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철ㅣ동덕여대 사회복지학전공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실행위원
“……용답동 쉼터에 다녀온 다음날 복지국장에게 ‘희망의 인문학’을 건네면서 인문학 강좌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 그 덕분인지 서울시 노숙인 수는 지난 3년 간 20% 감소했다. 서울시에 다종다양한 노숙인 대책이 많지만 나는 희망의 인문학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 어느 도시도 인문학으로 노숙인을 줄이는 성과를 낸 곳은 없다.”
서울시장이 얼마 전 발간했던 책자의 한 구절이다. 희망의 인문학은 얼 쇼리스(Earl Shorris)가 미국에서 운영하였던 클레멘테코스가 시초라 할 수 있다. 중독자 등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철학, 역사, 예술 등 인문학 전반에 대한 강의와 자기성찰적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즉각적이고 실용적인 교육이나 정보보다는 보다 근원적으로 자기성찰과 자아존중감 증가를 통해 자립의지를 가지게 하고, 이를 통해 자립할 수 있도록 도모한다는 것이다. 초기에 얼 쇼리스의 인문학 강좌 과정은 큰 반향이 없었지만, 점차 유명해졌고 전 세계에 50개 이상의 과정이 운영되기도 했다. 한국형 클레멘테코스로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에서 성프란시스코대학이 2005년에 개설되었고, 2006년 하반기에 1기생 17명의 노숙인이 수료하였다. 이후 서울시가 노숙인에 대한 인문학 과정에도 재정적 지원을 시작하였고, 서울시 주도의 희망의 인문학 과정을 편성하여 시립대 등 대학과 연계하여 교수진의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시설에서 주관하는 희망과정과 대학에서 주관하는 행복과정, 대학특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좋은 프로그램이고 의미가 크다. 이 과정에서는 소수 인원에 대해서라도 교수가 정식 전공분야에 대해 수준 높은 강의를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노숙인에 대한 역량강화(empowerment)를 위해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우리나라의 민간 등 실천현장에서 이 과정을 위한 독자적 모금이나 자원활용을 통해서도 사업이 진행된 바 있다. 그리고 서울시가 이 과정에 재원을 투자하는 것도 반겨야 하는 일이다.
그래도 굳이 몇 가지 짚어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클레멘테코스와 같은 사업은 전형적으로 민간의 활동으로서 어울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공이 후원하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책을 홍보하고 싶은 나머지 민간에서 이미 하던 일을 공공이 먼저 시작했다고 하며 역사를 왜곡(?)하거나 공적을 가로채는 것은 곤란하다. 서울시가 희망의 인문학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한 것은 나쁘게 볼 일이 아니다. 다만, 이것이 민간이 먼저 추진해 왔던 부분에 대해 없던 것으로 사실과 다르게 왜곡해서는 곤란하다. 더 중요하게 짚어야 할 것은 공공이 특정한 문제에 대응할 때, 그 구조적 본질 부분에 대해 대표적이고 책임성 있는 정책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희망의 인문학은 좋은 사업이지만 저렴주택(affordable housing)의 부족과 부적절성에 기인하는 노숙문제의 핵심인 주거취약성에 대해 본질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국가들의 노숙문제에 대응하는 정책은 가장 핵심에 주거지원을 두고 지역사회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연계한다. 주거우선(housing first)이라는 원칙으로 전문가들과 지원현장에는 잘 알려진 정책방향이다.
우리나라에서 ‘노숙인등의복지및자립지원에관한법률’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공식적인 실태조사에서의 노숙인 수를 집계한 결과는 서울시의 노숙인이 2021년 2,600명에서 2024년 2,365명으로 10%가량 감소하였다. 같은 기간인 3년 간 전국의 노숙인 규모는 2021년 8,956명에서 2024년 8,008명으로 더 큰 비율로 감소하였다. 2021년 조사에서 서울의 노숙인 수는 전국의 29.0%였는데 2024년에는 29.5%였다. 상대적으로 서울시의 노숙인은 다른 지역보다 덜 감소했다. 그리고 다른 지역은 희망의 인문학을 운영하지 않았다. 서울의 노숙인이 많이 줄었고, 이는 희망의 인문학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이라 곤란하다. 물론 거꾸로 희망의 인문학을 하지 않아서 다른 지역이 노숙인이 더 줄어든 것도 아닐 것이다.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노숙생활이라는 위기상황에 처한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긍정적이다(물론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노숙인 수를 집계하는 통계방식이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지의 논란은 별개의 사항이다). 그리고 노숙인에게 역량강화를 위해 인문학 과정을 운영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하지만 노숙인 수가 희망의 인문학 때문에 감소하였다거나, (다른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것을 서울시장의 혜안 덕택에) 인문학 강좌가 서울시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정확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인식이다.
노숙문제에 대해 구조적인 주거문제를 간과하고 노숙인 개인의 인식과 자립의욕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곤란하다. 특히 사회문제에 대한 책임성을 담보할 공공의 인식이 그래서는 안된다. 이는 개인의 부적절한 인식이나 행동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게 한다. 그리고 자칫 개인에 대한 비난이나 혐오를 조장할 수 있다. 희망의 인문학을 통해서 몇몇 개인의 의욕과 자존감을 향상시키고 어쩌면 인생에서 큰 전환점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저렴주택이 부족하다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노숙인의 수도 줄어들지 않는다. 서울시가 희망의 인문학에만 집중해 정책의 홍보를 일삼다 보면 노숙인은 자활의지와 심리적인 태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된다. 여기서 조금만 몇 걸음 더 잘못 나가면 마치 군사독재시절 주거부정의 사람들을 무작정 납치하듯 가두어 정신을 개조시키려 했던 삼청교육대 방식이 된다. 인권침해적인 규제정책으로 잘못 나가지는 않는다 해도 노숙인에 대해 일반 사회구성원들의 혐오나 배제를 유발할 우려는 다분하다.
공공정책은 어렵다. 민간처럼 꽂히는(?) 한두가지 부분에만 집중하면 안된다. 선거라는 체계가 있으니 진행해왔던 정책의 특징이나 성과를 과장해 홍보하고 싶은 유혹도 커지겠지만, 사실을 호도해서는 안된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면 선진국답게(?) 공공은 책임 있는 정책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 책자의 문구처럼 “전 세계 어느 도시도 인문학으로 노숙인을 줄이는 성과를 낸 곳은 없다”. 그런데 서울시의 입장이 서울시는 이 어려운 것을 해냈다는 자랑일까봐 걱정스럽다.
월간 <복지동향> 2025년 12월호(제3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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