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0년 06월 2010-06-01   2146

그 사람 그 후-권혜진 홍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


세상의 어두운 곳, 작은 구심점으로
타오르는 촛불

권혜진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

강지나 참여사회 편집위원


2008년 5월 2일 백여 명의 중고생들이 촛불을 들고 처음 청계광장에 섰을 때 어른들은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이 “누가 얘들을 모았어?”라고 생각했다. 청소년이란 스스로 이런 시사적인 문제에 조직적으로 나설 수 없는 미숙한 존재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에 저항했던 많은 독립투사들이 학생이었고,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이들도 지금으로 말하면 청소년들이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어 죽은 미선·효순이 사건 때도 많은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었다. 청소년들을 좁고 딱딱한 교실 안으로 가두는 현실을 문제 삼으면서도 청소년들이 막상 광장으로 나오려 하면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 또한 어른들이다.

청소년기에 이런 자발적인 운동을 체험했고, 결국 그 연장선상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이 있다. 현재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는 권혜진 씨를 만나보았다.


중학교 시절 실패로 끝난  ‘학생회장 직선제 투쟁’

권혜진 씨가 한창 중학교를 다니던 무렵은 87년 6월항쟁의 열기가 뜨거웠던 때였다. 신문에는 매일 독재정권에 항의하는 시위가 보도되었고, 바람을 타고 체루가스가 서울시 전역을 떠다니고 있었다. 당시 그의 학교에는 전국교사협의회(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에 가입되어 있는 선생님들이 많았고 그들이 해주는 얘기와 활동이 더욱 그러한 사회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친구들과 “대통령도 직선제를 하는데, 왜 우리학교 회장은 직선제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얘기는 토론으로 발전하고 함께 하는 친구들이 점차 틀을 갖추게 되면서 다음해 학생회장 선거가 직선이 되기 전까지는 출마하지 말자란 다짐들을 하게 되었다. 소위 ‘학생회장 직선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와 친구들은 타자기로 사업계획서를 만들어서, 조언을 듣고자 대화가 통하는 선생님 한 분을 찾아뵈었다.

“사실 두려웠다. 어린애들이 뭘 안다고 하면서 혼이나 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때 고입 연합고사도 있고 그랬으니까…그런데 선생님이 보시더니 비장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우리의 주장이 그래도 명분이 있는 거구나…’ 그때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어찌 보면 우리의 행동이 나쁜 짓인가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는 건데, 선생님이나 어른들로부터 어떤 피드백을 받느냐가 중요했던 거 같다.”   

그와 친구들이 벌였던 운동의 핵심은 학생회장 직선제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특별활동CA과 학급회의HR, 학교신문 발행 등, 전체적인 학생자치활동의 보장을 요구하는 주장들이었다. 3학년 반장들이 이 운동에 모두 동참했고 2달간 아무도 후보로 나서지 않고 직선제를 요구했다. 학부모와 선생님들의 권유로 그 중 한 명이 후보등록을 하면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여파는 오래도록 남았다.

당시 권혜진 씨가 다니던 인근의 고등학교에서는 종이비행기 날리기나 아침이슬 부르기 등을 하면서 직선제 운동을 진행했었기 때문에 권혜진 씨와 친구들은 고등학생들을 따라 4·19혁명 기념식이나 학생의 날 행사 등에 참석하기도 했다. 실패로 끝난 직선제투쟁이었지만 그때 모인 결집력으로 사회참여활동을 계속 해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직선제 운동은 다음해에도 계속 되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얘기하러 다니는 과정에서 선생님들이 그와 친구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결국 4명이 징계를 받게 되었다.

“당시 학교도 처음 있는 일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고, 우리 무리가 거의 35명이 넘었으니까 반발도 무척 거셌다. 또 중3이라 연합고사도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전학이나 퇴학은 학교로서도 부담이 있었던 거 같다. 결국 근신 30일이라는 사상 초유의 징계를 받았는데, 그때 결국 혁명이란 실패로 끝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웃음).”


“너희들에게 많이 배웠다”는 선생님의 고백

학생으로서 학교 측에 자치활동은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그렇게 큰 무리가 어떻게 조직적으로 거의 1년간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때는 그게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당연한 거였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거니까 함께 하는 무리가 많았던 거다. 또 그 주장들은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럴 때 운동에 생명력이 붙는 거 같다. 2008년 촛불의 생명력도 그렇게 생겨난 거라고 생각한다. 생명력이 있는 운동이란 자발적이어야 하고, 그 자체로 축제처럼 벌어져야 하며, 끊임없는 소통이 되어야 한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혁명적인 사건들은 청년들의 힘으로 움직여진 것이 많았다. 그들이 순수하고 세상에 쉽게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그들이 가진 에너지와 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배세력도 청년층이 움직이는 운동을 가장 두려워한다. 88년 권혜진 씨처럼 청소년운동을 시작한 세대가 현재 대중운동의 중추를 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청소년기의 열정은 흔적이 오래 남아 있는 법이다.

다음해에 권혜진 씨는 친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자신의 모교 중학교에서 결국 학생회장 직선제가 실시된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생각이 있는 선생님들이, 제자들이 스스로 움직여서 운동했던 모습에 반성하고 각성하여, 학교의 관리자들에게 학생회장 직선제를 요구했고 그런 힘겨루기 끝에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훗날 권혜진 씨는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그때 너희들에게 많이 배웠다”라는 고백을 들었다. 변화를 일궈나가는 힘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그 후 권혜진 씨는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 활동을 하며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다. 전교조가 생겨났고, 각종 대중운동의 물결이 살아나는 현장을 기타들고 함께 노래 부르며 누비고 다녔다. 기타는 중학교 때 집안 사정 때문에 겪었던 외로움을 극복해보려고 시작했던 것이었다. 어느새 기타와 노래는 그의 삶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두 곡 정도 작곡도 했었고 그 노래들은 집회장에서 자주 불렸다.

인터뷰 중에 살짝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노래를 한 소절 부르더니 지금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노래라며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노래 부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매우 행복해 보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별을 더욱 밝게 비추고
이밤에 진 별에 이름을/ 애타게 불러보네
빼앗긴 한맺힌 조국에/ 몸부림쳐 오르는
열아홉 꽃잎에 아우성으로/ 다시필 뜨거운 함성
 
밤을 지키는 너의/ 작은 빛이여
하나될 조국에서/ 참교육 햇살로 부활하라

<다시필 참교육 햇살로>  (고 김철수 열사 추모곡)

 
시민단체 최연소 사무처장의 파격

권혜진 씨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음대에 지원했지만실패하고 군대를 다녀오면서 인생의 방황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흥사단 후배들에게 자신의 노래와 이름이 여전히 전해진다는 얘기를 듣게 되면서 흥사단에 남아 청소년운동을 계속 지원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1998년에는 흥사단내에 청소년 인권연대를 만들어 두발자유, 체벌금지, 0교시 폐지 등을 주장하는 활동을 했고 구체적인 매뉴얼과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2001년에는 잠시 흥사단을 떠나 아데나워 재단(Konrad-Adenauer-Stiftung, 기독교 민주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의 싱크탱크)의 지원을 받아서 민주교육 훈련을 받았고, 인권, 갈등관리, 리더십프로그램 등등을 진행하러 곳곳을 누비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그의 꾸준한 청소년인권운동 활동이 인정을 받아 2006년 흥사단에서는 교육운동본부의 사무처장으로 그를 임명하게 된다. 시민단체 중 최연소 사무처장이었는데, 더욱 파격적인 것은 반상근으로 근무하면서 활동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흥사단의 많은 임원들 앞에서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 않고 ‘잘 하겠다’고 말했다. 보통 관리체계에 있는 사람들이 매일 나와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꼭 잘하는 것만은 아니다. 관리를 위한 관리를 할 때가 많으니까…. 저는 정말 제대로 일하는 사무처장이 되고자 했다. 청소년 관련 일을 하려면 그런 변화가 필요하다.”

교육운동본부에서는 연대활동으로 청소년 인권법 제정을 추인했고 결국 인권법이 만들어지긴 했으나 원하던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리고 2008년 촛불을 맞게 된다.

그에게 청소년운동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그냥 누군가가 통일운동을 열심히 하고, 누군가가 환경운동을 하듯이 부문운동의 하나였을까?

“청소년 운동은 물론 당사자 운동이 기본이다. 가장 바람직한 형태가 청소년들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지각해서 행동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생활에서 나오는 의제가 형성된다. 촛불의 요구는 ‘미친 교육 반대’, ‘미친 소 반대’였다. 학생들이 직접 MB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흥사단 교육운동본부는 제가 보냈던 청소년기 시절에 대한 마음의 고향 같은 것이다. 언제나 있으면 푸근하고 따뜻하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곳. 이 공간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좋은 경험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의 빚이 있다. 그 빚을 활동을 통해 조금이나마 청소년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아이들과 만나는 교육의 장에서 신뢰가 있다면…”

활동이 교육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보니 그는 전교조 선생님들과 만나서 일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때 전교조 활동에 실망한 적도 있지만 여전히 전교조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현재 좌경화교육을 한다는 논리로 전교조에 대해 총공격을 펼치고 있는 보수진영에 대해 맞설 힘도 전교조가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전에 전교조가 반성해야 할 지점에 대해서도 꼬집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존경하며 바라봤던 전교조 선생님은 그 ‘전교조’라는 타이틀로 바라보고 따랐던 게 아니었다. 그냥 저를 인정해주고, 우리들과 소통하려고 하는, 좋아하는 선생님, 그 실체 그대로 보았을 뿐이다. 아이들과 만나는 교육의 장에서 이런 신뢰가 있었다면 외부에서 아무리 그런 틀로 가두려고 해도 씌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전교조 선생님들이 그랬는지는 돌아봐야 할 때다. 그리고 이런 수세의 국면에서 스스로 움츠러들기보다는 자신의 조직과 실체에 대해 당당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 왜 전교조 출신 후보가 나서서 교육감, 교육의원으로도 나오면 안 되는가? 그런 얘기를 하면 전교조 선생님들은 너무 나서는 거 같다고 자꾸 사양하시는데 그럴 필요 없다. 그들이 아니면 누가 교육의 희망을 말할 수 있겠나?”

보수진영이 전교조를 공격하기 위해 만든 프레임은 간단했다. 전교조=좌경화교육=성적하락! 간단하지만 참 명쾌하고 매력적인 이 프레임 안에 모든 사건들을 끼워 맞추는 이미지전략은 보수진영의 장기이자 특기이다. 보수의 대표적 신문이 “무조건 반대만 하는 전교조” “전교조 선생님 많으면 학교 성적 떨어져…”라고 왜곡된 현상만 갖고 본질을 호도하는 프레임 짜기에 나서면 몇몇 정치가나 교육 공무원이 이를 뒷받침하는 사건들을 들이밀고, 거기에 대해 분노하는 학부모를 인터뷰하면 이 작전은 100% 맞아 들어간다. 전교조가 지금까지 그 프레임에 말려들어 갈 여지를 충분히 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전교조를 얘기하면 집행부의 생각을 전체인 것처럼 보기 쉬운데, 집행부의 전교조가 아닌 교육현장에 있는 선생님들 한분 한분의 전교조가 되어야 한다.”


풀뿌리, 자발성 소통이 가장 기본적인 가치

권혜진 씨는 2008년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서 활동하였고 조계사 농성, 수배, 재판을 받으며 촛불의 진통을 혹독히 겪었다. 이 과정에서 촛불정신을 이어갈 새로운 교육운동 조직체를 고민하게 되었다. 가장 기본 가치는 풀뿌리, 자발성, 소통이었고 이것을 구현하기 위한 모임으로 교육희망네트워크를 생각한 것이다. 우선 기존의 운동조직이 가지고 있었던 관성들을 깨기 위해 개인 자격으로 회원을 받고, 사회적 쟁점에 대해서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보다는 참가자들끼리의 토론이나 대중 강의를 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기획하고 있다. 현재 전국 40~50여 개의 작은 모임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지역 풀뿌리 조직들과의 소통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지역마다 풀뿌리조직의 특징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는 것이다.

“유명한 강사 대중강연을 하면 사람은 많이 모이지만 별로 감동이 없고 남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쟁점토론을 하면 소수가 모이지만 토론의 과정에서 감동이 생겨나고 결국 조직적으로 사람이 남게 되더라. 운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언어를 잃어버리고 의식으로만 가득한 죽은 언어들을 사용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언어와 나의 문화로 소통할 때 그 힘은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다. 이런 토론에는 굳이 진보와 보수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누구든지 함께 와서 토론하고 혜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만날 진보진영만 모여서 토론회하고 보수진영은 동원된 공청회만 하면 뭐하겠나? 교육희망네트워크는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운동이 아니라 지역의 풀뿌리 성원들이 만나 솔직하게 소통하고 나누는 장을 기획하려고 한다.”   

이 역시 촛불이 그에게 가르쳐준 정신이다. 아니, 20여 년 전 친구들과 처음 학생회장 직선제를 이뤄보자고 얘기했을 때 체득하게 된 정신이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