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으로 바위치기’. 사실 그랬다. 시민운동 초기만 해도 거대한 돈과 조직력, 정보력으로 뭉친 권력기관은 그 자체가 힘이었고, 전문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밤낮으로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나름대로의 전문성을 갖춘 활동가들이 등장하고, 전문가들이 시민운동에 직접 뛰어들고 있다. 또 특정 분야를 전문으로 파고드는 단체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특정 분야 또는 사안에 대한 전문지식을 확보하는 것이 시민운동의 전문성일까. (편집자 주)
생태보전시민모임 여진구 사무국장. 그는 2주에 한두 번 정도밖에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환경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환경운동으로 10여 년 간 잔뼈가 굵은 그의 ‘현장 생태학’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고정적인 강단은 없지만 유네스코 주최 강좌를 신청한 교사, 적십자사 지도자 연수자, 노인대학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태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 넘쳐나고 있다. 1주일 내내 이런 강의가 있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 때문에 낮에는 강의, 밤에는 시민운동으로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판국이다.
참여연대 이태호 국장은 6개월 방위 출신이다. 그런 그가 K1전차 전문가다. 이 방면에 대해서는 군수품 전문가들과 토론해도 뒤질 게 없을 정도로 전차의 부품에서부터 성능, 유통경로, 가격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꿰차고 있다. 그는 군 생활 동안 기갑부대 근처에 가본 적도 없다. 지난 1년간 KI전차 도입 과정에서의 비리를 캐면서부터 그는 이 방면의 전문가가 된 것이다.
시민운동하다 보니 ‘나도 전문가’
이 밖에도 거의 1년 내내 백두대간을 샅샅이 훑고 다니는 녹색연합의 서재철 부장, 입법청원운동의 선두주자격인 경실련에서 입법청원운동을 주도해 온 고계현 국장 등 시민운동을 벌이면서 그 분야의 전문가로 부각되는 활동가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특정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공부하는 활동가들도 최근 부쩍 늘었다. 가령 환경운동연합의 문유미씨는 미국에서 대체에너지 박사학위를 공부중이고, 녹색연합의 남상민, 이태화씨는 각각 미국과 호주에서 국제교류, 동북아지역의 환경협력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여성단체연합 남인순 사무처장은 성공회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고, 함께하는 시민행동 신종철 정책실장은 성균관대학원에서 행정학을 배우고 있다. 중앙의 큰 단체들은 휴식년제를 전문지식 습득기회로 활용하도록 권장할 정도다.
이뿐만이 아니다. 참여연대 조세개혁 팀장인 윤종훈 회계사와 납세자운동본부 실행위원장 하승수 변호사, 또 환경운동연합 환경법률센터 부소장인 여영학 변호사와 일본에서 지질학 박사학위를 받은 시민환경연구소 이인현 부소장 등 전문가들이 직접 시민단체 상근자로 활동하는 예도 늘어나는 추세다. 과거에는 전문가들의 경우 대체로 자원봉사 집단으로 시민운동에 간접 참여하는 데 그쳤지만 이제는 쥐꼬리만한 봉급을 감수한 채 전면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운동의 전문성=각 분야의 전문지식 습득’이란 등식이 성립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특정분야의 전문 지식을 확보하는 것이 시민운동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오히려 시민운동의 전문성은 공익적 이슈를 발굴해 이를 운동으로 발전시키고 현실을 개혁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특정 사안에 대한 전문적 지식은 그 중 한 요소일 뿐이다. 전문적 지식을 활동가 스스로 갖추는 것도 필요하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시민운동과 함께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시민운동의 전문성은 ‘자원 동원력’
“민사·형사 사건에 대합 법률 지식은 시민운동을 하는 데서 필요하지만 매우 부분적입니다. 오히려 운동을 통해 얻는 지식과 정보가 많습니다. 가령 정보공개운동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변호사는 거의 없습니다. 법률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 분야는 불모지였습니다. 외국의 입법례를 찾아보면서 이 영역을 시민운동적 관점에서 개척해야 하는 것이지요. 정보공개운동은 지역에서 활성화하는 추세인데 자치단체와의 소송을 도와줄 변호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정보공개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변호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민운동가가 이 분야의 전문가라 할 수 있지요. 소송을 통한 시민운동 역시 기존 법리로만 밀어붙이다간 낭패보기 일쑤입니다. 적극적으로 법리를 개발해야지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만으로 시민운동의 전문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올해부터 참여연대에 상근하고 있는 하승수 변호사의 말이다. 그는 오히려 “현장으로부터 괴리된 전문가들은 자기 전문성에 매몰될 우려가 있다”며 “이들과 파트너십을 형성하면서 역동적으로 운동을 기획하고 현실 개혁의 동력을 모아내는 것이 시민운동의 전문성이다”라고 정의한다.
법조 전문가들로 구성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 단체의 운동 방식은 법률적 접근을 통한 문제해결입니다. 우리 전공인 소송을 통해서 사회 민주화에 기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법률적 지식만으로 시민운동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진 않습니다. 미완결적인 구조의 시민운동이지요. 따라서 우리 단체의 경우 시민운동 단체로서 우리가 미흡한 점은 연대운동을 통해 풀어갑니다.”
민변 윤기원 사무총장(변호사)의 말이다. 그는 가령 시민운동은 사회 공익적 이슈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거리에 나가 팔을 걷어붙여야 되고, 시민들을 조직하는 등 다양한 형식이 병행돼야 하지만 사실상 변호사라는 전문가 집단이 뭉쳐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소송에 국한될 수 밖에 없다고 자가진단한다.
이 두 시민운동가의 얘기를 종합하면 시민운동의 전문성이란 사회 공익적 과제를 현실 개혁으로 이끄는 데서의 모든 과정을 설계하고 이를 실천하는 능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시민운동의 전문적인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그 분야의 전문가뿐만 아니라 법률전문가, 시위전문가, 언론 대책 전문가, 조직전문가 등 사회 전반에 흩어져 있는 인적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고, 한편으로는 모금 등 재정적인 면까지 총체적으로 조직하는 기획자로서의 전문성이다.
전문성은 ‘현장’에서 나온다
시민운동은 한편에선 ‘전문가 중심의 운동’이라고 지적될 정도로 많은 전문 인력을 확보하고 있다. 교수, 변호사, 의사 , 기업가, 정치인, 문화예술인, 언론인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소위 벌런티어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 경실련, 녹색연합,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 중앙의 큰 규모의 단체는 적게는 300여 명에서 많게는 600여 명의 전문가가 참여하고 있다. 지역 단체들의 경우는 대체로 10∼30여 명선. 전문가 풀에서도 중앙과 지역 단체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성명서를 수정하는 일에서부터 회의 참석, 현장 조사, 프로젝트 사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들을 하고 있다. 물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전문가는 이 중 20∼30%를 밑돌지만 시민운동가는 이들의 활동영역과 전문성을 최대한 살려 현실개혁의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간혹 상근자와 전문가간 불협화음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시민운동가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전문가와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하고 이를 실천하는 일이다.
환경운동연합 김중열 회원팀장은 “어떤 단체는 전문가들이 사업을 쥐락펴락하고, 또 다른 단체는 전문가가 상근자들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며 “우리보다 각종 자원면에서 훨씬 우세한 기득권세력과의 대결에서 이기려면 전문가들을 운동 속에서 제대로 조직하고, 이들이 적극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서로간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전문가의 전문성과 시민운동가의 전문성의 차이는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시민운동의 전문성은 상근자 몇 명이 유학가는 것 자체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문가들의 전문성은 대부분 책상머리에서 나오지만 우리는 현장이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또 이들은 현장 속에서 실천하죠.” 녹색연합 김제남 사무처장의 말이다. 시민운동의 전문성을 담보하는 원천은 바로 시민들의 삶의 현장이고, 이 속에서 개혁과제를 실천하는 행동력이라는 얘기다. 현장을 모르고는 개혁과제나 실효성 있는 대안조차 내놓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는 또 “시민운동의 전문성이란 시민들을 운동에 참여케 하는 것”이라며 “전국 각지에서 다방면에 걸쳐 있는 시민들 자체가 각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시민 있는 시민운동’이야말로 전문성을 확충하는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활동가나 시민단체가 특정분야의 전문 지식 습득에 대해 마냥 눈감을 수는 없는 형편이다. 최근 들어 시민운동의 사회적 발언권이 높아가면서 시민운동에 대해 고도의 전문지식을 요구하고 있다. 책임있는 발언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처럼 단순히 구호 하나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대는 갔다. 그만큼 사회가 다원화되고 세분화됐다는 증거다.
“가령 의약분업의 경우 과거 같으면 ‘실시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운동이 진행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구체적으로 의약분업을 어떤 방식으로 실시할 것인가라는 각론을 내놓아야 합니다. 또 부패방지법 실시에는 찬성하되 특검제 도입 여부에 대해서는 시민단체간에도 다소 의견차이가 있는 실정입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 하승창 사무처장의 말이다. “활동가는 정부나 기업이 가진 전문적 지식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에 맞는 전문가들을 조직할 수 있는 정도의 기본적인 전문 지식은 갖추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단체는 특정 분야만 다룹니다”
이 같은 사회적 요구에 따라 특정분야를 전문으로 다루는 시민단체들이 생겨나는 추세다. 시민운동의 분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부패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반부패국민연대가 출범했으며, 인터넷 시민운동을 표방하면서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발족했다. 지난해에 환경운동 부문에서 우리식물살리기란 단체가 가지치기를 했고, 올해 야생동물연합도 탄생했다. 생태보전시민모임도 다 같은 환경운동이 아니라 생태적 관점에서 시민운동을 펼치는 단체다.
소위 종합적 시민단체들도 조직 내 특화된 운동을 찾아가고 있다. 녹색연합의 경우 물과 쓰레기 관련사업은 다른 단체에 넘기고, 숲, 습지, 야생동물 등 생태계 분야와 반핵, 대안에너지 등의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참여연대 역시 조세개혁팀, 납세자운동본부, 소액주주운동, 작은권리찾기 등 사업을 특화시켜 전문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추세는 사회가 다원화될수록 가속화할 전망이다.
과거 국감연대 활동을 비롯해 정치·기업 감시운동에서 불거졌던 전문성 논란은 전문 지식과 관련된 문제라기보다는 권력집단의 딴지걸기쯤으로 일축할 수도 있다. 실제 현실에서도 특정 사안에 대한 시민단체의 전문성이 전보다는 폭넓게 인정되는 추세다. 정부와의 합동조사단이 꾸려지거나, 각종 위원회를 통해 실제 정책결정과정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성은 정보력이 크게 좌우한다. 그런 의미에서 돈과 조직을 두루 겸비한 정부, 기업 등 권력집단의 전문성을 능가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이는 그야말로 시민운동의 전문성으로 극복할 문제다. 모든 시민을 시민운동의 대열에 동참시키는 전문성,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전문가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전문성이야말로 열악한 조건에서도 개혁을 추진해나갈 수 있는 시민운동의 힘이자 무기이다.
전문가 척박한 지역단체 활동가는 ‘슈퍼맨’
지난 19일 새벽 12시 10분경. 강원도 원주 시내 ‘틈’이라는 호프집에 원주참여자치센터 회원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386세대. 이 중 교수 2명, 카페 주인을 포함한 직장인 4명, 그리고 참여자치센터 이성경 실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날의 술 안주감은 ‘시민운동의 전문성’
한 교수는 "지역 사회가 폐쇄적이어서 외지에서 온 학자들이 시민 단체에 참여하는 것을 곱지 않게 바라본다"며 소위 전문가들의 ‘실전 참여’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또 기업의 전문성은 생산, 기술력, 마케팅이고, 공직사회의 전문성이란 뇌물받지 않고 주민 서비스를 잘하는 것, 대학사회의 전문성은 교육, 연구 등 ‘강단의 전문성’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생각이 일치했다. 그렇다면 시민운동의 전문성이란 무엇일까.
"이처럼 각 분야별 전문성이 있는데 이걸 시민운동에 곧바로 대입해서는 안되지요. 시민운동의 전문성은 이 같은 분야별 전문성을 잘 조직화해 시민들을 운동에 참여케 하는 대중성입니다." 이날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 이성경 실장이 내린 결론이다. 전문적 지식은 대중성을 보완하는 데 필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전문가가 전면에 나설 때 대중적으로 운동을 풀어가기가 어렵다"며 "실제 참여하는 전문가도 중앙 단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일도 드물다"고 말했다. 이 단체에 참여하는 전문가는 학자를 포함해 10여 명 수준이다.
전북 익산시민센터도 전문가 참여 규모로 볼 때 비슷한 수준이다. 가 위원회에 참여하는 전문가들은 12~13명이 고작이다. 이 때문에 볼런티어로부터 시민운동에 필요한 전문적 지식을 공급받는 중앙의 단체들과는 달리 지역 단체 활동가들은 ‘슈퍼맨’이 돼야 한다. 3~4명의 활동가들이 자치단체 감시를 비롯해 경제, 문화 등 지역의 전 분야에 걸쳐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익산시민센터 이상민 실장은 "현장 활동가에게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추세지만, 오히려 이는 기존에 배출된 전문가가 시민단체에 참여함으로써 해결될 문제"라며 "시민운동의 전문성은 시민들을 운동에 참여하도록 조직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