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24년 12월 2024-11-28   12496

[회원 인터뷰] 참여연대의 첫 얼굴, 첫 목소리

안내데스크에서 자원활동하고 있는 맹행일 회원 ⓒ정인욱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서 해방과 분단을 맞고, 초등학생 시절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청년기와 중장년기 내내 정치적으로는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기였다. 은퇴할 무렵인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도 제법 선진국 소리를 들었다. 제도적 민주화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시민단체도 등장했다.

올해 84세인 맹행일 회원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이렇게 온몸으로 거치면서 살아왔다.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역사책에서나 읽어봤을 이야기가 그에게는 현실이고 삶이다. 그런 맹 회원이 선택한 마지막 역사의 현장은 바로 참여연대. 정년퇴직 다음 해인 2001년, 참여연대 회원으로 가입하고 자원활동에 나섰다.

참여연대와 함께 한지도 어느덧 24년. 맹행일 회원은 신문기사 스크랩, 회비미납 회원 전화, 안내데스크 등의 자원활동을 두루 거쳤다. 지금 하는 안내데스크 업무도 벌써 10년째다. 일주일에 한 번, 맹행일 회원은 참여연대 건물 3층 입구의 안내데스크에 앉는다. 참여연대를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맹 회원을 먼저 만난다. 참여연대 대표번호로 전화를 거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참여연대의 첫 얼굴이자 첫 목소리다.

그러나 아쉽게도 맹행일 회원의 자원활동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가족 돌봄에 전념하기 위해 내년부터는 활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기나긴 자원활동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가족 곁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한 맹행일 회원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참여연대와 어떻게 함께하게 되셨는지, 그 이야기부터 시작할게요.

정년퇴직하고 쉬던 중에 친구를 만났는데 참여연대를 소개해 줬어요. 당시 언론에도 참여연대가 좀 나오기도 했고요. 그래서 제가 찾아간 거죠. 대한민국에는 시민단체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으니까.

원래 시민단체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셨네요.

직장생활하면서도 노동 관련 책을 좀 봤어요. 그때만 해도 노동 탄압이 심했잖아요. 점점 양극화가 심해지고. 그런 데에 대한 불만이랄까, 문제의식을 은연중에 가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1999년도에 대만에서 화학공장을 짓고 시운전하는 일을 한 1년 정도 했는데, 그때 느낀 게 몇 가지 있었어요. 우선, 대만은 중국과 자유 왕래를 하더라고요. 우리 공장 직원들도 중국의 친척들을 만나고 왔다는 거예요. 우리는 남북 간 서신 왕래도 못 하는데 말이에요. 그게 참 부러웠어요. 두 번째로 대만은 그때부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했어요.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봉사활동을 하면 그걸 인정해주는 거죠. ‘대만의 정치가 우리보다 한참 앞섰구나’ 싶었어요.

회원님 세대에서는 좀 드문 가치관인 것 같아요. 반골 기질이 있으신가 봐요. (웃음)

아이구, 우리 가족의 뿌리부터 얘기해야겠네요. (웃음) 초등학교 다닐 때 외삼촌,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 동생이 제 가정교사를 했어요. 그분이 제가 살던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거든요. 그리고 아버지가 데려온 사촌 형도 마침 한집에서 지냈고요.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터졌는데, 외삼촌은 인민군으로 가고 사촌 형은 국군으로 간 거예요. 같이 살던 가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눈 거죠.

그 뒤로 외삼촌은 북으로 갔어요.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많이 월북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건 다행히 없어요. 제가 ROTC로 장교 임관할 때 혹시 신원조사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잘 넘어갔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내내 가슴을 졸였죠. 자기가 동생을 데려왔다가 일이 그렇게 됐으니까요. 언젠가 외삼촌한테 편지가 왔어요. 북한에서 외삼촌을 일본에 유학 보냈는데, 거기서 편지를 보낸 거예요. 그런데 어머니가 편지를 보시더니 뒤뜰에 가서 불 질러 버리더라고요.

어머니가 동생을 많이 그리워하셨을 텐데 기다리던 편지까지 태우다니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그런 일들이 회원님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겠어요.

예, 분단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죠. ‘반공 우선주의라는 것도 결국 정권 유지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고, 보수정권이 반공을 앞세우면서 분단 상황을 이용하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우리가 빨리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고 느꼈죠. 예전에는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빨갱이라고 했어요. 친구들을 만나도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는 못 하고, 또 (대화가 잘 안 통하니까) 안 하기도 했고요.

그런 생각 때문에 거부감 없이 참여연대에 함께 해주셨나 봐요. 그런데 회비만 내주시는 게 아니라 감사하게 자원활동까지 하셨네요.

뭐, 시간이 있으니까요. 자원활동은 참여연대 가입하자마자 시작했어요. 처음 했던 것은 신문 스크랩이었고요.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 잘 안됐거든요. 주요 일간지를 보면서 참여연대에 관계되는 기사는 전부 오려서 스크랩북에 붙이는 작업이었죠. 그걸 4~5년 하고 나서는 회원들에게 전화하는 일을 했어요. 회비 미납된 분들에게 납부 재개를 요청하는 거죠. 그것도 한 10년 했네요.

그 뒤로는 안내데스크를 맡아서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어요. 제가 이 일을 하겠다고 먼저 나선 건 아니고 참여연대에서 요청이 있었어요. 안내데스크 일을 하려면 (시민 문의에 응대하기 위해서) 참여연대 업무도 잘 알아야 하고, 참여연대 간사들 이름이나 얼굴도 알아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참여연대에 오래 나온 자원활동가가 앉아 있어야 하는 거죠. 요청받았을 때는 흔쾌히 하기로 했어요.

참여연대에는 참 다양한 시민들을 찾아오는데, 회원님은 어떤 분들이 기억에 남으세요?

주로 오는 분들이 사법 피해자들이에요. 많이 못 배우고 돈도 별로 없는 분들이죠. 이런 분들이 도와달라고 하는데, 참여연대는 돕지를 못하잖아요. 특정한 사람을 위해 지원하거나 고발하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단체가 아니니까. “우리 업무가 아니다”라고 설득하긴 하는데, 그럴 때 제일 가슴이 아프죠.

가끔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무턱대고 화를 내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짜증이 나지는 않아요. 그냥 좀 짠하죠. 그런데 참여연대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긴 해요. 요즘엔 좀 뜸한데, 천안함 사건 관련해서 참여연대가 유엔에 서한을 보낸 당시(2010년)에는 정말 심했어요. 보수단체 사람들이 와서 참여연대 드나드는 손님들이나 활동가들을 구타하고 가스통 가져와서 불 지른다고 소리치고. 그런 걸 볼 때 많이 속상했죠.

이 일을 ‘감정노동’이라고 느낀 적이 아주 없진 않은데, 힘든 상황은 드물어서 그때그때 소화할 수 있어요. 게다가 참여연대가 참 고맙다고 하시는 분들,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분들도 가끔 있거든요. 그런 분들과 통화하면서 저도 참여연대 활동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어요.

참여연대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회원님보다 나이가 적잖아요. 시민들도 그렇고, 다른 회원들이나 활동가들도 마찬가지고요. 다른 세대와 소통하는 게 어려울 때는 없을까요?

안내데스크에 앉아서는 별로 어려움이 없어요. 오히려 제 또래를 만날 때가 더 어려워요. 동창이나 전 직장 동료들, 고향 친구들 모임 같은 데 나가면 제가 입을 다물어요. 그 사람들이 현 정부를 지지하는 20%거든요. (웃음) 다투지 않으려면 말을 안 섞는 게 상책이에요. 세대가 달라도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더 편합니다.

정말 오랜 세월 참여연대 자원활동을 해오셨는데, 이 일은 회원님에게 어떤 기쁨을 주나요?

제가 정년퇴직하고서 참 행복하게 뜻있게 여생을 보내고 있거든요. 참여연대가 가장 큰 이유예요. 제2의 인생을 얻은 거죠. 여기에서 좋은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부도 시작했어요. 인문과학 서적을 많이 봤죠. 참여연대 활동을 하려면 공부를 좀 해야겠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다른 나이 든 회원들에게도 제가 참여연대 자원활동을 적극 추천합니다. 시간을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참여연대에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꼰대’ 소리도 덜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맹행일 회원 ⓒ정인욱

회원님과 ‘공부’는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 같아요. 아카데미느티나무 열혈 수강생이시고, 참여연대 회원들과 시니어 공부모임도 하셨고, 또 은퇴 이후에 경제학·중어중문학·법학 공부도 하셨고요. 공부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사람은 평생 공부해도 모자라잖아요. 예전에 저는 전공 분야인 공학 쪽의 책을 주로 읽었는데, 인문과학 서적을 읽으니까 또 새로운 세계가 열리더라고요. 모르던 걸 알게 되니까 무릎을 탁 치죠.

최근에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재미있게 봤어요. 과학 수준이 떨어졌던 유럽이 산업혁명에 성공한 이유를 설명한 대목이 참 좋았습니다. 유럽의 왕들은 자기가 모르는 게 많으니 공부를 더 하고 탐험도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거죠.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도 추천하고 싶어요. 미국이 제일인 줄 알던 엘리트가 유럽에 가본 내용이에요. 유럽엔 국영 아파트도 많고 학교도 다 공짜고, 미국에서는 꿈도 못 꾸는데 축산업에서 동물복지도 하고. 책을 읽어보면 구구절절 맞는 소리예요.

올해 12월로 안내데스크 자원 활동을 마무리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마음이 좀 어떠세요?

여력이 있으면 좀 더 활동하고 싶은데, 우리 아내 건강이 안 좋아서 제가 옆에 항상 붙어있어야 하거든요. 아내가 45년생 해방둥이니까, 이제 그 사람도 벌써 여든이 됐죠.

후손에게 살만한 사회를 물려주는 게 우리 노인 세대의 가장 큰 일 아닌가 싶어요. 참여연대에서 24년 자원활동하면서 그런 생각을 갖고 일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제가 그런 일을 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네요.

돌봄을 위해서 노인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따셨다고요.

아내가 아픈데 간병하는 거야 당연한 거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일단은 힘닿는 데까지 해볼 결심입니다.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의학 상식도 배우고,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제일 먼저 나오는 내용이 환자의 인권이더라고요. 모든 걸 환자 위주로 생각하라는 거죠. 그래서 저도 제 생각을 접어두고 환자 뜻에 맞춰 간병하려고 해요.

돌봄 수요는 계속 늘어나는데 좋은 해법이 나오질 않네요.

급격하게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는데 돌봄 인력이 너무 부족해요. 일본도 그렇고 서구의 복지국가들에서는 노인들이 시설에 가지 않고 그동안 살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노후를 보내더라고요.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노인들을 시설에 다 몰아넣고 외출도 마음대로 못 하게 하는 거죠. 정말 안타깝습니다.

노인뿐 아니라도 우리 사회 대다수가 직면할 문제인 것 같아요. 하루빨리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길 바라면서, 아쉽지만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을 드립니다. 회원님에게 참여연대란 뭘까요?

저에게 참여연대란… 행복과 보람을 준 존재다. 네, 그렇게 정의할 수 있겠네요. 참여연대 덕분에 노후가 정말 즐거웠거든요. 참여연대, 참 고맙습니다.

맹행일 회원 ⓒ정인욱

박효원 / 사진 정인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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