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호] 북리뷰 3_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

김상봉, 『나르시스의 꿈』

칸트연구로 독일 마인츠대학에서 박사학위(1992)를 받은 김상봉은 서양철학의 ‘전달자’에 그치지 않고 주체적 해석에 더 많은 힘을 쏟아온 몇 안 되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최근 펴낸 『나르시스의 꿈』은 그런 노력의 단면을 보여주는 성과다.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이란 부제가 말해 주듯, 이 책은 그가 서양철학을 넘어서는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남긴 고뇌의 흔적이다. 프롤로그ㆍ에필로그와 3부로 나뉜 이 책의 논문들은 단일한 집필계획 아래 씌어지진 않았지만, 서양철학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을 공통분모로 나눠 담고 있다.

그가 서양철학의 역사를 ‘나르시시즘의 전개과정’이라고 보는 까닭은, 서양철학이 “한 번도 자기의 전통 밖에 서서 자기를 비판할 수 없었”(13쪽)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서양정신이 자유의 이념에 의해 인도되어왔기 때문”(27쪽)이다. 왜 자유의 이념이 나르시시즘을 낳았는가. 서양정신 이외의 어떤 타자적 정신도 “서양정신만큼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29쪽)이다. 자신의 아름다움(자유의 이념의 아름다움)을 자각하고 있었던 서양정신 앞에 “자유롭지 않은 타자적 정신이 나타날 때마다 그가 느끼는 것은 자기에 대한 긍지와 타자에 대한 멸시”(같은 곳)였다. 이 지점에서 서양정신은 나르시시즘에 빠져든다.

『나르시스의 꿈』은 김상봉이 구상하고 있는 ‘나르시시즘 3부작’의 전주곡에 해당한다.

이 책은, 수동적으로 서양철학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대신 서양정신의 끝간데를 철저하게 해부하고자 하는 그의 기획을 ‘연습’이라는 겸사 아래 드러내고 있는 의미심장한 저작이다. 그의 3부작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후학으로서 검토가 필요해 보이는 몇 가지에 대한 독후감을 조심스럽게 덧붙이고자 한다.

먼저 ‘나르시시즘’에 대한 엄밀한 개념화가 필요하다. 지은이는 “나르시시즘의 본질은 주관주의”(186쪽)이며 그것은 “객관적 대상세계의 본질을 인식주체의 본질에서 찾는 태도”(190쪽)라고 이해한다. 그런 태도는 중국이나 인도철학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우주의 모든 게 내 마음에 갖춰져 있다”고 한 맹자나 “마음이 곧 이치”라고 한 왕양명은 정확하게 “객관적 대상세계의 본질을 인식주체의 본질에서 찾는 태도”를 보여준다. 지은이는 “모든 철학은 자기인식”(17쪽)이라고 말한다. 자기인식을 위해서는 자기반성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즘은 철학의 운명이 아닐까? 가령 그가 한용운, 함석헌, 박동환과 함께 사유하며 모색하는 ‘슬픔의 해석학’ 또한 비서구사회 지식인으로서 자기인식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나르시시즘으로 비칠 가능성은 없는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성찰을 통해서 그의 논리가 지역주의(localism)에 빠져드는 길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파악한 ‘서양정신’이 중국이나 인도의 사유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가령 지은이는 고대그리스 철학의 시원을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찾으며, 그리스문화가 예언자나 철학자보다 시인을 먼저 요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대문화 연구자라면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떤 문화에서든 철학자보다는 시인이 먼저 등장한다. 지은이는 “중국에서는, 『주역』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이해가 처음부터 철학적”(187쪽 각주 18)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정확하지 않다. 『주역』은 본디 철학책이 아니라 점술서였다. 아마도 “처음부터 철학적”인 겨레는 지구마을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서구에서는 동일성의 논리학을, 왜 중국이나 다른 문화권에서는 그와 다른 사유양식을 발전시켰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지식사회학 안에서도 난제에 속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엄밀한 비교연구가 뒷받침될 때, 그의 나르시시즘 3부작이 좀더 폭넓은 설득력을 지닐 것이다.

세번째로, 그의 논리에서 일정한 민족주의적 경향이 보이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역사는 한 민족의 자기반성의 거울”(327쪽)이라거나 “한 민족에게 있어서 시대의 자기인식이 언제나 역사의식으로 발생”(317쪽)한다는 등의 진술이 그런 예이다. 그가 “지금 우리에게 그 사명(‘세계의 불의를 담당함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도덕적으로 한층 높이 올리는 일’-인용자)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거룩한 겨레얼이 살아 있는가?”(340쪽)라고 물을 때는, 가장 양순한 상상력을 발휘하더라도 독일국민에게 고하는 근대민족주의자 피히테의 목소리가 겹쳐 들림을 부인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지은이의 문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논증이 생략된 곳이 많아 단정적이거나 비약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는 대목이 더러 있다. 3부작이 상재될 즈음엔 좀더 친절한 논증을 기대한다.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해서는 서양철학자들도 그의 글을 읽고 도망할 구석이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수 / 한겨레신문사 문화부 기자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