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소한 비구니 지율 스님. 갈수록 척박해져 가는 수행도량을 지키고자, 생명의 근원인 물과 산을 지키고자 고속철도 터널 건설 벌목현장에서 굴착기 팔뚝 위에 올라 그 위태로운 장소를 선방으로 삼은 지 오래다. 무엇이 한 수행자를 숲에서 나오게 했고, 뜨거운 태양아래서 두피까지 벗겨지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천성산의 생명의 기운을 지키려 하는 염원에서 시작된다.
역사와 문화가 깃든 ‘생명의 천성산’
천성산은 원효대사가 대운산 척판암에 머물고 있을 때 당나라의 담운사 스님들이 집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모르고 공양중이자, 대사가 밥상을 던져 밥상이 공중을 날아가는 소리를 들은 1천 명의 스님들이 집이 쓰러지기 전에 밖으로 나와 목숨을 건졌다고 하여 천성산(千聖山)이라 불린다.
이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擲板救衆>의 역사만큼 자연적인 가치도 높다. 천성산 화엄늪과 밀밭늪은 희귀한 꽃과 식물, 곤충들의 생태가 잘 보존되어있는 생태계의 보고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아 한반도 남부지역의 생태환경을 연구하는 귀중한 곳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문화재 보호구역, 전통사찰보존지역, 생태계 보존지역, 습지보호구역, 상수원 보호구역, 개발제한구역 등 10여 개의 보호항목으로 지정되어 정부 스스로 천성산의 가치가 무너지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개발논리에 의해 천성산의 모든 가치는 무의미해지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2010년까지 국내에서 가장 긴 터널을 천성산을 관통하여 뚫겠다는 것이다.
거대개발 논리에 사라져가는 작은 도롱뇽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계획에 따른 영향평가서에 따르면 ‘고산습지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법적 보호 동식물도 전무하다’는 것이다. 곧바로 고속철도 천성산 관통저지 전국비상대책위와 도롱뇽의 친구들은 ‘천성산 고속철도 공사착공금지 가처분 신청사건’(일명 도롱뇽소송)을 제기하였다.
천성산에 서식하는 도롱뇽을 내세워 그간 벌어진 환경영향평가의 부실함을 법정에서 논하고, 이를 계기로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전면적 검토가 이루어지길 바래서다.
국책사업이니 어쩔 수 없다는, 공단 측의 법정진술처럼 기술력이 있으니 먼저 뚫어놓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처리한다고 하는 발상은 자연이 인간의 손으로 통제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것인데, 이는 더 큰 재앙을 부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소송단은 1심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도롱뇽의 원고 적격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그 대리인들도 사법상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고 하였다. 권리를 가지려면 공사구간의 땅을 모두 사서 사법상의 권리를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마치 환경법이 만들어진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어느 누구도 문제제기를 할 수 없으며 자연보호는 개발업자나 정부의 아량에 기대어 적선 좀 해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는 판결이었다. 항소심에서도 법정재판부와 합의한 ‘현장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불리한 판결을 받았다. 현재 도롱뇽소송은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그러나 지율 스님은 이야기한다. 승패를 떠나 도롱뇽이 대법원까지 간 것은 이미 이긴 것이라고. 질기고도 질긴 이 소송의 과정과 결과도 ‘모두’를 위한 ‘우리의 몫’인 것이라고.
천성산을 통해 드러난 한국사회의 모습
현재 지율 스님은 생사를 넘나들고 있다. 한 비구니가 선방을 나와 시청 길바닥과 청와대 앞 거리를 의지하며 살았고, 공사현장 굴착기 위에서 살았으며, 중환자실의 무의미한 기계음에 싸여 겨우 살아가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한 비구니의 절규를 알지 못한다. ‘한갓 생명’이라 치부하며 그리 소중하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모든 행보를 비난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마주서려 하지 않았던 진실의 벽에 기대어 스스로는 수행자이기에 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숙업이었음을 이야기한다.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운다고 했다. 저들은 개발과 파괴라는 불씨를 지폈고, 지율 스님은 도롱뇽 소송이란 작은 불씨를 지폈다. 이제 어느 하나의 불씨가 살아남을 것이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화마가 되는지, 아니면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라는 불을 꺼버리는 맞불이 되는지의 중요한 기로에 섰다.
이제 천성산과 도롱뇽은 환경의 화두가 아니라 이 사회의 비도덕, 비양심, 부패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다.
지율 스님의 단식을 극단적이라고 몰아치며 외면했던 사람들은 이제라도 한갓 도롱뇽이 우리 사회의 부패한 고리들을 드러나게 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인가를 깨우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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