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1999년 07월 1999-07-01   1587

서해 교전사태와 도전받는 햇볕정책

대북포용정책이 그래도 전쟁막는 현실적 대안

정전협정 2조 13항 b목은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서해 5도를 유엔군 관할로 명기하고 있지만 해상경계선을 설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서해 일대의 해상경계선을 둘러싸고 남북한은 근본적 갈등의 씨앗을 안고 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진행된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 불가침선에 대해 협상할 때 북측은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을 서쪽으로 연장한 선을 불가침선으로 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남북협상 결과 ‘남북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에서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해온 구역으로 합의한다”고 약속한 바 있다. 북한은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계속 논의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합의서의 약속은 휴짓조각이 돼버리고, 남북군사공동위원회도 가동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서해 5도 일대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확정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해 5도 일대의 해상분계선은 남북이 합의하여 새로운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는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된다.

서해 5도 일대에서 남북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북한이 73년 12월 1일 군사정전위에서 “서해 5도 도서 주변수역은 북한의 관할 수역이며, 이들 도서 자체가 정전협정에 명기된 대로 유엔군 통제하에 있음을 인정하나, 그 주변수역을 통제하는 북한의 사전승인을 받아서 통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북한은 북방한계선을 월선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서해사태’라고 한다. 북한은 1973년 서해사태 이후 매년 연평균 40차례씩 북방한계선을 월선했다고 한다. 특히 1996년 4월부터 7월까지 북한이 북방한계선을 월선한 것을 계기로 국회에서 북방한계선의 성격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북한이 서해상의 북방한계선을 월선한 것은 문제삼지 않고 4·11총선 직전의 북한군이 판문점 일대의 군사시위를 과장한 것은 선거를 겨냥한 것이라는 비판에 이양호 국방장관은 1996년 7월 16일 “북한함정이 북방한계선을 월선하여도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다”고 밝혔다. 다음날 국방부는 “북방한계선이 정전협정상 법적 효력이 없다는 사실을 적시한 것일 뿐 북한 함정이 이를 월선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며 이양호 장관의 말을 해명했다. 국방부의 이와 같은 논리에 비춰보더라도 정전협정에서 북방한계선의 성격은 대단히 모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유엔군사령부는 1989년 “북한 함정들이 도발적 행위를 자행하지 않는 한 그들 북한 함정들이 북방한계선을 월선하는 것은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서해교전 사태의 원인에 대한 시각

이처럼 정전협정의 불안정성 때문에 서해 5도 일대는 정전협정 유지의 취약고리가 된다. 서해안 교전사태는 이와 같은 정전체제의 불안정성을 배경으로 발생한 것이다. 서해교전 사태가 생기기까지 북한의 의도에 대한 일곱가지 분석은 이렇다.

첫째, 단순한 꽃게잡이 과정에서 북한 어선이 월선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마다 6월경에 북한 어선이 고기잡는 과정에서 월선하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한국 해군의 경고에 의해 되돌아갔다. 이번 경우에는 한국측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되돌아가지 않았다는 데서 어로활동 이외의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가 밝힌 성명에서는 6월 4일 한국군이 북한 영해를 침범해서 북한 경비정이 순찰을 강화한 것을 한국측이 북의 도발을 유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측이 6월 4일 북한 영해를 침범한 사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6월 4일 이후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단순 꽃게잡이가 교전으로 확산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둘째, 서해 5도 일대를 분쟁수역화해서 북미협상에서 새로운 이슈를 제기하기 위한 것이 북한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페리 방북 이후 북한이 새로운 대미 협상카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목적으로 무력충돌을 염두에 둔 계획적인 월선을 시도했다고 보기에는 교전 이후 북한의 태도를 볼 때 충분하지 못하다.

셋째, 북방한계선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다. 앞서 밝힌 것처럼 북한은 73년 이후 지속적으로 북방한계선에 대하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북한이 북방한계선을 쟁점화시키는 데는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것이 교전의 결과인지 처음부터 의도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판단하기 힘들다.

넷째, 김대중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시험하고, 조성태 국방장관 취임 후 한국군의 작전태세를 점검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다. 특히 6월 21일 차관급회담에서 북한이 이산가족 문제를 다루는 것을 지연시켜 남북대화의 속도를 조절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비료를 우선 받고 서해교전을 이유로 이산가족 문제를 지연시키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다섯째, 북한의 내부 결속용이라는 시각이다. 북한은 98년 12월 2일 인민군 담화 이후 작전계획 5027-98에 의한 미국의 공격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선전해왔고 나토의 유고공습을 작전계획 5027의 실험이라고 보고 있다. 북한이 『로동신문』과 『중앙통신』을 통해 서해교전사태를 집중보도하고 있는 점에 비춰볼 때 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으나 서해교전에 대한 결과론일 수도 있다.

여섯째, 한국정부의 충돌식 밀어내기 공격이 사태를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서해교전은 북한의 북방한계선 월선, 한국의 신중한 대응, 한국 여론의 비등, 한국의 충돌식 공격, 북한의 기관총사격, 한국군의 함포사격 등으로 상승돼온 점에 비춰볼 때 이러한 시각은 타당성이 있지만 6월 7, 8일경에 북한의 경비정이 월선한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일곱째, 고관부인 옷사건, 파업유도 발언 등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정부가 북풍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이는 분단 상황속에서 남북문제와 한국 국내문제가 언제든지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분석이다. 즉 분단현상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음모론으로 대체하는 발상에 불과하다. 특히 서해교전으로 김대중정부의 햇볕론에 대한 도전이 거세지면서 김대중정부의 기반이 도전받는 상황을 고려할 때 적절치 못한 분석이다.

그렇다면 서해교전사태는 왜 발생했으며 북한의 의도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서해교전사태는 서해5도 일대의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한 남북의 정치적 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북한의 정치적 시위가 한국측의 위기관리와 예방능력의 부족으로 군사적 충돌로 비화된 사건이라고 성격규정할 수 있다. 북한은 서해 일대에서 제한된 분쟁이 일어날 경우 북방한계선 문제를 비롯한 정전체제의 불안정성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월선을 자제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북한의 의도를 잘 살펴야 할 점은 북한이 서해일대의 고강도 분쟁을 기획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북한군 수뇌부가 교전 이후 “서해 함대에 남한측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한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사실에서도 북한은 확전의 의사가 없었던 점이 감지된다. 서해교전사태로 보수세력들은 김대중정부의 대북포용정책에 중대한 도전을 하고 있지만 대북포용정책은 서해 5도 일대의 화약고에서 뇌관을 제거하는 유일한 정책이다.

김창수 민화협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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