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소련ㆍ동유럽 사회주의 붕괴가 한 시대를 마감하였다면, 지난 9ㆍ11테러는 연이어 또 다른 시대의 마감을 예고하고 있다. 9ㆍ11테러는 불평등의 극복을 지향한 성급한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한 것으로 판명된 다음, ‘역사의 종말’과 자본주의의 최종승리의 자만에 빠져있던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에 일대 충격을 가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21세기의 새벽은 평화와 화해의 합주가 아니라 분열과 증오, 폭력과 전쟁으로 그 서막을 열게 되었다. 무차별적인 개방과 경쟁이 모든 이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시장의 신화는 점점 더 의문시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는 세계화의 탈락자들의 신음소리가 커져가고 있고, 급기야 아르헨티나는 국가부도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제창하면서 등장하였던 국민의 정부는 출발 당시부터 87년 노태우의 집권으로 재기와 입지확보에 성공한 반민주ㆍ냉전 세력으로 포위되어 민주주의를 진척시키기에는 역량부족 상태에 빠졌으며, IMF 외환위기를 틈타 국내경제를 좌우하게 된 국제금융자본과 미국의 압력 속에서 ‘철학 없는’ 시장경제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려는 시도는 수구보수세력의 반격에 부딪혀 사사건건 좌초되었으며, 시장경제는 섣부른 벤처육성과 건설경기 부양정책, 미봉적인 재벌개혁정책, 구시대적 관료주의로 채색된 각종 사회개혁과 공기업 해외매각정책으로 귀결되었다. 한편 적극적인 남북화해정책으로 탈냉전의 훈풍이 오는가 했더니 그나마 미국의 대북 강경전략과 북한의 경직된 태도로 결국 제대로 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의약분업 추진과정에서 의사들의 반격에 무기력하게 대처하다가 언론사 세무조사 국면에서 보수언론의 전면공격에 직면하여 비틀거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각종 게이트사건으로 현정부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약간의 개혁에 기대를 걸었던 많은 사람들을 크게 실망시키고 있다.
김대중정부 4년은 겉보기에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정치세력간에 힘과 힘의 대결, 정치적 문제해결 방식이 압도했던 시기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민사회가 하나의 행위주체로 분명히 등장했고, 과거와 달리 매우 구체적인 정책적 쟁점들이 부각되어 관련당사자들간에 뜨거운 논란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했다. 재벌문제, 민영화문제, 복지정책 논쟁, 교육개혁 관련논쟁, 과거청산 혹은 인권문제 관련논쟁이 지난 4년 동안 한꺼번에 제기되었으며, 그 모든 사안은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잠복되어 다음 정권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즉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도 이제 정치적 판단이 아닌 정책적 판단이 점점 중요해지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으며, 그것은 사회발전의 긍정적인 신호이다.
시민운동은 국가와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행위자가 되었다. 제도정치에 환멸을 느낀 많은 국민들이 시민운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작년 이후 시민운동 역시 큰 시련에 직면해 있다. 비록 4ㆍ13총선 당시 900개가 넘는 시민단체들이 모여서 추진한 낙천낙선운동이 정치개혁의 가능성을 열었으나, 그 이후 나타난 정치권의 구태의연한 모습은 시민운동 내부에서도 자신의 한계를 절감케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더욱이 ‘홍위병론’ ‘2중대론’ 등 시민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공세는 시민운동의 입지를 크게 위협하였으며 나름대로의 의미 있고 중요한 성과들도 모두 묻어버리고 시민들을 정치적 허무주의로 몰아가는 데 일조하였다.
이제 시민운동은 문제를 제기하기만 해도 관심을 끌고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었던 초창기의 이득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고, 전문성의 확보와 구체적 대안의 제시, 도덕성과 일관성의 유지라는 과중한 짐을 지고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중에서도 당면의 실용적인 문제 해결에 치중해 온 시민운동도 앞으로는 이론과 정책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90년대라는 긴 터널을 우리 사회운동가나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은 참으로 힘겹게 지내왔다. 그리고 그 힘겨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려운 시절을 겪어온 우리는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돈의 지배’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의 위기는 세상의 문제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무능한 인문사회과학자 자신의 위기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지만, 생각하는 일보다는 즐거운 일에 탐닉하는 이 ‘가망 없는’ 시대에, 골치 아픈 생각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설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쟁점을 제대로 소화, 정리하지 못하는 연구자들의 잘못도 비판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세상을 탓하고 자신을 탓하면서 앉아 있기에는 우리가 처한 정치ㆍ경제적 현실은 너무도 엄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민사회운동진영의 정신적 도약을 위하여 이 책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세상 한가운데서 또 한 권의 읽을 거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분명히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희망이 없다면 누군가가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개인으로 쪼개지고 있는 세상에서 모여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희망이 된다는 신념으로 이러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어려운 시대의 하나의 논쟁의 마당, 희망찾기의 마당이 되기를 자처한다. 계속 노력하다 보면 희망을 찾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목소리에도 더욱 힘이 실릴 것으로 기대한다.
이 책은 참여연대 산하의 참여사회연구소에서 책임을 지고 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는 참여연대의 운동방향과 궤도를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내는 잡지이므로 반드시 참여연대의 활동을 사후적ㆍ이론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운동의 방향과 노선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연구자들의 목소리는 독립성과 자유를 그 생명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비판과 반(反)비판의 여지를 두면서 시민운동의 이론적 정책적 쟁점들을 취급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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