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24-09-29   8533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를 말하다] 주한미군의 역사 = 여성인권 침해의 역사

“빚때문에 눈치봐야 하는 우리는 스스로 ‘담요부대’라 불렀어요”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를 말하다] 주한미군의 역사 = 여성인권 침해의 역사

안김정애 평화를만드는여성회대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대령의 보좌관인 하우스만 대위에게 대한민국의 육군 참모총장 감을 천거해 보라고 하면서 한 말이다(짐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하우스만 회고록], 한국문원, 1995, 164쪽).

아무리 신생국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국의 최고 통치권자라는 자가 미국의 일개 육군 대위에게 제 나라의 육군을 총지휘할 참모총장 후보를 천거하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은 외국군 주둔사로 점철된 이 나라의 역사에서도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외세 의존의 극치를 보여 준다.

주한미군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키고 유지시킨 물리적 기반이자 절대 규정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도 미군 철수 얘기만 나오면 보수든 진보든 자지러질 듯이 비명을 지른다. 평등한 한미관계는 불가능하다고 아예 못 박은 자들의 대미추종은 오늘도 계속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군에 의한 여성인권침해에 대한 기록과 목소리는 깡그리 무시되어 왔고, 그 단적인 예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동두천 시장과 시의회가 합작해서 벌이고 있는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의 철거다.

주한미군은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에서도 전례가 없는 몇 가지의 기록을 세우고 있다.

첫째, 역사상 가장 최장기간의 주둔군으로 기록되고 있다. 1945년 9월 8일에 이 땅에 첫 발을 디딘 후로 2024년 9월 현재까지 79년간 이 땅에 주둔하고 있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유사 이래 수많은 외국군대가 이 땅을 거쳐 갔지만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주둔한 외국군은 없었다. 임오군란 이후 들어온 청국 군대는 3년, 아관파천 직후 러시아 군사교관단은 1년 반,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3년,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한 중국군은 8년, 일제의 조선주둔군도 36년을 넘기지 못했다. 13세기 원나라가 100년 가까이 고려내정에 간섭했지만 주한미군처럼 상시적으로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킨 것은 아니었다.

둘째, 유사 이래 주둔 규모에서 최대이다. 미군은 한국전쟁 기간 중 최대 30만 명이 주둔한 것을 비롯해 80년 가까이 상시적으로 3만 명 가량을 주둔시켜 왔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파병된 중국인민지원군이 최대 135만 명에 달한 적도 있지만, 이것은 전쟁기간 중의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며, 일제의 조선 주둔군도 상시 병력으로는 2개 사단 4만 명을 넘지 않았다.

셋째,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병력 주둔의 필연적 결과로서 전 국토가 미군 기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전국의 명산 치고 미군기지가 들어서지 않은 곳이 없으며, 전국의 대도시 치고 미군이 주둔하지 않은 도시가 없다. 이처럼 전 국토를 기지화한 외국군은 우리 역사에 없었고, 외국에서도 그 예를 찾기가 어렵다. 일제의 쇠말뚝이 한반도 국토의 정기를 끊어 놓았다고 하지만 미군기지에 의한 국토의 황폐화는 이에 비할 바가 아니며, 미군이 전국 도처에 차지하고 있는 7,455만평의 기지와 훈련장은 일제의 조선주둔군 기지를 왜소하게 만들 정도이다.

주한미군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1일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에 의해 권리로서 한국정부로부터 무제한의 토지 공여를 받고 있다(한미상호방위조약 4조,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전세계 해외 주둔 미군 가운데 유일하게 사유지까지 무상으로 공여받고 있다.

넷째, 이 땅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1차 적이 우리의 형제자매인 동족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끌어 들여 동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래 1,300여 년 만에 재현된, 외국군을 매개로 한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단일민족임을 자랑해 온 우리 민족이 신라 이래 외국 군대와 한 편이 되어 동족의 다른 쪽을 철천지원수로 삼아 총칼을 겨눈 일은 없었다. 물론 원나라의 고려 침략 당시 몽고군과 고려군이 합세하여 삼별초군을 토벌한 동족상잔의 예가 있긴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부 반발세력을 상대로 한 국지전 수준이었다.

미국은 2차세계대전 종전 시 대일전 처리안으로 당시 연합국인 소련에게 한반도의 38선 분할을 제안했고, 소련은 별다른 이의없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전쟁주범인 일본이 분할되는 것이 아닌 한반도의 분할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미군의 진주는 소련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대소 응급조치’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전무한 가운데 졸속으로 취해진 것이었다. 3년간 지속된 미군정은 친일파 청산과 자주적인 통일독립정부 건설이라는 한반도인들의 열망을 처음부터 깡그리 무시한 채, 해방 후 자생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를 부정하고,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친일 보수세력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남한 단독정권의 틀을 만들어 나갔다. “미군정의 목표는 소련이 고무하는 국내 혁명의 조류를 저지할 ‘보루’를 만드는 것”(브루스 커밍스, (김주환 역) [한국전쟁의 기원(상)], 청사, 1986, 232쪽)이었다. 미국의 NSC48과 NSC68은 대소봉쇄정책안이었다. 당시 진주한 대부분의 미군은 “한국인은 열등 노예급”이라는 일본인들의 말을 더 신뢰했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시 미국이 후원하는 이승만 정권의 생존 능력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판단하고, 이승만 정권 보호를 위해 현장에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감독했다. 제주에서는 초토화 작전 진두지휘, 폭동 진압군에 대한 교육, 포로심문과 게릴라 수색을 위한 미군 정찰기 파견, 제주도 연안 완전 봉쇄, 국방경비대와 경찰전투원, 식량, 무기 등을 수송하였다. 여순에서는 좀 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을 하였는데, 순천 탈환 후 고문단이 작성한 진압작전은 4F(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전술로 알려졌는데, 이는 흩어진 반군을 찾아서-고정시킨 후-싸워서-끝낸다는 것으로, 14연대 반란 진압의 작전 수립 및 전술 전개의 지침이 되었다. 이 때도 역시 제주도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문단은 진압군측에 각종 무기• 탄약• 휘발유• 수송기• 정찰차• 식량 등을 무제한 공급하였다.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시 국가공권력에 의한 민간인집단학살의 과거사 문제와 이행기 정의는 현재진행형이다.

다섯째, 우리 땅에 미국 주소를 버젓이 갖고 있는 외국군이라는 괴이한 현실이다. 세계 최대의 해외 주둔 기지라는 평택 미군기지는 여의도 면적의 5배에 달하는 444만 평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 속의 ‘미국 도시’로서, 주한미군과 가족 4만 3천 명이 거주하고 있다. 학교와 주요 소매점, 은행 등 지원시설을 갖춘 이 곳의 모든 건물들은 용산 기지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소를 갖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록으로는 주한미군의 역사는 여성인권 침해의 역사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이는 여러 생존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된다.

▲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의 옛 성병관리소가 폐허로 남아 적막하다.이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 상대 성매매 종사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정부가 운영했다가 1996년에 폐쇄했다. 동두천시는 소요산 관광지 확대개발사업으로 성병관리소 건물을 철거할 계획이다. 그러나 참여연대, 정의기억연대 등 58개 시민단체는 최근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과거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으로 보존가치가 큰 근대문화유산”이라며 철거 계획에 반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지촌의 형성

주한미군 기지촌의 본격적인 형성은 1957년 7월 경 유엔군사령부가 도쿄에서 서울로 이전할 무렵 정부 부처인 보건사회부, 내무부, 법무부 장관 등 3개 기관장은 ‘유엔군 출입 지정 접객업소 문제 및 특수 직업여성(속칭 위안부)들의 일정 지역에로의 집결문제’에 관하여 논의를 갖고 위안부들을 일정 지역으로 집결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유엔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서울에 접객업소 10개소, 인천에 댄스홀 12개소, 부산에 댄스홀 2개소 등을 미군 위안시설로 지정하고, 미군과 한국 정부가 공동으로 성병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들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성병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기로 하였다.

보건사회부는 관리를 체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954년 2월 2일, 법률 제308호로 구 전염병예방법을 제정하고, 1957년 2월 28일부터 시행하였으며, 같은 날 대통령령 제1257호로 구 전염병예방법 시행령을 제정• 시행하였다. 구 전염병예방법 제8조 2항(특별시장 또는 도지사가 성병에 감염되어 그 전염을 매개할 상당한 우려가 있다고 인정한 자는 주무부장관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성병에 관한 건강진단을 받아야 한다)과 시행령 제4조 2항 3조(위안부 또는 매음행위를 하는 자 1주 2회)에 의해 기지촌 미군위안부들은 정기적인 검진을 강요당했다.

정부는 유엔에서 1950년 3월 21일에 체결된 ‘인신매매금지 및 타인의 매춘행위에 의한 착취금지에 관한 협약’에 가입하고, 1962년 5월 14일, 조약 제933호로 발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1962년 내무부, 법무부, 보건사회부의 공동지침으로 성매매업이 가능한 104개의 ‘특정지역을 설치 관리하였다. 이 때도 역시 구 식품위생법과 전염병예방법 및 시행령에 의한 위안부에 대한 정기적 성병검진이 의무화되었다.

보건사회부는 보건소를 통해 성병을 관리했는데, 보건소를 설치할 수 없는 지역에는 기타 의료기관에 성병관리를 전담하도록 대용진료소를 지정하였다. 위안부들은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면 보건소에 등록하고, 월 2∼8회 검진을 받아야 했다. 비감염자로 판명되었을 때는 ’건강증‘에 도장을 받고 영업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건강증을 압수 당했으며, 경찰은 보건사회부의 관리정책에 협조하여 건강증 없이 영업하거나 성병검진을 기피하는 여성들을 단속했다. 이후 정부는 위안부들을 ’지역재건부녀회‘에 가입시켜 등록하도록 하였다가 정부 주도의 재건국민운동이 해체되면서 위안부 등록은 자치회인 ’자매회‘가 담당하는 것으로 변경하였고, 보건증을 일원화된 카드제인 ’검진증‘으로 바꾸었다.

검진증을 발급받은 위안부는 매 주 검진을 받아야 했고, 감염자로 판명되면 낙검자 수용소로 보내져 강제치료를 받아야 했다. 등록과 성병검진을 기피하는 여성들에 대해 정부와 미군의 합동 단속이 수시로 실시되었는데, 정부 측에서는 보건소 직원과 자매회가, 미국 측에서는 S-5(민사과) 미군이 주로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보건소와 경찰이 주도하는 단속(이른바 ’토벌‘)과, 성병에 걸린 미군이 자신과 성매매를 한 상대여성을 지목하는 미군의 ’컨택‘(Contact tracing, 접촉자 추적조사) 등이 수시로 실시되었다. 이처럼 성병에 감염된 미군으로부터 상대방으로 지목된 위안부는 검진증 소지 여부와 상관없이 곧바로 낙검자 수용소로 보내져서 강제수용 상태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정부는 1969년부터 ’기지촌 정화운동‘을 추진하여, 1971년 12월 22일, 기지촌정화위원회를 발족하고, 1972년 2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인이 들어간 ’기지촌 종합대책‘을 발표하였다. 기지촌 정화운돈 중 ’성병관리정책‘은 성병교육과 의무적인 성병 검사, 엄격한 접촉확인 체계의 제정과 강화로 구성되었다. 미군이 그 숫자를 기억하였다가 의료 당국에 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은 가슴에 번호 또는 영어로 쓰인 명찰이나 보건증을 착용해야 했다.

1980년대 이후에도 보건사회부는 성병진료지침을 하달하여 위험집단을 중심으로 강제검진과 치료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내무부는 1984년 기지촌 주변 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외국군이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고 출국할 수 있도록‘ 환경을 쾌적하게 만든다는 취지가 포함된 기지촌 환경 개선 사업을 시행하였다.

미군 MP는 한국 경찰, 보건소 직원 등과 함께 단속을 나왔고, 정부는 위안부들에게 “일본한테 미군 뺏기지 말라”(엄00)고 교육했다.

미군에 의한 여성 살해사건

정부가 파악한 미군범죄건 통계는 1967년 SOFA 발효부터 2002년까지 총 52,000건으로, 미군과 군속 범죄 가담자는 총 5만9000명이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 추정은 총 100,000건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고(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이 가운데 미군에 의해 살해된 기지촌 위안부 살해사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윤금이 사건 외에도 수없이 많다. 그 중 가해자가 확인된 사건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아래의 사례는 미군의 범죄자 옹호와 불평등한 SOFA 규정으로 인해 가해자를 확인하지 못한 채 종결된 사건이다.

이 외에도 성폭행, 성추행, 폭행, 방화 사건은 부지기수이다.

생존 여성들의 증언

기지촌 위안부 피해생존 여성들은 미군의 폭행과 사망, 사기행각에도 한국과 미국정부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미군범죄를 직접 목격한 이 여성들은 직접 시신을 찾아내어 미 헌병대에 인계하고 미군에게 강력항의하기도 했다.

다른 한 건은 여성을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 쳐서 사망하게 한 사건이다.

미군은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들에게 마약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여성들은 한미군사합동훈련 시에도 동원되었다.

이 여성들은 스스로를 ‘담요부대’라고 불렀다.

미군은 성병관리소에서 직접 투약과 약제 통제를 하였다.

파주 선유리에 사시던 박00은 2012년 국가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던 우리에게 신신당부하셨다. “이왕 시작할 거면 같이 끝장을 보자. 확실하게 해라. 팔 걷어 부치고 독하게 해라. 이번에 온 길이 헛되지 않게 하라. 여성들이 수천명 죽어 나갔다” 박00은 2023년 7월에 영면에 드셨다. 이제는 안보라는 이름으로, 한미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내 몸이 미군에게 팔려나가고 폭력으로 멍이 들지 않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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