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06년 02월 2006-02-01   1798

놀이공원 좋아하세요?

겨울방학이다. 벌써 반쯤은 지나버렸지만, 방학 때면 어김없이 아이들의 ‘생활계획’에 빠지지 않는 것이 놀이 공원 가기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는 것은 시큰둥해도 놀이공원이라면 춥건 덥건, 몸이 아프건 간에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이들이다. 무엇이 그리 좋을까.

쉼 없이 소비만 강요하는 ‘랜드’와 ‘월드’

서울에는 롯데월드, 드림랜드, 어린이대공원이 있고 조금만 나가면 서울랜드와 에버랜드가 있다. 지방에도 놀이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혹시 어린이날 이런 곳에 가 보셨는지. 나도 두 번의 경험이 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반복되는 지루한 줄서기, 부족한 쉼터,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거의 혼절할 뻔 했다. 두 번째는 미수에 그쳤다. 놀이공원 입구에서 차가 너무 막혀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아이들의 눈총과 볼멘소리를 뒤로 하고 돌아나와 동네 공원에서 김밥을 먹어야 했다. 좀 더 일찍 나서거나, 좀 더 약삭빠르게 끼어들기를 하지 못한 나는 이 날 거의 무능한 아빠에 가까웠다. 내심 방정환 선생에게 투덜거려보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 이런 종류의 시설에는 몇 개의 테마파크와 놀이 기구들, 그리고 식당가 등이 마련되어 있다. 물론 한쪽 구석에 동물원이나 식물원도 있다. 비록 놀이공원일지라도 유익하게 ‘교육적’임을 선전하고,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나온 부모들에게 한 가닥의 명분과 위안이나마 제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리라. 일단 놀이 공원에 들어서게 되면, 자리를 펴고 한가롭게 쉴 수 있는 휴게 공간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으며 어떤 경우는 먹거리를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게 되어 있다. 먹는 것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배타적인 성역이다. 놀이공원 안에서 방문객은 아이의 손에 이끌려 쉼 없이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긴 줄서기’와 찰나처럼 ‘짧은 유희’를 반복한다. 각각의 놀이기구는 철저히 계산된 속도와 회전반경으로 3,000원 혹은 5,000원 어치의 긴장과 흥분을 건네준다. 롤러코스터건 바이킹이건 단조로운 반복과 예상된 회전 경로의 기계적 운동이 전부이건만 우리는 처음부터 흥분을 기대하고, 또 여지없이 즐거운 비명을 내지른다.

현실에서 유리된 환상 속에서 혼자 즐기는 놀이공원

많은 사람이 동시에 놀이기구를 타게 되더라도 이를 즐기는 것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앞뒤에 누가 앉아 있건 들리는 비명의 세기만 달라질 뿐 흥분은 철저히 개인적으로 전달되어 오는 것이다. 내 어릴 적 골목에서 행해진 대부분의 놀이가 또래와 함께 하는 공동체적 과정이라면- 딱지 치기든 ‘여우야, 여우야’든 상대방과의 대화와 조정(혹은 주먹다짐)은 필수였지 않은가- 놀이공원에서 대규모로 진행되는 놀이는 티켓의 종류에 따라 관객을 가르고 파편화하는 자본제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놀이에 참가한 사람의 수는 엄청나게 많아졌지만, 그 모두는 소수의 개인들로 나뉘어 제각각 고립된 놀이를 즐길 따름이다. 여기에서 모든 놀이는 상품으로서 소비되고 즐거움의 크기는 지불된 화폐의 양에 정확하게 비례한다.

이 글이 놀이공원에 주목하는 것은 놀이기구의 개인주의적 속성 때문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가진 본질적 허구에서 비롯한다. 이른바 ‘랜드’나 ‘월드’라는 명칭은 이곳이 우리의 구체적 삶과 유리된 특별한 장소라는 것을 표상한다. 주중의 일상이 직장에서의 피로나 학교에서 반복되는 지루한 수업의 연속이라면, 우리의 주말을 유혹하는 놀이 공원은 놀이와 유희로 가득 찬 낙원이라는 것이다. 이 낙원의 입장 자격은 선행이 아니라 주머니 속의 화폐의 양으로 결정된다. 놀이공원 곳곳에서 펼쳐지는 ‘신비와 모험의 세계’는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져버린 낙원이다.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평등과 통제는 백설공주의 가면 뒤로 소멸되어 버렸다. 놀이공원에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이 같은 허구는 더 이상 거짓이 아니며 오히려 현실의 고통이 허구가 되어버리는 역설적 도치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퍼레이드’를 보라. 동화 속의 주인공들이 그대로 튀어나와 거리를 행진한다. 아크릴 물방울 속에는 비늘 옷을 입은 인어공주까지 들어 있다. 퍼레이드에 등장하는 연기자들은 대부분 서구의 백인들로 구성되어 만화 그림에나 있을법한 바비 인형 같은 기형적 몸매를 뽐내고 있다. 한국인들은 키 작은 콩쥐 팥쥐 정도가 고작이다. 한참을 넋 놓고 퍼레이드를 바라보고 나면 남는 것은 부러움과 열등감이다. 테마파크나 환타지 월드 등으로 명명된 곳곳의 건축물은 서구의 동화적 풍경을 모방하고 있고 심어진 꽃들마저도 우리의 자연적 식생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철저히 서구화된 ‘랜드’와 ‘월드’는 한국에서의 삶이 지니는 무게와 피로를 일순간에 휘발시켜 입장료와 티켓을 통해 순간적 공간이동을 경험하게 만든다.

놀이공원에서 벗어나 자연과 이웃 속으로

이곳에서 칭송되는 이상적 부모의 모습은 주말이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놀이 공원에 들어서서 자유이용권을 건네주고, 캐릭터 상품 코너나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미소 지으며 기꺼이 지갑을 여는 사람인 것이다. 결국 가장 적극적인 소비자가 가장 훌륭한 부모로 간주되며, 이러한 선전은 은연 중에 우리 사회의 통념으로 자리잡아버렸다. ‘랜드’혹은 ‘월드’가 추구하는 상업적 동기는 아이들의 순수함, 그리고 자녀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파고들어 아동과 그 부모들을 인형 가게와 놀이기구 매표소의 대기 열로 몰아세운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소비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거나 아이들의 꿈의 실현, 혹은 교육적 동기로 미화되고 이로써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이는 자본의 실체는 장막의 뒤편 깊은 곳으로 은폐된다. 조작된 꿈에 무비판적으로 노출되어 놀이공원에 중독적 집착을 보이는 아이들은 심각한 우려를 자아낸다. 놀이공원을 꺼리는 나 같은 이들은 아이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결여된 ‘문제 있는 아버지’의 혐의마저 받게 되었다. 억울할 따름이다.

때로 우리는 꿈이 필요하다. 현실의 피로를 달래줄 위안과 휴식이 그립다. 하지만 놀이 행위가 곧 소비행위가 되는 등식은 반갑지 않다. 돈을 주고 사는 즐거움 대신 내 아이의 눈이 푸른 하늘과 작은 풀벌레로 인해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랜드?와 ‘월드’라는 이름의 수많은 놀이공원들에서도 구매와 소비로만 직결되는 야박한 상술 대신 소박한 이웃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꿈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어눌한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나도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양상현 순천향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민족건축인협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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