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긴 것’과 ‘이룬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김없이 통하는 진리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긴 것만큼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답답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다. 보수회귀 역풍에 마음 졸이던 작년 이맘때와는 달리 이 예감에 관해 ‘불길하다’거나 ‘두렵다’는 표현을 쓸 정도는 아직 아니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답답한 것이나 두려운 것이나 견디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노무현 정부의 출범으로 이 땅이 참여사회와 ‘평화의 허브’로 거듭나는 길을 향해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리기를 희망했다. 평화와 참여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성공을 위해 초석을 깔아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참여정부라는 문패를 단 이 정부는 당선되었다는 사실, 권력을 장악했다는 사실 자체에 너무 자기도취되어 버린 것같이 보인다. 새 정부의 참여사회 건설능력이나 평화허브 건설능력은 의외로 너무 빨리 바닥으로 향하고 있다. “노무현이 당선된다는 사실 하나가 이미 당선되고 나서 할 많은 일보다 더 크다”고 한 그 말이 진담이었던가.
절망에 빠져 비관적일 때 못지않게, 희망에 들떠 터무니없이 낙관적일 때도 예단의 오류는 비켜가기 힘들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두고 씁쓸하게 하는 말이다. 바로 6개월 전 우리는 2002년 대선에서 그 가공할 위력을 드러낸 ‘새로운 사회동력’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면서, 이를 ‘희망코드 노무현’과 연결시키고, ‘대한민국 2002년 체제’를 거론했다.
사실 우리의 전망이 틀려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당시 우리는 넉넉한 마음이었다. 참여정부 출범을 얼마 앞두고 일어난 배달호씨의 분신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비극에 빠트린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분신보다 참여를 택할’ 최소한의 길만은 분명히 열렸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문제의 실질적 해결 못지않게, 그 문제를 자신의 말로 표현ㆍ발언하고 그 문제에 같이 관여된 타자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서로의 마음을 터가는 과정으로서 참여와 공론의 장이 형성되어 가는 의미를 소중히 여겼다. 우리가 만회혁명이라고 말했을 때 만회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은 인적 청산이나 문제의 일거의 해결이라기보다 어디까지나 권력과 자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시민의 일상에 묻혀 있었던 말과 행동의 자유이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 혁명은 최소 혁명, 참여사회와 평화허브로 가는 새로운 기회의 열림이었다.
출발은 그런대로 좋았다. 우리는 3월에 있었던 대통령과 전국 평검사들과의 대화에서, 그리고 야당 지도자들과의 청와대 회동에서, 할말이 많은 대통령과 해줄 말이 많은 이 사회의 권력엘리트들 사이에 말길[言路]이 트여가는 듯한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그 말길이 엘리트들 사이를 넘쳐 저 시민의 바다에 합류하거나 아니면 말의 작은 물방울이라도 굽이굽이 주름진 삶의 골짜기에 뿌려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말길은 청와대와 청남대를 넘지 못했다. 참여정부에서 참여는 여전히 좁고 어두운 골방 안에 유폐된 상태로 갇혀 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무늬만의 참여일 뿐이며, 우세한 것은 여전한 관료주의, 시장주의, 그리고 낡은 동원주의의 어떤 혼합물이다.
왜 이렇게 희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큰가. 배신당한 것인가? 사실 냉정히 돌이켜보면, 대통령 자신 대통령이 되기에 족한 지지표 이상의 것을 시민들로부터 기대했다는 어떤 증거도 찾기 어렵다. 그가 자신을 지극히 기능적으로 “행정부의 수반일 뿐”이라고 언명했을 때, 너무 빨리 참여 대신에 동원의 깃발을 올렸을 때, 그리고 참여정부가 성공한 정부가 되려면 역대 어느 정부보다 강력해야 하며, 이는 보수적 사회권력과의 소극적ㆍ소모적 공방전이 아니라 시민적ㆍ대중적 참여를 이끌어내고 국민적 동의를 광범하게 확산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권력과 권위를 적극적으로 행사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망각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정치적 휘광은 사실상 유실되었으며 ‘가벼운 실용주의’가 그 자리를 메우고 들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가벼움이 이 시대의 통치자로서 마땅히 지고 가야 할 많은 짐을 그저 덜어낸 덕분에 ‘가벼워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때문에 이 실용주의적 가벼움은 실질적인 경쾌함을 자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게 안일했던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노무현 개인에게 우리 자신도 못해 왔던, 그러나 간절하게 바랐던, 너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투사시켰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지지표말고는 그의 손에 쥐여준 것이 별로 없었다.
시론에서 김진균 선생이 말하고 있듯이, 전쟁의 전지구적 일상화와 한반도의 새로운 전쟁위기 속에서 반전평화운동은 참여정부가 아니라 또다시 “민중이 감수하는 과제”가 되었다. 이런 의식의 연장선 위에서 이번 호 좌담은 참여정부가 그렇게 일찍이 굴복해 버린 미국의 패권의지가 과연 미국 안에서 제대로 된 미국시민의 올바른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를 심층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거듭 확인되는 미국시민의 여론은 미국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세력을 선제공격하는 것에 다수의 지지를 보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런 미국인의 피해의식이 결코 건전한 사태판단에 바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온 엄청난 인구이동과 경제침체로 중하위층을 막론한 미국시민 대다수의 삶이 불안정해지면서 그 해결책으로 전쟁에 기대려고 한다(좌담에서 정현백-구갑우 논쟁 참조). 다시 말해 전쟁은 대다수 미국시민이 지지하는 제국의 국책사업이 된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윤곽으로 드러나는 미국시민의 심리선은 20세기 초 바이마르공화국 아래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은 독일국민이 베르사유조약의 굴욕스러움과 경제적 부담을 핑계삼아 나치를 권좌에 밀어올렸던 바로 그 궤도를 정확하게 따라간다. 이제 제국은 소수 집권층의 정책의지가 아니라 절망과 좌절에 빠진 대중이 제국에 비축된 무력을 외부로 배출하면서 자기들의 내부문제를 봉합하고자 하는, 더도 덜도 아닌, 그리고 결코 개념적 비유가 아닌 엄정한 의미에서, 고전적 파시즘의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만약 참여정부가 지금까지 대한민국 통치의 키워드가 되어오기도 했던, 이른바 ‘국익’이라는 것을 관철시킨다고 하는 가벼운 ‘국익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바로 현재 이 순간의 미국 정책을 추종한다면, 이는 참으로 불운하게도 단지 외교정책상의 공과 이전에, 파시즘의 21세기적 형태인 ‘제국 파시즘’이라는 역사적 과오에 동참하는 결과를 낳는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이 강대국이 자국의 대중을 상대로 피해의식을 고취하는 경우이다. 이때 강대국의 대중은 바로 자신들이야말로 윤리적으로 옹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의 도덕적 책무를 벗어던진다.
우리가 주제기획의 표제로 내세운 ‘제국의 위협’은 9·11을 지나면서 바로 이 피해의식을 자기 대중에 내면화시키며 나온 미국의 공격성이 대외적으로 분출되는 극적인 양상을 다면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설정한 의제이다. 여기에서 그 의제의 원천인 미국의 부시독트린은 이 공격성이 미국 국가의 정책적 성격으로 체화되는 것을 상징한다(서재정). 하지만 한반도의 딜레마는 이 부시독트린으로 그 첨예성이 표출되었을 뿐이다. 우리가 동북아 경제중심을 혼자 꿈꿀 수 없는 진짜 중요한 가까운 원인들은 대한민국 국가를 잠재적 경쟁자 또는 위험요인으로 생각하는 동북아 동료국들의 경계심이다. 이럴 때 중심국가니 강성대국이니 하는 표어는 이 경계심을 경쟁심으로 변질시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적대감으로 발전시킬 소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평화를 기획하고 관철시킬 능력, 즉 평화능력을 우리 체제의 기축으로 삼아 동북아 경제중심을 넘어 동북아 평화허브로 승화시키는 일이다(정욱식). 그러나 참여정부가 내세운 평화번영정책은 미국과 일본의 북한위협론에 기선을 제압당하면서 정책으로서의 실천적 구체성을 제시하지 못한다(이철기). 그런데 새 정부가 ‘국익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여전히 제국의 신민의 한계선에 갇혀 있는 동안, 전지구적 평화운동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인류보편적 규범―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라 평화능력을 적어도 그 의지 측면에서 확실히 입증한 것은 이라크 파병반대운동을 계기로 한반도 역사에서 최초로 벌어진 반전평화운동이었다. 여기서 21세기 한국의 시민사회 능력은 참여정부의 능력을 추월했으며, 전례 없는 한반도 평화허브 희망의 싹을 틔웠다. 그러나 한미동맹을 그 군사적 측면에서 강화시키는 쪽으로 나온 참여정부의 정책적 미숙 못지않게 우리 시민사회의 평화운동 능력이 실천적으로 미숙했던 것도 사실이며,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단을 압도하기에는 아직 미력하다(황인성).
아마 좀더 발본적으로 평화능력을 새로이 창출하려면 우리가 평화 속에서 살고자 하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2003년 2월 15일의 전지구적 평화시위를 ‘유럽 공중(公衆)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로 해석하여 데리다의 동의를 얻어낸 하버마스의 철학적 통찰은 미국의 일방주의가 자신의 어떤 가치 있는 삶을 침해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자각시키면서, 유럽중심주의를 넘어선 인류적 보편성의 관철에 유럽의 정체성(正體性)을 위치시키려는 시도이다.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들은 미국의 일방주의가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현 지구의 위기정세 속에서 유럽인들이 제기한 유럽적 정체성의 시도가 또 하나의 변형된 민족주의가 아닐까 우려하면서 지난 5월 31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유럽지식인들의 연대기고의 하나로 하버마스가 집필하고 데리다가 서명한 글을 서둘러 구해 보았다. 그리고 그 어떤 정체성을 자기중심적인 이익이 아니라 세계시민적 보편성과 결부시키려는 그 노력이 너무나 돋보여 독일 쪽에 연락하여 그 전문을 번역하기로 하였는데, 하버마스는 직접 이 한국어 번역에 동의해 주었다.
이 글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공동인터뷰가 실린 책에서도 9ㆍ11테러를 하나의 폭력적 사건이 아니라 계몽주의의 관철로서 현대화의 보편적 과정에 내재된 모순으로 보는 철학적 시야는 여전히 현대의 최고문명권에 대한 비판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자기비판을 보여준다. 즉 미국의 전지구적 위력은 결코 인간 삶의 보편적 활력이 아니다. 테러공격을 당하면 당연히 대중적 차원에서 보복폭력의 유혹이 팽배해진다.
이 보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생각이 그 테러의 잔혹성을 능가하는 상쇄 범죄로 치닫는다. 하버마스는 바로 이 선에서 자신과 철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데리다와 테러시대의 철학을 공동의제로 놓고 세계공중이 보복폭력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설득하는 담론을 벌인다. 비록 제국의 세력권 안에서 잠재적 경쟁권의 시민이라는 근본적 한계를 지니긴 했지만 20세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철학적 거장들의 치열한 논변에서 우리는 테러시대에 철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폭력 앞에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실존의 한 면모를 목격하게 된다(홍윤기).
인간을 살리고, 너와 나, 인간과 자연을 서로 살리는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를 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볼 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안정된 틀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방면에서 오랜, 고도의 집권-집중, 파행적 불균형, 동원-타치(他治)의 시대를 마감하고 분권-분산, 균형발전, 참여-자치의 시대를 여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다. 우리가 평화 주제기획과 나란히 ‘분권-균형-자치’ 특집에 무게를 실은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다. 우리는 앞으로도 참여사회 구상의 일환으로 이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여할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지방자치를 내실화하고 균형발전의 시대를 열겠다는 시도는 당위적 차원을 넘어서 곧바로 다층적인 문제상황으로 전화한다. 지방자치는 이제 국가의 부를 지방의 부[鄕富]로 전이시키는 일(강형기), 권한을 나누고[分權] 재화를 흩뜨려[分散] 전국이 균형발전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조형제)은 물론이거니와, 과연 그런 지방을 만들기 위해 바로 그 지방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참여가 얼마나 활성화되느냐, 그럼으로써 진정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방 또는 지역을 창출할 수 있느냐를 묻는 차원으로 발전한다(하승수). 그러나 이렇게 문제의식은 선진화되면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갖추고 전문적 역량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주민의 참여자치 역량은 여전히 정책적 고려에서 배제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은 주민참여와 결부되지 않은 지방분권이 지방토호들의 아성으로 전락할 위험, 즉 동원국가의 지방 축소판으로서의 토호주도 분권이 될 위험을 경고해 주고 있다(김제선). 분권과 분산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방담론에 이론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그래서 더욱 경청할 만한 가치를 가진다(하승우).
기대를 추월하여 흘러넘친 ‘새로운 사회동력’을 받아 앙시앵레짐의 세력으로부터 오는 일체의 부담 없이 패기만만하게 출범한 것 같았던 참여정부의 실망스런 개혁의지에서 우리는 비로소 이 권두언 모두 부분에서 토로했던 ‘답답함’의 실체를 만난다. 이제 우리는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투쟁에서 벗어나 이 정상적 민주국가를 활력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민주주의를 급진화시켜야 할 더욱 근본적인 동력을 정돈된 모습으로 체제화시켜야 한다(조희연). 사실 민주국가의 정상화에 대한 감시는 시민사회 본연의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국가제도 선에서 정렬되어야 할 너무도 당연한 시민적 요구들이 뜻밖에도 국가에 반하는 것으로 거칠게 매도되는 관료주의적 언행에 당황한다(홍성태). 그러면서 구시대에나 들었을 경제제일주의적 국민동원의 발상이 갑자기 난무하는 아주 당혹스러운 사태에 직면한다. 과연 “2만 달러 국가개조론이 그 대답이 될까”(이병천).
우리는 늘상 위기를 말하면서도 새삼 우리의 어떤 삶이 위기에 빠졌는지, 그래서 공동의 노력을 통해 위기에서 건져낼 우리 삶의 양식과 경제양식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서로에게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국경제에서 재벌은 외환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다. 많은 중소그룹들이 재벌대열에서 탈락하거나 해체되었지만, 피라미드의 정점에서는 위기 이후 은행빚에서 주식모집으로 그 자본의 원천을 달리하면서 오히려 그 소유와 지배의 구조가 별로 변하지 않거나 더 공고화되었다(김진방). 도리어 가속화된 초국적자본의 시장개방에 대항하여 그나마 민족자본을 지키려면 재벌을 도리어 강화시켜야 한다는 뜻밖의 논의 앞에서, 재벌의 소유와 경영을 노동을 위시한 이해당사자의 관점에서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그럼으로써 성장과 분배의 새로운 조화의 길을 열려는 발상은 아직도 시기상조인가?(장시복)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해결될 일이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보다 단단한 충족을 위해 시민권(citizenship)의 의미를 그 원천에서 수용하고, 그런 시민으로서 이룩할 일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요약컨대 ‘시민정치’의 현장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민은 시장의 교환과 경쟁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긴 하지만 경쟁과 사익의 추구가 몰고 올 권력적ㆍ도덕적 황폐함에 비판적으로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김석수). 이런 시민이 후기자본주의의 소비대중이나 노동대중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역정을 가진 ‘다중’으로 진화할 전망은 어떤가? 주어진 시민이 아니라 시민적 능력의 구성과 경계 안팎에 걸쳐 운동도상에 있는 시민, 그 다중적 물질적 토대가 문제다(조정환). 그리고 외국인 노동력의 급격한 유입으로 다종족(multi- ethnic), 다문화(multi-cultural) 사회화가 불가피해지면서 오늘날 우리는 그간 시민권의 보증으로 너무나 당연시해 왔던 한국국적의 인종주의적 요건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최현).
이런 원론적 고찰 밑에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세계시민사회’ 그 자체가 곧 우리 사회 안으로 밀려들면서(이성훈),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가 이제는 학교 안에서도 어떻게 관철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격렬한 혼전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심성보) 성장한 시민사회의 지각변동에 폭넓게 대처하려는 우리 나름의 비전이 깔려 있다고 해야 한다. 당연히 이런 지각변동 안에는 전문정치인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행정의 한 축으로 활약하는 청렴계약제 옴부즈만제도나(최한수) 한낱 주변인으로 취급받던 장애인사회가 자기정체성에 대한 더욱 심도 깊은 담론을 전개하면서 시민사회의 한 축으로 부상함으로써(유동철) 참여사회의 구체적 모습들이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과정도 포함된다.
허약한 참여정부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 정부는 할 일이 있다. 우리는 기대의 끈을 놓지 않으며 참여정부의 자기개혁투쟁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국가권력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금물이다. 우리는 다시금 이 사실을 배웠다. 정치는 국가 밖으로 확장되고 시민의 삶 속에서 일상화되어야 한다. 제국 파시즘의 위협, 그리고 허약한 참여정부와 마주하고 있는 오늘, 참여사회와 평화허브로 가는 기회의 창을 활짝 열어젖히기 위해, 이 땅에서 평화와 참여의 거대한 풀뿌리연대와 인간사슬이 탄생하는 희망을 위해 시민사회 동력의 발본적ㆍ성찰적 재구축과 재가동이 요구된다.
2003년 8월
공동편집인 이병천ㆍ홍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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