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 ‘부당거래’
조광희 변호사
‘부당거래’라니 너무 부당한 제목이다. 류승완 감독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심미안을 믿을만한 친구가 열렬히 구전홍보를 하지 않았더라면, 극장에 갈 일도 없었다. 만일 홍보담당자가 이런 제목을 제안이랍시고 결재를 올리면 이 친구와 계속 일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지경이다. 아무리 영화의 내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한들, ‘부당’이라는 매우 추상적인 단어와 ‘거래’라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를 조합해서 잠재관객을 유혹하려 하다니, 어리석은 시도가 아니라면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것이 아닐까. 아무튼 ‘부당 거래’는 모험을 감행했고, 제목이 흥행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영화는 만만치 않았다.
줄거리에 대하여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영화에 대한 예의는 아닌 것 같다. 류승완 감독이 장르 영화를 다루는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 제법 긴 러닝타임이었지만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류승범, 황정민의 연기가 작렬했다는 것만 지적하자. 한 가지 의문은 이 영화가 어떻게 검찰청의 촬영협조를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내 착각일 수도 있는데, 만일 촬영협조를 받았다면 이건 자살골이거나 아니면 검찰이 그만큼 쿨해졌다는 증거다.
세상에는 ‘공식적인 선언’과 ‘실제적인 매커니즘‘이 있다. 우리가 의무교육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공식적인 선언’이다. ‘나라를 사랑해야한다’, ‘선량하게 살아야한다’, ‘세금을 정직하게 내야한다’, ‘완전범죄는 없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면 된다’ 등이 ‘공식적인 선언’이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 3년만 굴러먹으면 ‘실제적인 매커니즘’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군대가면 바보다’, ‘줄을 잘 서야한다’, ‘세금 제대로 내고 장사하는 사람은 없다’, ‘전두환이 아직도 골프치며 돌아다닌다’, ‘부모의 재력이 아이의 스펙을 만든다’가 숨은 정답이다. 어떤 사회든지 어느 정도는 이상과 현실이 불일치한다. 하지만,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었다느니, G20이니 하고 떠드는 나라에서 이렇게까지 선언과 진실이 불일치하니 국민들은 정신분열증에 걸릴 지경이다. 아마도 이 나라의 국민치고 두 가지 상충되는 요구 사이에서 딜레마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문제에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선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군자지만 그들의 삶은 가시밭길이다. 그 반대편에는 영악한 현실주의자들이 있고, 이들은 대체로 한 세상을 잘 살다 간다. 물론 가끔 감옥에 가는 경우도 있다. 금방 나와서 또 잘 사는 게 문제지만.
이 영화 속에는 범죄자와 범죄자를 쫓는 자가 있지만 누가 정말 나쁜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진실과 허위가 구분되지 않으며, 선과 악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 서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실인지조차 은밀한 매커니즘에 의하여 재생산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서글픈 우화다. 그 현상의 본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부당거래’이며, 그것은 ‘공정한 사회’ 라는 공허한 수사아래 포장되어 있다. 조폭의 슬로건이 ‘착하게 살자’이고, 마피아가 동료를 부르는 이름이 ‘좋은 친구들’인 것이다.
누군가는 범죄자로 몰리고, 다른 누군가는 범죄자를 단죄하며, 결과적으로 어느 누군가는 처벌되지만 그 과정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일 그 사회가 건강하다면, 우리가 공식적으로 배운 것이 상당히 정교하게 실현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언론 보도만 보아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으며, 검찰의 기소만 보아서는 누가 죄인이고 누가 죄인이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이 영화는 비록 주인공인 류승범의 캐릭터를 드라마적으로 과장하고, 황정민의 선택을 극단적으로 그렸지만, 우리 사회가 처한 전도된 현실을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권력이 미시적으로 작동하고, 법이 모욕을 당하며, 진실이 왜곡되는 살풍경한 현실의 속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선량한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공정한 사회’를 바란다
그런데 ‘공정한 사회’가 아닌 ‘부당거래’의 사회를 사는 우리는 삶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여기 두 갈래 길이 있다. 인간의 길과 반인간의 길. 만일 인간의 길을 택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길을 걸을 것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아주 오래된 영화 <플래툰>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인간성을 야수로 만드는 베트남 전쟁터에서 그래도 인간으로 남고자 했던 주인공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글에서 비장하게 쓰러져 가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장면은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진다. 비인간적인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독일군에 속한 주인공이 가까스로 인간의 길을 걸으려 하자마자 자신의 그러한 선의 때문에 안타깝게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아주 엄격하게 말해서 ‘인간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논리필연적인 원칙은 없다. 나는 그런 형이상학을 포기한지 오래되었다. 그것은 그저 각자가 감당해야 할 윤리적 결단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 안에서 솟구치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간다. 나는 인간의 길을 포기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인간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과 그들의 운명에는 관심이 있다. 나는 <플래툰>을 보고 감동에 젖으면서도 그 장면을 비장하게 미화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택하는 것이 중요하지, 악에 이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할 수 있다. 심지어 악에 패배하는 것조차 아름답다고 여기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을 택했다는 이유로 악에 패배하는 것은 가장 끔찍한 일이다.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하다는 사실 자체에서 자기만족을 얻는 것에 그치면 안 된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살아남아야 한다. 야수들이 판을 치는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고, 내 마음의 선을 이 세상의 선으로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를 냉철하게 고민해야 한다.
선량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선량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남들도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경향이 있어 선량한 이들의 있지도 않은 가면을 벗기고 싶어한다. 일이 그렇게 되면 누가 이길지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가슴 아프다. 조금은 인간이기도 하고, 조금은 야수이기도 한 나는,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이 ‘부당 거래’의 세상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좀더 많이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그들의 시체 위에 건설된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맞이하는 ‘진짜 공정한 사회’라면 제법 아름다울 것 같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