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규 _ 명지대 강사, 전 외교통상부 외교관
먼저, 군대 이야기. 군대 생활을 기억해 보면 언제나 바빴던 것은 아니었다. 말년에 가까울수록 짬이 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경우가 있다. 또 재수가 좋아 보직을 잘(?) 받으면 아주 한가하게 군 생활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군대에서는 아무리 한가한 시간을 많이 받더라도 특별히 의미 있는 일을 하기는 어렵다.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거나 텔레비전을 켜 놓고 멍하니 시청하는 일 말고는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왜일까? 말년 병장이 되면 꽤나 편해진다. 특별히 걱정할 일이 없다. 정확한 시간에 끼니가 나오고 잠 잘 시간에 맞춰 규칙적으로 잠자리에 든다. 말년이라서 느는 열외는 자유시간이 지루할 정도로 많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군대에서의 자유시간은 막연한 불안과 함께 한다. 왜일까?
두 번째, 삼성그룹 이야기. 우리 사회 일각에서 삼성그룹을 이야기하면서 “삼성은 노조가 필요 없다. 워낙 그룹차원에서 근로자들을 잘 챙겨주는데 노조가 왜 필요하겠는가”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이러한 생각에 도대체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군복무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불안이 함께하는 자유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지루할 정도로 많은 ‘자유’가 주어지지만 난 왠지 마음이 불안하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퀜틴 스키너는《Liberty Before Liberalism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에서 왜 군대에서의 자유가 ‘진짜 자유’가 못 되는지 설명한다. 현재의 통념에 따르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난 그 시간 동안은 ‘자유’로운 것이다. 하지만, 스키너는 이런 식의 자유 개념이 등장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서 근대 이후 자유주의가 승리하게 되면서 통념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스키너는 근대 영국에서 왕당파에 맞서는 의회파를 중심으로 등장한 ‘자유 국가’에 대한 신로마적(neo-roman) 이론을 소개하면서, ‘간섭 없는 것이 자유’라는 자유주의적 관념이 주로 왕당파 측에 의해 개발된 것이라 설명한다. 이러한 관념은 토마스 홉스도 고백하듯이 마키아벨리의 《리비우스 로마사 논고》를 통해 부활된 로마적 자유 개념 즉 ‘키비타스 리베라’ civitas libera (자유 국가)와 연결된 자유 개념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오직 자유 국가에서만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생각했는데, 홉스를 포함한 영국 왕당파는 국가 차원의 자유와 개인 차원의 자유는 서로 무관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고대 로마적 자유 개념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은 이미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나타났었는데, 《줄리어스 시이저》를 위시한 셰익스피어 희곡들에 흔적이 짙게 배여 있다. 이후 베이컨(Francis Bacon) 등이 마키아벨리의 ‘비베로 리베라’ vivero libera (자유로운 삶) 개념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끄집어냈고, 이러한 생각은 네빌(Henry Neville), 시드니(Algernon Sidney), 해링턴(James Harrington), 프라이스(Richard Price)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렇다면 ‘개인적 자유’의 전제가 된다는 ‘자유 국가’란 어떤 것인가?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 로마사 논고》에서 ‘자유 국가’를 ‘자신의 의지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로 개념 규정했다. 개인의 몸이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몸이 외부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아야 하기도 하지만(독립성), 몸에 탈이 나서 손과 발, 그리고 의지(마음)가 따로 놀아서도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국가는 전체 의지에 따라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는 국가이다. 국가가 하나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려면 ‘제멋대로’ 하려는 일부의 자의(恣意: arbitrariness)에 휘둘려서는 안 되며 모두의 ‘동의’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제임스 해링턴은 자의가 아닌 동의에 의해 단체가 행동하는 모습으로 유명한 두 소녀의 예를 든다. 두 소녀가 케익을 나눠 먹는다. 이 경우 어떻게 하면 양자가 합의를 볼까? 만약 한 소녀가 케익을 자르고 또 이 소녀가 그 케익을 분배한다면 다른 소녀는 이 소녀의 의지에 휘둘리게 되며, 이내 불만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 소녀가 케익을 자르고 다른 소녀가 케익을 분배한다면 두 소녀 모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합의를 통해 ‘자의’는 배제되고 ‘합의’가 이뤄지게 되는데, 이로써 이 두 소녀로 구성된 조직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해링턴은 이 케익 나누는 방식에서 ‘숙의’(deliberation)하는 손과 시행(execution)하는 손이 달라야 한다는 초기적 형태의 ‘권력분립’ 이론을 내놓기도 한다. 어쨌건 케익을 자르고 분배하는 방식을 잘 조정함으로써 어떤 소녀도 다른 소녀의 의지(자의)에 종속되지 않게 되었고, 모든 결과는 모두 자신의 결정에 의한 것이 되었다. 합의를 이뤄 하나의 행동을 하게 된 조직도 자유롭게 되었지만,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신의 몫이 정해진 각 소녀들도 자유롭게 되었다. 즉, 자유로운 조직 속에서 개인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대로 한 소녀가 혼자 케익을 자르고 분배한다면 ‘합의’가 이뤄지기 어려웠기에 조직이 자유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이고(하나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므로), 또한 다른 소녀는 이 소녀의 의지에 종속되므로 자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신로마적 이론가들은 노예들이 가지는 ‘자유 시간’이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주인이 어질거나 또는 오랫동안 집을 비워 ‘자유 시간’을 많이 갖는 노예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아무리 ‘자유 시간’이 많이 있더라도 그들은 주인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 그 주인이 그들에게 갑자기 이러저러한 명령을 내릴지 모르고, 또 언제 갑자기 돌아와 제멋대로 노예들에게 매질을 가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노예들은 ‘자유 시간’ 중에도 불안을 느끼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만의 일에 몰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군대에서의 ‘자유 시간’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군대라는 조직 속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지휘관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가한 것도, 또 갑자기 바빠지는 것도 모두 내가 아닌 타인이 내린 결정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군대의 ‘자유 시간’은 그리 자유로운 시간이 못되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는 것을 고대 로마법에서는 ‘obnoxius’라 불렀다. 앞에서 말한 삼성그룹의 예가 바로 이 ‘obnoxius’의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삼성그룹의 직원들이 만일 좋은 복지혜택을 받는다면(삼성그룹의 복지수준이 실제로 높은지도 의문이지만), 이것은 자신들이 노동조합에 참여해 확보한 것이 아니라(삼성그룹은 무노조 원칙으로 유명하다) 경영진의 선의(善意)에 의한 것이다. 언제 그런 선의가 철회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노예의 자유와 노조 없는 삼성직원들의 복지 모두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토마스 홉스와 같은 왕당파 이론가들은 규제도 규율도 많은 공화국보다는 자유시간을 많이 주는 왕국, 제국이 더 자유로운 것 아니냐고 유혹했다. 법이 끝나는 곳에서 자유가 시작되는 것 아니냐면서 법의 범위만 줄여주면 될 것 아니냐고 유혹했다. 이러한 유혹은 이후 계속되었고, 특히 18세기 영국 공리주의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자유에 대한 주류적 개념이 되었다. 이와 함께 신로마적 자유 개념은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스키너의 작업은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현재 주류적 자유 개념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에 의해 널리 유포되었는데,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저작이 바로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이다. 이 저작은 거대한 조직 특히 거대한 정부 조직은 사람들을 종속시킬 것이라며 우려한다. 정부는 작아지고 대부분의 것이 시장의 자유경쟁에 맡겨질 때 사람들은 특정 의지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로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시장을 반대하는 급진파, 공산주의자들도 만일 시장이 없이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한다면 어떻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단을 찾을 수 있겠는가? 국가에 밉보여도 국가를 비판하는 자신들의 글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시장’ 때문이지 않냐는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은 하이예크와 함께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알려져 있지만, 솔직히 《자본주의와 자유》는 신로마적 관점에서 읽어도 꽤나 잘 읽히는 저작이다. 미국의 정부지출(연방, 주, 지방정부 통틀어)이 1956년에 국민소득의 26퍼센트였던 것이 1982년에는 39퍼센트까지 증가했는데, 이렇게 정부부문이 너무 커지는 것에 대해 프리드먼은 우려한다. 즉, 국민들의 삶이 정부에 너무 종속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인데, 이러한 우려는 일면 타당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이 독점적인 대기업, 대자본에까지 미치지 않다는 점은 역시 문제가 있다. 한국의 경우 많은 사람들의 삶이 재벌기업들에 의존해 있다. 이른바 재벌총수들은 전근대적인 지배구조를 통해 자의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이 걸려있는 대기업들을 통제하고 있다. 하이예크와 프리드먼이 이러한 독점적 대기업의 문제에까지 우려한다면 그들의 생각을 ‘신자유주의’라는 말로 간단히 재단해버릴 일이 아니다. 거대한 국가, 거대한 기업에 우리의 삶이 의존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와 자유》에는 이러한 우려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사회학자인 폴 스타(Paul Starr) 교수는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제어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Freedom’s Power 자유의 힘》에서 근대에는 국가권력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것이 자유 확보를 위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으며, 자본의 권력이 막강해진 20세기 이후에는 자본권력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것이 자유 확보를 위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자유 확보는 다른 한편 제어-통제를 의미한다는 것, 즉 자유에는 언제나 제어-통제가 따른다는 것이다. 자유를 이렇게 이해한다는 점에서 폴 스타는 ‘규제-통제-제어가 없는 것이 자유’라는 식의 (신)자유주의적 자유 개념보다는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의미의 신로마적 자유 개념에 가깝다고 하겠다. ‘타인의 의지’를 통제, 제어함으로써 나의 자유가 확보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폴 스타의 생각과 하이예크-프리드먼의 생각을 비교해 설명하자면, 폴 스타의 경우엔 20세기 이후 대자본, 대기업의 등장이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법 등을 통해 이러한 자본권력, 기업권력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하이예크나 프리드먼은 아예 이러한 대자본, 대기업의 등장을 막으려 하거나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이들의 생각은 불가능한 것을 꿈꾸거나 아니면 문제를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물론, 작은 정부와 소규모 자본권력이 있는 곳에서 개인들이 큰 자유를 누릴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개인들이 이들 권력에 종속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인을 예속시킬 위험성이 있는 권력이 없는 곳에서 개인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개인을 예속시킬 위험성이 있는 권력이 제어되고 통제될 경우에도 개인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퀜틴 스키너가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에서 설명하는 자유의 조건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이미 존재하는 권력의 경우, 이에 대한 통제와 제어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는 점에서 자유의 조건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고 하겠다. 밀턴 프리드먼의《자본주의와 자유》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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