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호] 서평 5_보편주의적이고 절차주의적인 정의를 넘어서

서평: 보편주의적이고 절차주의적인 정의를 넘어서

한승완_국가안보전략연구소


악셀 호네트, [정의의 타자], 문성훈, 이현재, 장은주, 하주영 옮김 (나남, 2009)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의 전통을 계승하며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활발한 사회철학적 논의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저작이 [인정투쟁]과 [물화]에 이어 세 번째로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었다. ‘실천철학 논문집’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하나의 주제를 두고 체계적으로 서술된 저작이라기보다는 주로 1990년대에 발표된 논문들의 모음집이니만큼,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탐색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 주제를 일별해보면 현 단계 사회철학의 과제 및 새로운 의미지평을 개명(開明)하는 사회비판의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개별적 인간의 특수성에 대한 배려의 문제, 주체에 대한 비판 이후의 개인적 자율성, 가족의 문제, 인권정치의 문제, 듀이의 민주주의론이 갖는 현재적 함의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현대 도덕철학과 사회․정치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주제를 관통하여 하나의 중요한 철학적 동기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데, 그것은 실천철학이 그동안 정의의 문제에 집중해왔던 것을 벗어나 ‘좋은 삶’의 조건에 대한 논의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바로 이러한 시도를 통해 특히 보편주의적이고 절차주의적인 정의관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관점을 확보하고자 한다.

우선 그는 현재의 서구에서 사회철학의 현 상황을 진단하며, 도덕철학이나 정치철학과 구분되는 사회철학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실질적인 사회철학적 반성은 루소의 문명비판에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사회철학이 자신의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은 일차적으로 근대의 발전이 낳은 각종 병리적 현상들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즉 “사회철학은 무엇보다도 잘못된 발전과정 또는 장애, 즉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잘못된 사회적 발전과정을 규정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24) ‘사회적 병리현상’은 곧 사회구성원들이 저마다 ‘좋은 삶’을 영위하는 데 사회적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여러 사회철학적 논의를 통해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진단되어왔던 것들은 ‘분열’, ‘물화’, ‘소외’, ‘허무주의’, ‘공동체 상실’, ‘탈주술화’, ‘시장화’, ‘집단적 노이로제’와 같은 범주들이다. 이것들은 단순히 정의원칙의 훼손에로 환원될 수 없는 성질의 장애들이다. 이것들을 사회적 장애와 병리현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바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삶에 대한 전제가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점에서 사회철학적 논의는 성공적인 삶의 조건은 어떤 것인가라는 척도에 관한 반성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물론 사회적 병리현상을 병리로 진단할 수 있게 해주는 이러한 평가척도의 내용에 대해 다양한 입장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호네트는 적어도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주어진 가치와 이상에 근거하므로 비록 역사적으로 제한된 타당성을 갖는다하더라도 ‘약한 형식적인’ 평가척도에 대한 반성적 논의의 성공 여부에 사회철학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본다.

사회철학이 이제는 정의보다는 ‘좋은 삶’의 조건에 대한 논의에 집중해야 한다는 호네트의 입장은 하버마스류의 정의의 관점이 갖는 보편주의와 절차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로 나아간다. 먼저 보편주의적 정의관, 즉 평등이라는 도덕적 관점의 보완은 이 책의 제목을 부여한 「정의의 타자」라는 논문에서 중심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하게 시도된 탈근대론(posmodernism)의 윤리에서 핵심적 동기는 ‘특수한 것’, ‘이질적인 것’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바로 칸트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하여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만인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는 근대의 보편주의적 도덕이론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호네트가 현대 사회철학에서 갖는 독특한 위상은 자신의 사회비판이론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이러한 탈근대론의 도전을 적극적으로 소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스승인 하버마스가 ‘언어철학적 전회’를 통해 사회비판이론의 질적 비약을 이뤄냈다면, 호네트는 다양한 유형의 탈근대론적 논의와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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