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 국립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가족각본』저자
한국을 떠나거나 혹은 태어나지 않거나
“이 혼혈아 고아원에서는 선생들이 아이들을 부를 때 ‘튀기’라고 부른다. 야비하고 잔학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 아이들이 언젠가는 이 한국 땅에 토착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 일반 국민학교에 보내고 있는데, 애들이 그 학교에서 튀기라고 놀림 받을 때 상심하지 않기 위한 훈련으로서 튀기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고아원 H 선생)
윗글은 1966년 4월 28일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이 기사는 <전국에 4만 성년 혼혈아 고민>이란 제목 아래 당시 ‘혼혈아’1)를 돌보던 한 고아원 선생님의 말을 전한다. 윗글에서 H 선생은 “한국 땅에 토착해야” 하는 아동들이 “학교에서 튀기라고 놀림 받을 때 상심하지 않기 위한 훈련”을 한다며 아동을 ‘튀기’라고 부른다.2) 마치 예방접종을 한다는 듯, 불행한 앞날을 예견하여 선생님들이 아동에게 비하성 발언을 하고 있다. 모욕적인 말로 부르면서 아동을 돕기 위한 행동이라고 설명하는 그의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당시 한국 정부는 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위 ‘혼혈아’를 ‘전원’ 해외 입양시키려 애썼다. 호주제가 있던 시절, 부계 혈통을 따라 만들어진 가족제도 속에서 아버지가 외국인인 아동은 한국에서 호적과 국적을 취득하기 어려웠다. 아동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이 아니었고 ‘아버지의 나라’로 떠나야 하는 존재들로 여겨졌다. 입양을 가지 못한 아동들은 한국 땅에서 어쩔 수 없이 ‘토착’해야 했고, 한국에서 사는 동안 ‘튀기’라고 불리며 조롱과 모욕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니 혼혈 아동은 한국을 떠나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해외 입양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이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1950년대부터 2022년까지 해외 입양으로 한국을 떠난 아동의 수는 168,427명이다.3) 해외 입양은 1950~60년대 ‘혼혈아’를 보내던 일에서 나아가 1970년대 경제발전기에 더욱 증가했다. 해외 입양 아동의 수는 1950~60년대 7,867명에서 1980년대 66,511명으로 급증했고, 2000년대에도 19,345명으로 한 해 평균 약 2천 명에 이르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지난 2022년 해외 입양아동의 수는 142명으로, 과거에 비해 현격히 줄어든 수치이지만 국제적으로 보면 콜롬비아(235명), 인도(223명) 다음으로 세계 3위의 높은 수준이다.4) ‘고아 수출국’이란 오명은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합계출산율 0.72명(2023년 기준)인 ‘초저출생’ 국가에서 여전히 아동을 해외로 떠나보내는 이 기이한 현상은 표면적으로 보자면 너무나 모순적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두 가지가 별로 다르지 않은 현상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해외 입양이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이 땅에서 살 수 없는 아동의 이야기라면, 저출생은 이 땅에서 살 수 없어 아예 태어나지 않는 아동의 이야기일 수 있다. 한국 땅에서 살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초저출생’과 ‘해외 입양’의 현실은 상호모순이 아니라 같은 현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떤 사람이 살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살 수 없는 사회란 말인가?
무엇이 아동을 위한 최선인가
경제 발전기 이후 해외로 입양된 아동은 많은 경우 ‘미혼모’가 출산한 아동이었다. 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어야 했던 이유는 ‘혼혈아’가 떠나야 했던 이유와 조금 다르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계 혈통 중심으로 짜인 가족제도와 사회구조 속에서, 아버지가 없는 아동은 경제적으로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낙인이 심했다. 혼혈 아동이 한국인 엄마가 있어도 한국인의 ‘뿌리’가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엄마가 있어도 ‘아비 없는 자식’은 ‘근본’이 없는 사람이라고 취급당했다. 한국에서 살면 차별을 받을 것이 자명하게 예측되므로 해외 입양을 보내는 것이 ‘아이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사회복지사도 같은 생각을 하며 해외 입양에 동참했던 것 같다. 아리사 H.오는 『왜 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뿌리의 집, 2019)에서 사회복지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머니들에게 아동의 해외 입양을 권했는지 이렇게 적는다. “사회복지사들은 ‘외국에 입양 보내면 … 자기가 데리고 살 때보다 더 많은 기회를 자식에게 줄 수 있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용감하고 이타적인 어머니들을 칭찬했다.”5) 그리고 자식을 보내지 못하는 어머니를 비난하며, 자식을 직접 키우는 것보다 해외 입양이 아이의 앞날을 위한 선택이라고 설득하여 친권을 포기하게 했다.
“한국 사람들은 이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그럼 이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1960년대 초반에 500명의 아동을 미국으로 입양 보냈던 사회복지사 한 모 씨는 이런 말로 설득해 친생모에게 친권 포기를 받아냈다고 한다. 한 모 씨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아동을 보냈던 이유는 정말로 해외 입양이 아동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살면 조롱과 배척을 받는 “암울한 미래”가 있겠지만 다른 나라로 가면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한 모 씨는 당시의 활동을 후회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정말로 그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었다.”6)
아동을 ‘튀기’라고 부르던 고아원의 H 선생도, 친생모에게 친권 포기를 종용하던 한 모 씨도, 자신의 행동이 ‘아동을 위한 최선’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사실 ‘튀기’라고 부르는 행위 자체가 이미 조롱과 멸시의 행동이고, 해외 입양을 종용하는 행위 자체가 아동을 배척하여 사실상 해외로 “추방” 7)하는 일이었는데, 이 모든 것이 아동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최선의 방법처럼 보였나 보다. 그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다’라고 말해도 될까? 주지하듯 ‘아동 최선의 이익’은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명시된 아동 권리보장의 원칙이자 아동복지법이 규정하는 아동 관련 활동에서의 판단 기준이다.8)그런데 왜 어떤 ‘최선’은 오히려 아동의 인권을 침해하는가?
때때로 무엇이 아동을 위한 ‘최선’인지에 관한 판단이 왜곡된다. 위의 사례들처럼 아동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아동을 위한 ‘최선’인 것처럼 생각되는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 배경에는 한국 사회에서 차별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섬뜩한 전망이 있다. 그러니 차별을 피해 이 땅을 떠나야 한다거나, 혹은 차별을 받는 일에 준비하고 익숙해지는 것이 더 낫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더 나아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차별이 얼마나 심하기에, 또 변화의 가능성이 얼마나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아동을 위한 ‘최선’이 아예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인가?
불행한 미래를 예견하는 집단적 상상과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차별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은 오늘날에도 출산과 출생에 관한 담론을 지배하는 것 같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 용역으로 실시된 ‘장애인 모·부성권 증진을 위한 실태조사’에서 장애인의 출산에 관해 물었다. 국가가 장애인에게 임신·출산·양육지원을 해야 한다는 데에 비장애인 응답자 605명 중 거의 모두인 94.0%가 동의했다. 하지만 “직접 양육이 어려운 장애인 부부는 임신이나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라는 문장에는 69.9%가 ‘예’라고 답했다.9) 국가가 장애인을 지원하기를 바라지만 그건 불확실한 희망일 뿐, 현재 상황에서는 장애인의 임신·출산을 반기기 어렵다는 뜻으로 읽힌다.
장애인의 임신·출산을 쉽게 반기지 못하는 건 장애인의 부모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2019년 한 신문사에서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을 인터뷰하는 기사를 내보냈다.10) “장애인들 결혼하고 잘 사는 건 꿈같은 얘기… 출산, 말릴 수밖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부모들은 장애인 자녀의 출산에 관해 복잡한 심정을 토로한다. 태어나는 아이의 상황이 어떨지, 자신이 손녀까지 양육을 부담하게 되지 않을지 걱정하고, 그 걱정 끝에 결국 장애인인 자녀가 임신·출산을 할 수 없도록 선택을 유도한다고 고백한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장애를 이유로 임신·출산을 하지 못하게 된다.
위 국가인권위원회 설문에서 나타난 부정적인 대답 역시, 그저 ‘장애인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라는 뜻이 아닐 게다. 아마도 ‘직접 양육이 어렵다’라는 점에 초점을 두어 나온 답일 것이다. 장애인을 부모로 둔 아동이 당면할 어려움을 생각하며 그런 상황에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아동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응답일 수 있다. 장애인 가족에게 필요한 지원을 충분히 하지 않는 현재의 사회체제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속에서, 아동과 그 가족을 위한 ‘최선’은 다시 왜곡된다. 아예 가족을 형성하지 않기로 하는 선택이 최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같은 방식의 논리가 여기저기서 반복된다. 아이를 낳으려는 부모를 ‘이기적’이라고 하거나 ‘아이를 생각하라’며 말리는 말들이 있다. 비혼 여성의 출산을 두고 ‘아빠 없이 자랄 아이를 생각하라’고 한다거나, 가난한 가족이 아이를 낳으려고 할 때 ‘부모욕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난해 한 동성 커플의 공개적 출산 소식에 많은 사람이 환영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한편에서는 ‘아기가 불쌍하다’, ‘자식 상처받을 것 생각 못 하느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모두 아동을 위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 말 자체가 ‘당신의 아이는 앞으로 분명히 차별받고 불행한 인생을 살 것’이라는 일종의 저주처럼 작동한다.
태어나는 아동의 불행을 예견하는 이 거대한 집단적 상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태어나는 아동에게 차별받을 인생을 전망하는 행위 자체가, 현존하는 차별을 미래의 현실로 복제시키는 기제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의 차별은 바꿀 수 없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런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회에 면죄부를 주는 행위다. 이런 말들이 쌓이면서 사회는 차별이 사라지는―적어도 지금보다 나아지는―‘밝은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런 미래를 만들지 못하게 된다. 결국 ‘아동을 위한다’라는 말은 변명일 뿐, 불행한 미래를 그리는 집단적 상상이 알리바이가 되어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가.
아동과 그 가족을 차별로부터 ‘보호’한다는 것
‘무엇이 아동을 위한 일인가’라는 질문은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사건에서도 쟁점이 되었다. 트랜스젠더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을 때, 공문서상 성별을 변경하겠다는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여도 될까? 이에 대해 13년 전인 2011년 대법원은 ‘자녀의 복리’를 고려해서 그 신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았다.
성별 정정을 허용하게 되면 (…) 미성년자인 자녀는 취학 등을 위해 가족관계증명서가 요구될 때마다 동성혼의 외관이 현출된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다. 동성혼에 대한 찬반양론을 떠나 이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은 엄연한 현실이고,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적응 능력이 성숙되지 아니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미성년자인 자녀를 이러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친권자로서 또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기본적인 책무를 도외시하는 것이다.11)
“사회적 차별과 편견은 엄연한 현실”이므로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공문서상 ‘부’가 ‘모’로 바뀌는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대법원은 해당 사건에서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것이 해당 아동에게 실제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피지 않았다. ‘부’가 이미 사회적으로 여성으로 살고 있었으므로, 법적으로 성별 정정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겪는 취업 등 생활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것이 아동에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법원은 아동의 서류에 성별 정정의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는 일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두었다. 사회적 차별과 편견은 대법원조차 어찌할 수 없는 변화 불가한 상태라는 듯, “엄연한 현실”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무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로부터 11년 후 대법원은 다시 같은 질문을 마주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여전한 상황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아동을 차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미성년 자녀가 있는 부 또는 모의 성별 정정 신청을 불허할 것인지가 쟁점이 되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2022년 대법원의 응답은 달랐다. 아래의 결정문을 보자.
인간의 존엄성을 궁극의 목표로 하는 우리 헌법정신에 비추어 보면, 국가는 (…) 성전환자라거나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차별하는 쪽의 편견과 몰이해를 바로 잡기 위해 법률적·제도적으로 노력해야 할 의무를 부담함에도, 오히려 위와 같은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성전환자의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 정정을 불허하는 것은 성전환자와 그의 미성년 자녀 등이 사회적 편견으로 인하여 입을 수 있는 피해를 예방하여 가족생활의 안정을 보장하여야 하는 국가의 기본적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렵다.12)
이번에는 무력한 메시지 대신,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워야 하는 국가의 의무에 대해 말한다. “차별하는 쪽의 편견과 몰이해를 바로 잡기 위해 법률적·제도적으로 노력”하고, “사회적 편견으로 인하여 입을 수 있는 피해를 예방하여 가족생활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 의무”라고 말이다. 이 같은 대법원의 메시지는 조금은 다른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차별이 지금의 현실이더라도 국가는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러면 사회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아동을 차별로부터 보호’한다는 목표는, 차별을 ‘어쩔 수 없는’ 불변의 조건으로 설정하는 사회에서 실현될 수 없다. 차별에 맞서 싸우기로 할 때 비로소 아동과 그 가족을 차별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존엄하고 평등한 가족생활에 대한 권리
사회복지현장을 보면 ‘정상 가족’ 테두리 밖의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많다. 사회복지시설에서 생활한다는 건 가족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결과로 이해되곤 한다.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보면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사회적 취약함이 주로 가족 상황과 관련된다는 점을 방증한다. 개인의 삶이 가족이라는 조건에 따라 좌우된다는 뜻이다. 인권의 기본원칙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개인이 어떤 가족을 배경으로 가지는지에 따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혹은 태어날지를 결정하는 순간부터 불평등할 때가 많다. 가족이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까?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삶이 가족에 의해 크게 결정되는 현실은 사회보장제도의 한계를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사회적 공동 책임과 연대에 앞서 ‘가족의 기능’을 우선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사회보장의 단위도 개인이 아닌 가족 단위로 상정하여 개인을 가족에 종속된 위치로 구성한다. 이러한 틀 아래 법이 획일적으로 정한 가족 범위에서 부양의무자를 정하고, 부양의무자의 부양을 사회보장에 우선하는 ‘가족부양 우선의 원칙’이 작동한다.13) 사회보장기본법은 국가의 역할로서 개인의 행복한 가족생활을 보장한다기보다 “가정이 건전하게 유지되고 그 기능이 향상”14)되는 것을 목표로 둔다. 이로써 사회적 평가에 따라 ‘건전’하지 않거나 ‘기능’면에서 ‘정상’에 미치지 못하는 가족을 열등하게 위치 지운다.
헌법 제36조 제1항에 의하면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즉, 혼인과 가족생활에 대한 권리는 ‘개인’의 권리이며, 국가는 가족생활 안에서 개인의 존엄과 평등이 실현되도록 보장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가족의 모양에 맞추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가족의 모양이 다양해질 때 국가는 유연한 제도를 통해 가족생활을 보장하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가족이란 국가가 미리 정한 관계 안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을 유지해야 하는 억압적·도구적 단위가 아니라, 개인들이 자율적이며 책임감 있게 서로를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관계를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국가로부터 보장받는 제도로서 의미가 있다.
가족을 이유로 사회적 차별이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 것을 당연시하면서 만드는 사회복지 정책과 서비스는 자칫 차별을 영속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거대한 차별과 불평등 앞에서 무력해진 상태에서는, 포기하고 순응하는 어떤 행동이 ‘최선’인 양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은 엄연한 현실”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변명을 꺼내지 않는 우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양한 개인들이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족의 모양은 다채롭게 만들어지고 또 바뀐다. 그 모양이 어떠하든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가족은 소중하다고, 이 사회에 차별이 있다면 지금 우리가 그 현실을 바꾸고 있다고, 변화된 미래를 상상하고 말하는 가정의 달을 만들자.
※ 이 글은 글쓴이의 저서『가족각본』(창비, 2023)에 담긴 내용을 상당 부분 가져와 재구성하고 본지의 취지에 맞추어 추가 집필한 것임을 밝힌다.
| 미주 |
1) ‘혼혈아’라는 용어는 당시 ‘순혈’ 한국인과 대비되는 인종차별적 의미로 사용되었고, 이후 한국 사회는 다중의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를 대체해 왔다. 법·정책적으로 사용되는 ‘다문화가족’, ‘다문화 학생’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다문화주의의 의미를 반영하여 만들어진 용어인데, 이 역시 민족적 배경을 이유로 한 구분으로서 차별적 요소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면서도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한 채, 한국전쟁 후 태어나 극심한 차별을 받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혼혈아동’을 사용한다
2) “전국에 4만 성년 혼혈아의 고민”, 조선일보, 1966. 4. 28
3) 보건복지부, 국가별 국외입양현황(1958~2015); e-나라지표, 국내 입양아 수 및 입양 비율, https://www.index.go.kr/unity/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2708 (2024. 4. 16. 방문)
4)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Annual Report on Intercountry Adoption: Report of the Acticitives of the United States Central Authority under the Hague Convention on Protection of Children and Cooperation in Respect of Intercountry Addoption (Fiscal Year 2022), July 2023, 19쪽
5) 아리사 H. 오, 『왜 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 뿌리의 집, 2019, 200쪽
6) 위의 책, 195~196쪽
7) ‘추방’이란 표현은 피터 뭴러, “입양인들이 찾아낸 해외 입양의 10가지 사실”, 프레시안, 2022. 12. 2. 참조(덴마크 입양인 단체 ‘덴마크 한인 권리 그룹’에서 당시 해외 입양이 “‘혼혈’ 아동을 추방하는 것의 일환”이었고 “인종청소에 해당”한다는 의견 등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제출함)
8) 유엔아동권리협약 제3조 제1항(“공공 또는 민간 사회복지기관, 법원, 행정당국, 또는 입법기관 등에 의하여 실시되는 아동에 관한 모든 활동에 있어서 아동의 최선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아동복지법 제2조 제3항(“아동에 관한 모든 활동에 있어서 아동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9) 김호연 외 『장애인 모·부성권 증진을 위한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2018, 52쪽
10) “장애인들 결혼하고 잘 사는 건 꿈같은 얘기…출산, 말릴 수밖에”, 서울신문, 2019. 4. 18
11) 대법원 2011. 9. 2.자 2009스117
12) 대법원 2022. 11. 24.자 2020스616
13)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3조 제2항
14) 사회보장기본법 제6조(“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가정이 건전하게 유지되고 그 기능이 향상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월간<복지동향> 2024년 05월호(제3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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