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 정치철학자

2015년 우리 민주주의의 자화상
2015년 현재 우리 민주주의의 모습이 수상하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은 민주사회의 기본적 원리이자 가치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일베’로 상징되는 집단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한다. 생각이 다른 그 누구도 관용할 수 없다는 우리의 생각을 관용하라”란 말을 당당히 내뱉는다. ‘신은미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언론의 자유의 기반인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언론이 스스로 사냥하고 다닌다. 헌법재판소는 “싹트는 것을 보면 실마리를 안다”는 맹자의 피음사둔?淫邪遁이란 말을 재판전문에 당당히 기록하며 한 국가의 정당해산심판을 내린다. 그러니 생각이 다른 이들을 사냥하러 다니던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는 말을 당당히 내뱉을 수 있는 현실이 이상한 건 아니다. 우리의 세계언론자유지수가 2012년 44위, 2013년 50위, 2014년 57위인 것도 이상할 리 없다.
적 없이 살아남을 수 없는 자들의 시대
나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적 없이 살아남을 수 없는 자들의 시대라 본다. 가장 손쉬운 적은 ‘북한’이고 아직도 이 논리는 먹혀든다. 무엇이 두려운지 헌법재판소는 정당해산심판을 가하고 일부 보수 언론은 관련 소식을 남발한다. 일부 보수 종편을 보고 있노라면, 북한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폄하하는 프로그램, 그리고 이념 문제와 관련 있다 싶은 단체나 인물의 양심과 사상을 검증하는 프로그램이 없다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적을 규정하고 그 적을 사냥하는 이들의 시대. 적의 존재란 두려움에 휘말려, 적을 조롱하는 즐거움에 휘말려 살아가는 자들의 시대. 내가 맞서고 있는 적보다 우월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니, 이런 사람들의 논리가 차별에 찬성하는 것은 당연하다.
‘차별’을 찬성하는 이들이 더욱 역겨운 건, 자기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팔아먹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민주주의를 팔아먹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를 만들어낸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민주주의가 없어도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우위만 점령할 수 있다면 상관이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의 창출은 오히려 “차별이 정당한 세계”에 도움이 되니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다.
유서 없이 남겨진 유산, 민주주의
민주화의 시작이 87년이었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는 일천하다. 그럼에도 87년 이후의 세대에게 민주주의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 사회는 87년 이후의 세대들에게 민주화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독재의 가혹함과 87년 민주화 혁명을 통해 우리가 성취한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하여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다. 한나 아렌트는 “행위에 이어 사유를 통해 완성되지 않는다면, 즉 기억에 의해 명확한 표현을 얻지 못한다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독재에 대한 저항은 당연한 것이라는 발상, 87년은 실패한 혁명이라는 자기패배적인 발상에 갇혀, 우리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어렵게 성취한 유산인지 그 의미를 기억하고 그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들에게 전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민주주의가 하나의 안정된 정치문화로 자리 잡지 못한 우리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우리와 미래세대에게 “아무런 유서도 없이 남겨진 유산”이 되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유산의 가장 큰 문제는, 물려받은 자가 그 유산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곱씹을 수 없다는 데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의 합리적인 자기 연민, 분노
이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이 맞는 가장 큰 난관은, 현재의 곤경을 헤쳐나갈 수단을 결여한다는 데 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사건 직후 온 국가가 겪은 슬픔에 비해, 9개월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진 사건의 실체조차 없다. 그리고 세월호 문제마저 “적 없이 살아남을 수 없는 이들”에게 이용당하며, 진실을 찾는 일이 이념의 문제로 어김없이 번져나갔다. “부모 중 누가 누가 빨갱이라더라.” “너는 단식하느냐, 우린 폭식한다.” 이들은 차별에 찬성하는 자들에게 내재한 본성, 타자를 향한 조롱과 멸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리고 어떻게든 진실을 찾고 싶지 않은 자들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온갖 법 절차를 내세워 진실을 가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렇게 9개월이 흘렀다.
나 현재 자신이 물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줄어들까 두려운 자들은 기억하는 일에 나서지 못한다. 주림의 두려움이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아는 자들이 그 주림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간단하다. 그러나 그 주림이 두렵지 않은 자에게도 문제는 남는다. 우리의 행위를 사유하고 그 의미를 곱씹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길러낸 “기억의 행위”를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기억하지 못하는 자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저 이성, 사유, 합리적 담론과 함께 반복적으로 터져나오는 격렬한 분개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모든 일은 그저 새로운 일일 뿐이다.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그 새로운 일에 당혹해 하며 그저 분노만 터뜨리는 자기연민이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의 슬픔, 바로 그 실체다.
“아직도 세월홉니까?”라고 되묻는 사람에게 “민주주의, 민주주의 이제 지겹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
김만권
소크라테스를 존중하여, 정치와 사회를 철학으로 풀어 평범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거리 위의 정치철학자다. 시민들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함께 말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불평등의 패러독스>, <참여의 희망>, <정치가 떠난 자리>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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