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4-08-23   1220

<안국동窓> 과거와 현재의 대화

‘현재는 과거를 만들고 과거는 현재를 만들며, 진정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하여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현학적인 수식으로 그냥 멋진 말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가끔씩 있다. 하지만 요즈음처럼 이 말이 단순한 현학적 언사가 아니라 얼마나 절박한 현실을 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정말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중,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통하여 우리는 동양척식회사등 일제 수탈기관을 통하여 한국인의 토지가 일본인에 강제로 빼앗겼다는 것을 배워왔다. 얼마전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발표한 것에 따르면, 여의도 넓이의 11배나 되는 토지가 지금까지도 동양척식회사나 일본인의 소유로 등기가 유지되고 있음이 사실로 드러났다. 식민지시대의 유산이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토지 소유관계처럼 문서로 증명된 이 경우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식민지시대의 연장을 눈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눈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식민지 시대가 역사적인 반성을 통하여 척결되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다시 한번 절박하게 마음에 새겨야 한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할 중요한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국가적인 폭력에 의해 억압되고 과거와 현재의 억압된 현실이 대화를 통하여 새로운 현실로 등장하지 못한 채 억압된 기억으로만 존재할 때, 그 사회는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도 없다.

일제 잔재의 청산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중요하다. 과거 권력에 의해 억압된 기억을 현실의 역사로 만들자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다. 억압된 기억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바로 현재가 과거로부터 만들어 졌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억압된 기억으로서의 과거가 현실이 될 때 이것은 전체 역사 속에서 과거 만이 아니라 현재까지 새롭게 규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권력다툼과 보복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과거청산이 지닌 이러한 역사적 과제를 단순히 권력다툼과 보복의 문제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은 이미 드러난 과제를 회피하거나 더 나아가 왜곡하려는 얄팍한 술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술수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막아서는 안된다. 그 누구도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실로 드러나지 못하고 권력에 의해 억압된 기억으로서의 과거는 유령처럼 존재한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 떠돌던 이들 ‘과거’의 유령들 모두를 현실의 땅에 내려와 안착하도록 만들어야 할 때를 만났다. 권력에 의해 잔인하게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된 경우가 우리 역사에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이것이 아직까지 억압된 기억으로서 유령처럼 우리 하늘에 떠돌고 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과거 식민지 시대의 잔재 뿐만 아니라, 해방공간에서의 권력을 통한 인권유린, 한국전쟁 기간에 이데올로기를 빌미로 한 권력에 의한 양민학살, 군사독재 시절 중앙정보부와 군 사찰기관을 통한 잔인한 인권유린 등이 이제는 억압된 기억이 아니라, 유령이 아니라 현실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렇게 새로운 과거와 현재가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역사의 억압된 기억을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하여 현실로 만들어야 할 때다. 식민지 시대의 비극이 전부가 아니다, 위에서 열거한 무수한 유령같은 기억들이 우리 사회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가 권력에 의해 억압된 기억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우리 현실이 현재를 왜곡하고 있으며,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까지 잡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진실한 대화를 통해 억압된 기억을 해방시켜야만 이러한 교착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 과거청산은 안된다는 변명들은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치장된다하더라도 그 본질은 역사적 과제를 방해하기 위한 잔재주에 불과하다. 이러한 잔재주에 현혹되어 다시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유령처럼 떠돌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진영종 (성공회대 교수, 협동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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