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변화와 개혁 열망하는 유권자의 선택
박찬표 목포대학교 정치미디어학과 chanpyo@korea.com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압승과 ‘개혁·진보’ 진영의 참패로 끝났다. 선거 결과에 대해, 한편에서는 개혁 진보진영의 위기 및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우려를, 다른 한편에서는 유권자의 보수화에 기초한 보수정권의 장기화라는 장밋빛 전망을 하고 있다. 위기에 대한 불감증도 문제이지만, 상황에 대한 오해나 과장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먼저 선거결과를 살펴보자. 드러난 수치상으로 이명박 후보는 과반에 육박하는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 사상 2위 후보와 가장 많은 표 차이로 압승을 거두었다. 전체적으로 범개혁 진보 진영이 거둔 득표율은 범보수 진영의 절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명박 후보는 거의 모든 유권자 층에서 높은 지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세대별로 볼 때, 이명박 후보는 40대 이상은 물론이고 개혁지향적일 것으로 기대되는 젊은 유권자층에서도 정동영 후보에 비해 약 2배(20대)에서 1.5배(30대)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난다. 유권자의 이념적 분포를 진보-중도-보수로 구분할 경우(대체로 3 : 4 : 3의 비율), 이명박 후보는 보수, 중도는 물론 진보적 유권자 층에서도 상당한 지지(최소 30% 이상)를 거둔 것으로 분석된다. 지역별로 보아도 수도권에서 과반 정도의 득표율을 올렸고, 호남지역에서도 2002년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획득한 득표율에 비해 4~5%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난다.
정치에 대한 불만 심화 말해주는 역대최저 투표율
이러한 결과에 대해 언론은 한결같이 ‘유권자의 보수화’를 논하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한국 사회의 진로에 대한 광범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강변하고 있다. 과연 선거를 통해 ‘국민통합’이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다면 그 동안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경제적 갈등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선거는 이러한 갈등을 일거에 해결하는 마술을 부린 것인가, 아니면 신기루인가.
그 신기루 같은 결과의 이면을 살펴보기 위해 주목해야 할 것은 63%라는 역대 최저의 투표율이다. 제16대 대선에 비해 7.8% 포인트, 87년 대선과 비교하면 26.2% 포인트가 하락한 수치이다. 총 유권자의 37%가 투표 참여를 거부하거나 포기한 것으로서, 이명박 후보가 얻은 총유권자 대비 지지율(30.66%)을 훨씬 상회한다. 투표율 하락에 대해 일부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나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의 확산에 따른 것으로서 마치 선진국적 현상인 것처럼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지체제의 기반이 없는 한국 현실에서 이는 허구적 논리이며 잘못된 일반화이다(서구 각국 투표율을 보면, 2007년 프랑스 대선 83.8%, 2007년 독일 총선 77.7%, 2007년 덴마크 총선 86.6%, 2005년 영국 총선 61.4%, 2006년 스웨덴 총선 82% 등이다). 더 주목해야 될 것은 기권층의 구성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민주화 이후 나타나고 있는 중하층 및 젊은층의 낮은 투표율과 기권율 증가 현상은 이번 선거에서 더욱 심화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지향하는 유권자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선거에서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선거의 일차적 의미는, 민주주의라는 경쟁의 틀 내에서 국민적 합의를 도출했다는 것보다는, 기존의 정당체제와 정치 전반에 대한 불만이 더욱 증가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명박 지지는 보수화가 아니라 양극화의 반영
일부에서는 이번 선거를 통해 민주화 이후 두 번째의 여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는 완성되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높은 기권율, 정책실패의 책임을 물을 여당의 실종, 개혁정당의 정체성 상실, 진보정당의 선택이 가져오는 극도의 무력감 등은 이러한 해석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게 만든다. 대의민주주의하에서 유권자들은 자신의 이해와 의사를 대변하는 정당이 있을 때, 이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주권을 실현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개혁과 진보의 가치를 추구한 많은 유권자들에게 있어 이번 선거는, 노무현 정권을 징벌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이해와 의사를 적극적으로 실현할 기회가 애당초 제약되었다는 점에서 절반의 주권밖에 행사하지 못한 선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균열구조에 조응하는 정당체제의 형성은 정치적 민주주의 완성을 위한 일차적 과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전망이라는 점에서, 선거결과를 둘러싼 가장 큰 쟁점은 ‘유권자의 보수화’ 문제인 것 같다. 일단 보수정당을 유권자가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 말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통상적 의미를 넘어서서, 유권자 편성이나 의식의 구조적 변화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된다. 사회의 보수화란 안정 희구 세력의 증가, 사회계층의 측면에서 중산층의 증가를 말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사회양극화와 중산층의 붕괴라는 상황에 처해있다. 한국 사회의 객관적 토대는 ‘유권자 보수화’ 명제와 배치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후보의 경제 및 성장 담론에 대한 유권자 지지는, 사회 보수화의 반영이 아니라 사회양극화의 반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중하층이, 또는 자신을 진보로 인식하는 유권자가 보수정당의 후보를 지지한 것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유권자의 ‘사회적 존재와 의식의 괴리’라 할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진보정당이 부재하거나 실패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80년대 이후 미국의 신자유주의 혁명으로 빠르게 확대된 빈곤에서 지역의 빈곤층이 민주당이 아니라 공화당을 지지한 현상은 그 좋은 예이다. 양극화로 초래된 계층적 갈등을 개혁진보 정당이 동원하는 데 실패한 결과, 유권자들은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타개책을 이명박 후보에게서 구한 것이다. 일종의 ‘전도된 계층투표’로서, 그 원인은 유권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에게 있다.
다른 한편 이명박 후보가 상당수 유권자에게 보수보다는 개혁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선택한 유권자 중 상당수는 이명박 후보로 선택을 바꾸었다. 이들에게 이명박 후보가 제시한 신자유주의적 개혁방안, 예컨대 작은 정부, 공기업 개혁, 국가주도 경제·교육 시스템에 대한 수술 등은 상당한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 변화나 진보에 대한 유권자의 요구는 보수에 대한 요구보다 큰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번 선거 결과를, 유권자가 보수화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여전히 변화를 바라는 많은 유권자들이 그 방법론에서 우파적 정책 대안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적나라(赤裸裸)한 시장경제 신호탄, ‘국민성공시대’
선거결과에 대해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이 지점이다. 기본적으로 한 사회의 재화를 만드는 생산구조 안에는 이미 분배구조가 내장되어 있다. 일자리의 성격에 따라 분배가 일차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과 근로빈곤이 구조화된 상황에서 양극화의 문제는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의 문제이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사회적 연대없이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번에 많은 유권자들이 선택한 대안은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후보는 ‘국민성공시대’를 내걸고 당선되었다. 이는 곧 양극화된 현실을 보다 많은 개인적 노력과 경쟁을 통해 극복하자는 것이다. 비유하면, 비정규직에게 경쟁력을 키워서 정규직으로 승진해서 성공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결과는 이명박 후보가 이야기하는 ‘따뜻한 시장경제’가 아니라, 무한경쟁의 사회와 사적 이익을 둘러싼 통제되지 않은 적나라한 시장경제가 될 우려가 높다. 특히 사회 안전망이 구축되지 못한 한국 상황에서, 한미FTA 등에 따라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가속화될 경우 양극화의 고착화 및 심화로 사회적 갈등이 급격히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개혁진보진영, 정체성부터 바로 세워 믿음직한 ‘대안정부’로
중장기적으로 볼 때, 사회지출 수준이 OECD 국가 평균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현상황에서 앞으로 사회경제적 민주화나 분배적 정의에 대한 요구는 필연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개혁진보진영의 지지 기반이 확대되리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사회경제적 평등이나 분배의 문제를 공적 의제로 제시하고 이를 둘러싼 균열을 동원하는 정당의 존재가 그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이번 선거에서 나타나듯이 개혁진보진영의 사회계층적 기반은 언제든 우파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개혁진보진영으로서는, 이명박 정부의 실패에 기댈 것이 아니라, 정당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신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노선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국민에게 제시함으로써 국민이 믿을 수 있는 ‘대안적 정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볼 때 개혁진보진영의 전망은 어둡게 보인다. 4월 총선 이전까지 개혁진보진영이 당의 정체성과 노선 및 리더십을 혁신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우, 역사상 처음으로 대선과 총선에서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개혁세력에게 맡겼던 유권자들이 왜 이번 선거에서 철저하게 이반했는지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총선에서 공천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체제로 그냥 가는 것이 좋다는 일종의 공모 구조가 형성된다면, 그것은 공멸의 길이 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다수파인 자주파의 비현실·시대착오적 노선에 대한 극복없이 미래는 암울하다. 창조한국당이 문국현 후보의 개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얼마나 현실 정치에서 세력화할지도 의문이다.
4월 총선에서 개혁·진보진영의 패배는 불가피해 보인다. 문제는 패배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패배하느냐이다. 이번 대선처럼 정치공학적 전술에 골몰하거나 BBK 특검의 반사이익을 노리며 허송세월할 경우 2010년 지방선거는 물론 2012년 대선까지도 전망은 암울하다. 4월 총선은 일여다야(一與多野 ) 구도하에서 전개될 것이 예상된다. 따라서 대통합민주신당, 창조한국당, 민주당, 민노당 등은 여당과의 경쟁뿐만 아니라, 누가 이명박 노선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두고 치열한 야당 내 경쟁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당 정체성 확립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개혁진보세력은 ‘반민주·반개혁’세력에 기대어 자신의 정체성을 제시해온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민주-반민주, 개혁-반개혁 구도가 국민에게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함을 극명히 보여주었다. 지역, 세대, 계층, 이념 등 유권자를 나누는 여러 균열선 중에서 어느 것에 기초할 것인지, 개혁진보세력은 사활을 건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시장자유주의에 대해 미국 민주당식의 복지자유주의를 선택하든, 유럽 좌파와 같은 사민주의를 선택하든, 영국 노동당식의 제3의 길을 선택하든, 분명한 당의 정체성과 전략을 확립해야 한다. 그 결과에 따라 다음 대선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을지의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역대 대선 득표율·투표율
선거연도 당선자 득표율 투표율
13대(1987) 노태우 36.6 89.2
14대(1992) 김영삼 42.0 81.9
15대(1997) 김대중 40.3 80.7
16대(2002) 노무현 48.9 70.8
17대(2007) 이명박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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