겨 사용해 왔다. 2002년 이후에는 이를 ‘이념’이라고까지 지칭해 한층 무게를 싣고 있다. 남북 당국간 대화, 경제협력, 학술교류 등 모든 형태의 만남에서 북은 이 말부터 먼저 꺼내 놓는다.
남북 간에 처음 자주의 원칙이 합의된 7·4공동성명 당시의 ‘자주’가 반미 반외세의 뜻이 강조됐다면 6·15공동선언 이후에는 ‘민족주체’의 입장에 더 많은 무게가 실린 것이라 볼 수 있다. 남북 단결을 가로막는 외부 정책에 휘둘리지 말고 민족끼리 힘을 합치자는 것, 공동선언의 기본정신이 남북을 온전한 통일의 상대방으로 인정한 것인 만큼 자주와 통일을 하나로 묶어 개념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반미, 반외세의 측면보다 민족공조를 통한 통일의 주체 확립으로 정립되는 북의 ‘자주’ 개념은 화해협력시대에 걸맞게 변화하는 북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7·1조치와 경제개혁
1990년대 초반 옛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달러 경제체제 앞에서 북쪽은 부족한 외화 때문에 생필품조차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여기에다 연이은 홍수와 가뭄 등의 자연재해로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어야 했다. 이에 따라 북 체제가 머지않아 붕괴될 것이라는 섣부른 예측도 나왔다. 못 사는 북과 통일해 봐야 우리만 손해라는 이기적인 생각도 고개를 들었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북이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1980~1990년대 사회주의의 몰락은 북쪽에는 무역시장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영향은 상상 밖으로 컸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북의 경제위기는 자연재해나 경제시스템의 비효율성도 원인이 됐지만 봉쇄된 대외무역이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주로 구상무역 방식에 의해 진행되었던 사회주의권과의 교역 대신 등장한 달러무역이란 새로운 방식 앞에서 외화가 부족했던 북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는 연쇄적으로 원유부족과 동력난을 불러왔고, 생산설비를 제때 교체하지 못해 공장가동률이 떨어지는 등 최악의 사태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말부터 진행돼온 여러 개혁조치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북 나름의 자구책이었다. 일련의 개혁조치들은 한마디로 말해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공존 프로젝트’이다. 경제특구를 만들고 외자를 유치하려고 노력한 것은 자본주의 단일체제로 변해 버린 세계경제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적극적인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2002년 7월 1일 북은 가격과 임금을 현실화시킨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단행했다. 또 신의주를 비롯해 개성과 금강산 일대를 특구로 지정했다. 이러한 북의 변화와 관련해 대다수 전문가들은 중국식 개혁 개방을 통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최종 목표로 보고 있는 듯하지만 북측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2002년 9월 도쿄에서 열린 북의 경제관리 개선조치에 대한 설명회에서 북의 김용술 무역성 부상은 “사회주의 원칙을 지키면서 가장 큰 실리를 낼 수 있는 우리식의 독특한 체계로 이행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조치들이 북의 내부사정에만 관계된 문제가 아니라 국제환경도 고려된 것임을 강조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대목은 ‘실리’와 ‘국제환경’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노동자들은 국가계획에 따라 주어진 목표량을 책임지고 생산하는 것이 1차 과제다. 품질경쟁이나 가격경쟁은 그 다음 문제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계획이 아니라 경쟁이 기본 원리인 자본주의 기업들은 끊임없이 품질과 가격 문제를 고민해 이익을 남겨야 한다. 실리와 이윤이 중심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이 전례 없이 실리추구를 들고 나온 것은 어떤 배경일까. 이제는 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일 것이다. 그러자면 대외무역의 길을 새롭게 뚫어야 한다. 대중의 머리에 실리 개념을 주입해야 할 것이고, 품질향상과 생산력 증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물질적 자극도 도입해야 한다. 자본주의와의 경쟁을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경험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민들이 특구 지정과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의 경제개혁 조치들은 남북관계 및 미국 일본 유럽 등 대외관계 개선과 한 묶음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생산력 회복과 외화획득이라는 북 경제의 당면과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남측과의 경제협력과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북은 적극적으로 변화를 준비하고 있으며, 또 꾸준히 변화를 추구해오고 있다.
‘선군정치’의 시대
1990년대, 사람들은 북이 붕괴하든지 개방을 통해 체제생존을 도모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북이 선택한 길은 달랐다. 선군정치(先軍政治). 선군정치를 두고 남쪽에서는 대체로 흔들리는 내부체제 결속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듯하다. 또한 군을 내세운 강압적 통치, 일종의 군사독재의 변형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북에서 선군정치란 말이 등장한 것은 1998년 4월 25일 인민군 창건 66주년을 기념하는 로동신문 사설에서였다. 그러나 선군정치 이전에 이미 ‘군사중시’란 용어가 있었으며, 1997년 7월에는 ‘선군후로(先軍後勞)’ 란 용어가 등장했다.
북이 선군정치를 내세우는 이유는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식량난 등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가속화되는 사회적 이완 현상을 막자는 것이다. 또 미국과의 핵문제 등 외교적 고립 및 고조되는 전쟁 위험 속에서 무장력을 강화하고, 이를 전 사회적으로 뒷받침해야 했던 상황에서 택한 정치적 방침으로 보인다. 또 국가적 위기 속에서 체제를 보위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군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사정과도 관련돼 있다.
북은 예전부터 군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1960년대부터 이른바 4대 군사노선을 통해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를 추진해왔다. 더구나 미국과 전쟁상태를 지속하고 있다고 느끼는 북은 끊임없이 군을 강화하고 이에 주력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미국이 침략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에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국방에 많은 국가예산을 지출해왔으며, 노동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군인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80년대 후반 불어닥친 사회주의의 위기와 붕괴는 북으로 하여금 전민 방위체계를 더욱 튼튼히 해야 할 필요성을 던져주었다. 김일성 주석 사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군이 준비된 무력을 바탕으로 최전선에 서게 했다.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고 이론화시킨 것이 바로 선군정치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의 선군정치는 군을 앞장세워 위기의 국가를 관리하고, 군인정신을 전 사회적으로 확산시켜 그 힘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선군정치를 군사국가화의 단면으로 보기보다는 군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주의 혁명의 전사회적 확산을 꾀하고, 군인정신을 불러일으켜 흐트러진 사회 질서를 다시금 세우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다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북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와 일본과의 수교, 그리고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 상태의 완화 및 평화체제 수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선군정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선군정치는 최근 북이 보여주는 변화의 모습과 궤를 달리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의 핵심은 ‘우리식 사회주의’의 강화, 발전이며, 이를 위한 당면과제는 경제성장과 대외관계 정상화로 집약되고 있다. 경제성장은 우리식사회주의의 물적 토대를 확보하는 일이며, 대외관계 정상화는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몰아닥친 수세적 상황을 돌파하고, 미국과의 반세기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기반이다.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북은 무엇보다 전당, 전인민의 일치단결을 핵심과제로 두고 있으며, 이의 실현방법을 선군정치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