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역사 드라마들이 시청자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MBC의 ‘주몽’이나 SBS의 ‘연개소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한국 고대사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활약했던 인물들로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한민족의 뿌리를 찾는 열망을 갖게 만드는 대리자로 등장한다. 최근에 방영되고 있는 ‘황진이’도 높은 시청율을 자랑하고 있어 바야흐로 안방극장의 시청률 경쟁은 역사 드라마들이 주도하고 있는 듯하다. KBS는 내년에 세종대왕에 대한 100부작 대하 드라마를 제작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어 앞으로도 역사드라마는 상종가를 칠 전망이다. 왜 시청자들은 역사 드라마에 매료되는 것일까? 역사 드라마가 과연 동시대 대중들의 역사인식을 제대로 심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재 역사 드라마의 붐의 문화적 맥락 속에 감추어진 어떤 논리들은 없는가?
사극 드라마에 변화의 바람이 일다
과거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역사 드라마는 대체로 조선왕조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조선 시대사는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쉬운데다, 보수적인 기성 시청자들을 잡아두기에는 왕조의 역사는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조를 주로 다루던 텔레비전 사극은 1990년대 후반에 들어가면서 소재와 스타일을 변형시키기 시작했는데, 그 시작이 아마도 MBC의 최고 흥행 드라마였던 ‘허준’이 아닐까 싶다. 그 후로 텔레비전 역사물에도 일종의 트랜드 바람이 불어 ‘상도’, ‘다모’같은 다양한 소재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고, ‘대장금’ 같이 일반 시청자들이 거의 모르고 있는 역사 속의 여성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 등장하여 역사극의 취향을 다변화했다. 드라마의 이야기 시점도 조선 시대에서 고려, 고조선, 고구려 시대로 내려가면서 한국 통사를 겨냥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중이다.
영웅주의 신화에 빠지다
이렇듯 텔레비전 사극의 붐은 유례없는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극 신드롬에는 두 가지 불길한 문화적 징후들이 숨어있다. 첫째는 최근의 사극 서사들은 동아시아 내 일고 있는 문화민족주의적 기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고조선을 건국한 고주몽의 이야기는 분명 중국의 동북공정론으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진 한국인들에게 민족적인 자부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내용들을 내포하고 있다. 주몽이 부여의 그늘에서 벗어나 과거 조선의 광할한 영토들을 회복하려는 기개를 펼치는 대목에서 시청자들은 중국의 동북공정론 위협을 상상적으로 해소하고자 한다. 고구려 영양왕 시대 중국 불벌을 주장했던 연개소문의 활약상을 담은 SBS의 ‘연개소문’ 역시 최근 동아시아의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의 불안한 상황을 민족의 영웅서사에 호소하는 서사를 갖고 있다.
이러한 영웅주의 신화는 문화민족주의의 전위대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가령 이순신을 예로 들어보자. 이순신을 영웅시하는 기획들은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시대 정조는 왕권강화 차원으로 충효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자 이순신의 전서를 펴내기도 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정기를 복원하는 열망으로 단재 신채호가 〈이순신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불고 있는 이순신 신드롬은 난세에 나라를 구한 영웅 이순신의 이미지가 강하다. 특히 1990년대 말 IMF를 시작으로 2004년 탄핵정국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은 장기간 혼란에 빠진 국가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영웅을 간절히 원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문화민족주의로의 확대
이렇듯 국가가 아닌 개인이 문화매체를 통해 영웅을 소비하는 현상은 문화를 매개로 하는 새로운 민족주의를 심화시킨다. 특히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사건에서 예상할 수 있는 동아시아 세력판도에 대한 대중의 심리적 불안감과, 정치·경제적 위기에 따른 중년 가장의 왜소화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남성을 욕망하는 심리가 새로운 영웅을 소비하도록 만들었다. 최근 역사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고구려 사의 영웅인 고주몽이나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론이나 일본의 패권주의의 부활에 대한 일정한 견제 심리를 반영한다.
드라마 ‘대장금’이 홍콩에서 최고의 흥행을 올릴 때, 홍콩의 한 인터넷 팬포럼에서는 난데없는 민족주의 논쟁이 벌어졌는데, 주된 논의는 중국의 역사적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홍콩이나 중국 본토 팬들은 한국의 음식, 의학 등의 문화와 기술은 대부분 중국에서 건너 온 것으로 주장하고, 일본인은 한국을 침략하는 자로, 중국인은 한국을 도와주는 자로 일반화하고 있다. 현상 역시 드라마에 대한 문화민족주의적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상품가치, 소비대상이 돼버린 ‘역사’
두 번째는 역사적 사실들이 시청률 경쟁의 소재로 과잉 활용되면서 왜곡된다는 점이다. 최근 한 역사학자가 드라마 주몽에서 부여의 지위가 중국 한나라에 대단히 굴욕적으로 나타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역사적 상황설정은 시청자들이 주인공을 동일시하는 방향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은 허구적으로 가공되어 하나의 상품형식으로 소비된다. 그래서 역사 드라마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드라마의 허구 공간에서 대중의 일상적 관심사가 되고, 즐거움을 선사하는 소비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통상적인 이미지를 비틀고 과장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역사가 상품형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황진이’나 ‘장희빈’처럼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주도하는 방식도 존재하지만, 대게는 남성주의적인 영웅호걸들이 개입한다는 점이다. 최근 대하 역사 드라마에 등장한 이순신, 장고보, 고주몽, 연개소문 등 남성 주인공들은 전쟁터에서 싸움을 주업으로 삼는 남성이며 강한 영웅호걸들이다. 이는 드라마의 새로운 주 시청층으로 부상하고 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의 여성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려는 전략을 갖고 있다. 호전적인 영웅들에게 남성성과 섹슈얼리티적 상상효과를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여성에 대한 따듯한 감성을 동시에 소유하게 만드는 이중적인 배치는 역사드라마의 ‘트랜드 드라마적 전환’이라 해도 크게 낯설지가 않다. 어쨌든 역사 드라마 제작자들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철저한 객관성이나 역사적 고증보다는 동시대적 역사적 감정을 자극하고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을 전진 배치하는 상품 전략을 내세운다.
역사 드라마의 붐은 경제 불안과 동아시아 지리적 동요의 상황에서 새로운 영웅주의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사건에서 예상할 수 있는 동아시아 세력판도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과, 정치·경제적 위기에 따른 가장의 왜소화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남성을 욕망하는 심리가 새로운 영웅을 소비하도록 만든 것이다. 영웅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은 이제 드라마 시장의 좋은 상품 소재가 되었다. 문화민족주의의 기류와 시청률 경쟁 구도가 갈수록 거세지는 상황에서 아마도 역사 드라마는 역사를 더 이상 이야기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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