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26년 07-08월 2026-07-01   507

[여는글] 시민이자 소비자로 살아가는 법

참여사회 3-4월호 내지 디자인. '에너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적혀있다.

만나고 나면 마음이 너무 지쳐 특별한 상황이 아닌한 굳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조용히 관계를 흐릿하게 유지하다 차츰 잊혀 결국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과정을 거치곤 합니다. 상대에게 나의 상황과 의견을 전해 이해를 넓히고 변화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는 진작에 했을 겁니다. 어떤 기대도 가능성도 여지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손절’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마무리를 짓습니다.

때로는 필요에 따라서, 때로는 호감이 있어서, 때로는 익숙해서 꾸준히 사용하는 상품이나 서비스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기획되고 제공되는 것이니 모든 게 내 마음 같을 수는 없겠지만 비용 대비 만족을 고려하면 최적의 선택일 겁니다. 그런데 이를 제조하거나 공급하는 기업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공공에 위해가 되는 행위를 벌이는 때가 생기곤 합니다. ‘손절’처럼 정리하기에는 물건이나 서비스 자체에 치명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애매한 마음이 들고, 당장 대체제를 찾아 생활을 이어가기에 어려움이 따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애용해온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기업이 망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불매’에 나서게 됩니다.

손절은 회생을 위한 결정이 아닙니다. 관계의 미래를 기약하는 상황도 아닙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나라도 안심하고 살기 위해 현재를 확정하는 일입니다. 불매는 기대를 전하고 변화를 전제하는 선택입니다. 상황이 달라지면 이전처럼 돌아가겠다는 제안이자 약속이기도 합니다.

손절이 항구적인 데 비해 불매는 일시적입니다. 이렇게 보면 불매는 꽤나 낭만적인 움직임 같기도 합니다. 치명적 실수와 잘못이 있음에도 반성하고 조정할 기회를 주는 것이자 때로는 잘못인지조차 모르던 일을 바로잡을 계기를 전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불매가 일시적이라는 데서 발생합니다. 기업은 개인에 비해 규모가 크고 자본이 충분하니 견디는 힘이 강합니다. 개인은 평소의 생활을 유지해야 하니 불매에 쏟을 힘은 제한적입니다. 종종 불매가 소비자 운동으로 확산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도 관심과 참여가 지속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불매의 일시성을 감안하여 사과할 때에는 고개를 깊이 숙이지만 이후 대응 조치와 재발 방지 등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시간은 우리 편이니 소비자의 분노가 잦아들고 비판이 누그러지다가 이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해도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떠올리는 이는 거의 없는 상황을 기대하는 게 합리적인 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익숙한 이야기가 반복되면 사람들의 관심은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잘못, 불매, 망각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사과, 조치, 변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어 낼 방법은 없는 걸까요. 더 세게, 더 오래 불매를 이어가는 것보다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은 불가능한 걸까요. 기업에게 도의적 사과를 넘어선 응분의 책임을 묻고 충분한 보상과 배상을 법으로 강제하는 제도적 장치는 왜 여전히 진전되지 못하는 걸까요.

이번 특집에서는 근래 끊이지 않는 기업의 사건사고를 바탕으로 이에 대응해온 소비자의 노력과 시도를 되짚고, 불매운동이 어떤 효과와 한계를 지니는지 입체적으로 분석합니다. 더불어 어떤 제도 보완이 필요한지를 소비자권익 3법, 즉 집단소송제, 징벌적 손해배상제, 증거개시제로 점검합니다. 3법은 꽤 오랜 시간 논의되었지만 기업 활동의 위축과 과도한 소송 남발로 이어질 염려도 만만치 않아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양쪽 입장을 균형 있게 다루고 그럼에도 소비자권익 3법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이유를 정리합니다.

상품경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시민과 소비자 두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시민의 모습과 역할이 지나치게 소비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소비자로서 고려할 책임과 영향에 시민의 자세가 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불매’는 이 둘이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첨예하게 만나고 부딪히는 공간이 아닐까 합니다. 때로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거나 다른 상상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을 때, 기업은 당연히 이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대응하려 할 겁니다.

시민이자 소비자로서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물건 하나 사는 데 거기까지 생각해야 하나 싶어 마음이 지친 기억, 저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불매라고 해야지 하며 끓어오르는 화를 삭인 경험이 있다면, 이번 특집이 던지는 질문과 나름의 해답에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말과 행동의 일치처럼 소비와 행동의 일치를 이루어 낼 지혜를 함께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참여연대의 ʻ정부지원 0%’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박태근 〈참여사회〉 편집위원장의 프로필 사진

박태근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책을 만들고, 온라인 서점에서 MD로 책을 팔고, 여러 매체에서 책을 알려왔습니다.〈월간참여사회〉 ʻ읽자’ 코너에서 필자로, 편집위원회에서 편집위원으로 오래 활동하다 편집위원장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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