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다의 추억
글 정현백 참여연대 공동대표
1977년 말, 나는 서독 에큐메니컬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서 도착한 재단의 어학 학교에서 마리아와 닐다를 만났다. 이 재단은 세계기독교협의회(WCC)가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오랜 개발 지원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부패, 독재 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현실을 타개하는 방안으로 제3세계를 위한 비판적인 엘리트를 양성할 것을 총회에서 의결하고, 이를 (교회세로 인해) 탄탄한 재력을 지닌 서독 교회에 일임하면서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대략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 온 100여 명의 장학생이 있었다. 어학 코스 이후에는 각 도시로 흩어져 공부하였지만, 1년에 두 번, 즉 총회와 크리스마스 휴가에 모여 장학회의 주요한 사안을 함께 토론하고 의결하였다. 또한 장학 재단은 대륙별로 학생 대표를 선발하여 장학생 선발 위원회, 인사 위원회, 이사회 등에 참석하고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었다. 제3세계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직접 체험하고 돌아가라는 취지였다. 우리를 관리·감독하는 장학 재단의 실무자들은 누릴 수 없는 막강한 권한이었다.
이 때 나는 각지에서 온 제3세계인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마리아는 칠레 출신의 23살의 망명객이다. 그녀는 14세부터 감옥 생활을 했는데, 앰네스티가 빼내어 독일 장학재단으로 연결해 주었다. 풍만한 가슴, 새빨간 립스틱과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과시하던 마리아는 늘 수업이 시작된 지 15분이 지나면 화려한 긴 치마를 펄럭이며 나타났다. 그녀가 노총각 독일 선생의 관심을 끌려는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하였다. 그녀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사회주의자인지 여부를 물었다. 감옥 생활을 통해 각인된 이념적 이분법에 따라 그녀에게는 사회주의자만이 상대할 만한 인간이었다. 독일어가 늘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던 나였지만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나는 그녀를 가르칠 결심을 하였다. 나는 한국 음식을 해준다고 그녀를 꼬드겨 저녁이 되면 우리 층 공동 부엌으로 불러들여 독일어 공부를 했다. 그러나 3~4회 만에 나는 손을 들었고, 그녀는 결국 정관사 der, des, dem, den을 외우지 못한 채 어학 코스를 끝냈다. 마리아는 정서적으로 불안했고, 서독 생활에의 적응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녀를 보면서 나는 군부독재가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할 수 있는가에 전율하였다.
아르헨티나의 노동신문 기자 출신인 닐다는 한쪽 눈이 거의 흰자만 드러났다. 그녀의 발가락은 심한 상처와 더불어 뒤틀려 있었다. 잔혹한 고문의 산물이었다. 스웨덴계인지라 친척들과 앰네스티의 도움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리아와 달리 그녀는 명민했고, 자주 결석을 했지만 수업을 잘 따라왔다. 주로 아르헨티나 망명자를 중심으로 정치 활동에 열심인 것 같았다. 그녀가 간혹 터뜨리는 호탕한 웃음 그리고 파티에서 열정적으로 춤출 때 날리는 그녀의 긴 머리는 내게는 아직도 사진 속의 한 장면처럼 강렬하게 남아 있다.
닐다와 마리아 같은 대다수 남미 출신 장학생들을 대하면서, 나는 증오해 마지않던 독재자 박정희에게 감사하고픈 심정이었다. 물론 어학 과정을 함께한 고 최재현 선생(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은 늘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에 쫓기는 꿈에 시달린다고 불평하였지만 말이다. 굳이 말하자면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군부독재는 한국의 인권탄압과는 비견할 수 없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어학 시험 합격 후 대다수의 장학생이 박사과정 지도 교수를 찾고, 어떻게 성공적으로 학위를 끝낼 것인가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닐다는 비첸하우젠(Witzenhausen)에 있는 열대농업전문대를 선택하여 떠났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 바에는 아프리카에 가서 사회운동을 할 요량이었고, 그러자면 열대농업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결정은 내게는 충격이었다.
당시 서독에는 반독재 활동으로 학위가 끝나고 귀국하지 못한 선배들이 많았다. 그들의 만류 덕분에 우리 세대는 학위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으니, 지금의 안정적인 삶과 교수 자리는 사실 그들의 희생 덕분이었다. 이 선배들은 외국인에게 어떤 직업의 기회도 허용되지 않던 서독에서 한국 식품점을 운영하거나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의 경제력에 의존하면서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세계에서의 운동이나 전망을 생각한 이는 없었다. 그만큼 우리의 경우 진보적인 지식인조차도 오로지 한반도, 우리 민족의 장래로 온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닐다의 결단은 오랫동안 내게 두 가지의 자책으로 남았다. 그 하나는 불타는 현실을 앞에 두고 겨우 박사 학위에 연연하고 있는 나의 소시민적인 삶에 대한 자학이었다. 학문에의 열정을 합리화하기에는 군부독재라는 시대적 현실이 너무 처참했고, 그래서 나의 학문 행위를 스스로 합리화할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사고와 참여가 여전히 너무 민족주의적이라는 비판이다. 바로 이런 자각 때문인지 나는 지금 참여연대가 해외 원조나 제3세계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열정을 투여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실질적인 실행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3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나는 몇 년 전에 닐다의 소식을 들었다. 한국 유네스코 사무총장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들렀던 이삼열 선생을 통해서다. 닐다는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사회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정현백 참여연대 공동대표.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학문 연구와 참여연대 활동 그리고 이와 연관된 다른 시민운동 사이에서 분주하게 지내고 있음. 그러나 학문과 연구 모두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음. 일상에서의 자유로움과 해방, 달관은 아직 꿈도 꾸지 못하고 있음. 그러나 열심히 사는 것은 분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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