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과 문제의식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법관의 재판상 독립은 국민의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침해해서는 안 될 헌법적 가치다. 이때의 ‘독립’은 법원 외부로부터의 독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법원 안으로부터의 독립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법원 내부의 권력에 의해 재판의 독립이 침해되는 사례는 반복되었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재판을 신영철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이 특정 재판부에 ‘몰아주기 배당’을 하고, 이메일 등을 통해 재판 진행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한 위헌적 행태가 드러나면서 당시 대법관이었던 신영철에 대한 사퇴 촉구는 물론,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된 법원 조직의 관료화·서열화 해결을 위한 구조적 법원개혁 요구도 빗발쳤다. 그러나 법원은 자정의 기회를 외면했고, 신영철 대법관은 사퇴 없이 임기를 마쳤다.
시민사회의 강력한 개혁 요구에도 수십 년 동안 형성되어 온 한국의 관료적 사법행정 구조는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대법원장은 법원조직법에 따라 판사에 대한 인사, 사법 정책 등 사법행정의 모든 것을 관할하는 사법행정 총괄권을 갖지만, 대법원장 1인이 독점한 권한을 감시·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없다. 이러한 ‘제왕적’ 권한은 대법원장의 뜻에 따라 법원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법원행정처는 상명하복의 관료 논리를 체화한 ‘관료 판사’들을 양성하며 대법원장의 권한 행사를 뒷받침했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로 대표되는 사법행정 권력은 법관과 재판의 독립을 보장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법관과 재판의 독립을 침해하는 힘으로 작동했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사법행정의 구조적 병폐는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로 이어졌다.
2017년 3월 6일, 양승태 대법원의 ‘법관사찰 블랙리스트 의혹’이 언론보도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당시 이탄희 판사는 법원행정처가 법원 내부 학회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추진 지시를 내렸다고 폭로했다. 법원행정처로부터 ‘판사 동향 리스트’ 관리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는 대법원장이 인사권을 남용하여 법관의 활동을 감시하고 법관의 양심과 독립성을 억압한 중대 사건으로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왔다.
주요 활동 경과
참여연대는 ‘법관사찰 블랙리스트 의혹’ 폭로 직후부터, 독립적이고 투명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이 구성한 진상조사위원회는 법원행정처의 거부로 핵심 물증에 대한 조사를 하지 못했고, 법원행정처의 국제인권법연구회 탄압 사실 외에 ‘법관 블랙리스트 문건’ 존재 여부와 양승태 대법원장의 관여 의혹에 대해서는 진상을 밝히지 않고 활동을 종료했다. 이에 참여연대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약칭 민변)과 함께 법원의 ‘셀프 조사’ 결과를 비판하고 공개의견서 제출 등 전면 재조사를 요구했다.
이후 양승태 대법원장의 퇴임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취임 이후 2차 진상조사가 진행되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법관사찰 책임자들의 혐의가 일부나마 드러났다. 사법행정권을 쥐고 있는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가 법관의 성향과 행적을 조사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등 드러난 사실만으로 법관과 재판의 독립을 침해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이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판단 하에 2018년 1월 29일, 참여연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 임종헌 전 차장, 이민걸 전 기획조정실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고발을 위해 모집한 ‘천인공노 시민고발인단’에는 닷새 만에 1,080명이 참여하며, 위헌·위법적 법관사찰 행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5월 25일,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진행한 3차 진상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사법농단’이 본격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법관 사찰은 물론이고 양승태 대법원이 추진해 온 상고법원 도입 목표를 달성하고자 특정 재판들을 청와대와의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전교조 법외노조, 과거사 국가배상, 쌍용차 정리해고, KTX 승무원 해고 사건 등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로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대법원 판결들이 박근혜 정권과의 거래 대상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법농단 사태의 책임과 원인을 밝히고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법원행정처와 판사들이 어떤 자료를 만들어 무슨 일을 했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했다. 그러나 법원은 세 차례 진행된 진상조사의 결과보고서와 관련 문건들을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참여연대는 언론사와 함께 법관 통신망 ‘코트넷’에 공개된 1~3차 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 전문과 사법농단 관련 문건들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법원에 자료 공개를 요구하면서 3차 진상조사단이 조사한 404개 문건을 정보공개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업무의 공정한 수행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한다’며 문건 공개를 끝내 거부했다. 이후 참여연대가 정보공개소송을 제기하여 1심에서 승소했으나, 이어진 2심에서 원심 판결을 취소하고, 대법원도 심리불속행으로 기각하면서 법원의 문건 비공개 처분은 결국 유지되었다. 언론을 통해 이미 공개된 문건인데도 시민에게만은 공개하지 않겠다는 법원의 기만적인 판결이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10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이하 시국회의)’를 구성하고, 대법원에 검찰 수사 협조와 피해자 구제 대책, 법원행정처 개혁을 포함한 법원 개혁 방안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시국회의는 피해자 증언대회와 고발대회 등 사법농단의 실태를 알리는 활동을 이어갔고, 참여연대와 민변은 유엔 인권이사회 특별보고관에 공동진정서를 제출하며 국제사회에도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관심과 대응을 촉구했다.
검찰은 고발 후 6개월 만에 수사에 착수했지만 법원은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을 약 90% 가까이 기각했다. 당시 통상의 압수수색영장 인용률이 약 90%에 달했던 것에 비교할 때 법원이 조직 보위를 위해 과도하게 영장을 기각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시국회의는 양승태 사법농단에 대한 공정한 사법처리를 위해 특별영장전담법관과 특별재판부 구성, 국민참여재판을 포함한 “양승태 사법농단 재판 특례법” 통과를 국회에 촉구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과 법원이 반대하고,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도 적극적인 협의를 진행하지 않아 특별재판부 설치는 좌절되었다. 검찰은 수사 끝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포함해 총 14명의 전현직 법관을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하고, 66명의 비위법관 명단을 법원에 통보했다. 시국회의는 비위법관들에 대한 징계를 촉구하면서, 해당 법관들의 명단과 징계 현황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법원은 또다시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비공개 처분을 내렸고, 결과적으로 징계 처분을 받은 것은 11명, 최고 징계 수위도 정직 6개월에 그쳤다.
참여연대와 민변은 법원이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심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 식구 감싸기’식 재판을 우려해 “두눈부릅 사법농단 재판방청단”을 모집해 2019년 5월부터 12월까지 13차례에 걸쳐 누적 134명의 시민들과 함께 재판을 방청했다. 법원에는 시민이 감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사법농단 사태의 책임자 징계·처벌과 재발 방지를 위한 시민적 공감대를 확대해가는 활동이었다. 이후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판결비평 사법농단 특집’을 통해 판결 내용을 시민의 눈높이에서 비평하고, 사법농단 관여 판사인 ‘임성근 판사 1심 판결 함께 읽기 모임’을 통해 시민들과 함께 사법농단의 위험성을 확인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외에도 시국회의는 사법농단 관여 법관의 파면을 위한 법관 탄핵소추 촉구 행동을 이어갔다. 검찰은 헌정사상 최초로 전직 대법원장 양승태를 구속기소 했지만, 막상 주요 피의자들과 공범 관계에 있는 차한성·권순일 전 대법관 등은 제대로 수사·기소하지 않았다. 법원 역시 사법농단 관여 법관에 대한 재판에서 무죄 등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했다. 때문에 시국회의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위법·위헌적 행위에 대한 민주적 견제 차원에서 국회에 법관 탄핵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2018년 10월과 2019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권순일, 임성근 등 총 16명에 대해 “사법농단 관여 법관 탄핵소추안”을 공개 제안하고, 기자회견·국회의원 면담·피해자 단체의 24시간 릴레이 농성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사법적폐 청산 문화제·신문광고·탄핵촉구 엽서 서명 캠페인 등을 통해 사법농단 관여 법관 탄핵을 위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아냈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20대 국회는 단 한 건의 탄핵소추안도 발의하지 않았고, 21대 국회가 개원한 이후에야 사법농단 사태의 최초 고발자인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중심으로 임성근 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만을 발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2021년 2월 4일, 이 탄핵소추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헌정사 최초의 법관 탄핵소추가 이뤄졌다. 그러나 각계의 탄핵소추안 인용 촉구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 과정에서 임성근이 법관 임기만료로 퇴직했다는 이유로 임성근 탄핵심판청구를 각하했다. 탄핵사유가 매우 중대하고 혐의가 구체적이었지만 헌법재판소가 사법농단에 사실상 면죄부를 준 것이다.
참여연대 등 시국회의 단체들은 피해자 구제와 재발 방지를 위한 사법개혁 운동도 다양하게 진행했다. 2018년 7월에는 “사법농단 특별법 제정 공청회”를 통해 사법농단 피해자 구제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고, 2019년 1월 참여연대와 민변은 “사법행정개혁에 대한 의견서”를 통해 △실질적 권한을 가진 합의제기구(사법행정위원회) 설치, △법원행정처 탈판사화 명시, △고등법원 부장판사 폐지 등 3대 개혁과제를 발표했다. 2020년 1월에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을 통해 발의하기도 했다. 이 개정안에는 법원행정처 폐지 후 사법행정 권한을 비법관 위원을 포함한 합의제기관 ‘사법행정위원회’에 이관하고, 서열식 인사제도의 정점으로 꼽히는 고법 부장판사직을 폐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러한 활동으로 2020년 3월, 국회에서 고법 부장판사직 폐지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피라미드식 인사 제도’가 일부 개선되었지만, 사법행정 권한 분산을 위한 법개정은 끝내 이뤄지지 않아 사법농단 이후에도 여전히 법원 내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은 유지되고 있다.
성과와 의미
2017년 사법농단이 세상에 드러난 후 참여연대는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7년이 넘도록 국회는 단 1명의 법관에 대해서만 탄핵소추안을 발의했고, 특별재판부 설치를 위한 특례법과 피해자 구제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외면했다. 법원도 참여연대가 정보공개청구한 ‘사법농단 문건’과 ‘비위법관 명단과 징계 현황’을 비공개 처분하며 더 큰 불신을 초래했고, 재판에 넘겨진 사법농단 관여 법관들 중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다수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제 식구 감싸기’로 일관했다. 책임자는 처벌을 면하고 사법개혁은 추진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높아질 수 없었다.
하지만 참여연대는 이 과정에서 시민들과 함께 여러 ‘최초’들을 만들어 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고발은 헌정사 최초의 전직 대법원장 구속기소로 이어졌고, 법관 탄핵을 위한 끊임없는 요구는 헌정사 최초의 법관 탄핵소추안(임성근) 국회 통과로 이어졌다. 법원조직법 개정 요구를 바탕으로 고법 부장판사직이 폐지되는 등 법이 일부 개정되기도 했다. 모든 성과들은 사법개혁을 향한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8년 9월, 사법농단 해결을 촉구하는 신문광고 게재를 위한 모금에 3,535명이 참여했고, 법관 탄핵 운동 과정에서 진행한 두 차례의 시민서명에는 각각 6,550명(2018년 10~11월)과 7,724명(2019년 2~3월)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임성근 법관 탄핵소추안 발의 이후, 국회의원에게 본회의 찬성 표결 요구 이메일 발송 캠페인에는 2주 동안 2,862명이 참여했다. 시민행동에 대한 참여 열기는 사법농단 사태의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시민들의 의지를 보여줬다.
참여연대는 미흡한 책임자 처벌과 사법개혁 입법의 과제를 놓치지 않고 감시와 기록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법농단 그 후, 사법개혁 어디까지 왔나」 이슈리포트를 2020년과 2024년 두 차례 발행하며 책임자 처벌 현황과 사법개혁 이행 현황을 기록했다. 이를 통해 법원행정처 폐지 및 합의제 사법행정기구 설치, 법원행정처 탈판사화를 위한 상근법관 인원 축소 등 법원과 국회가 이행해야 할 사법개혁 과제를 제안하고, 사법농단 재발 방지와 민주적 법원을 위해 사법개혁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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