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7월 개봉을 앞두고 관객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칸느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입소문, 흥행 배우와 감독의 유기적 결합, 본격 괴수물이라는 수식어가 <괴물>에 대한 기대를 남다르게 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괴물>에 흥미를 갖는 이유는 이와는 조금은 다르다. <괴물>은 한국에서 어떻게 괴물이 태어나고 있으며, 괴물과 싸우는 이는 누구인가, 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살짝 공개된 <괴물>의 줄거리를 보면 한강변에 출몰하는 괴물은 주한미군의 환경오염물에 의한 돌연변이라고 한다. 그럴법하지 않는가? 도대체 주한미군에 의해 얼마나 많은 환경오염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가시적 통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짐작만으로도 그 양이 상당할 것이라고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보려하지 않는 것은 애써 문제를 발생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찌꺼기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못 본체 했던 것들이 괴물이 됨으로써 더 이상 못 본체를, 더 이상 자기 최면을 걸 수 없도록 이끈다. 존재의 비존재가 괴물이 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며 사회를 공포로 몰아갈 것이다. 이러한 괴물은 한국적 괴물이다. 여타 헐리우드 등에서 제작되었던 괴물이 안정된 일상을 돌연 혼돈으로 빠뜨리는 외부자인 것과 달리 한국의 괴물은 스멀스멀 우리가 의식하지 못(안)하는 사이 우리 안에서 그 파국적 위기를 준비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괴물은 단지 영화 속 괴물에만 한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무의식적 혹은 자발적 착시 속에서 우리는 영화 <괴물>에서처럼 다양한 괴물을 만들고 있다. 정치적 냉소주의를 틈타 5·31 지방 선거는 전국의 지역자치단체를 파란 색으로 통일시켰다. 월드컵의 흥분 속에서 한미 FTA 협상은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목을 죄어온다. 고립된 평택은 이제 더 이상 풍요로운 농작지가 아니라 살벌한 군사기지가 될 것이다. 순혈주의는 혼혈을 괴물로 배제했었다. 그렇다면 하인즈 워드는 자랑스런 한국인이기보다는 그 압도적 퍼포먼스에 경배할 수밖에 없었던 괴물이 아니었을까. 집 안에 감금되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장애인 역시 또 하나의 괴물이 아니었던가?
영화 <괴물>은 괴물과 맛딱뜨려 사투를 벌이는 평범한 민초들의 이야기란다. 영화 밖 현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괴물에 놀라고, 괴물과 싸우는 사람들은 평범한 우리이다. 외환위기에 고통받고, 황우석 파문에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던 이들이 우리였듯이 말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괴물을 만들어가는 부지불식간의 과정 속에서 우리 역시 또 다른 괴물이 되어갈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니체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존재를 발견하고,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과 닮아가듯 말이다. 우리에게는 한강변의 <괴물>만 괴물의 전부가 아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