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를 모르는 시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국민MC’ 강호동이 자주 쓰는 표현 중 하나가 ‘진정성’이다. 고난을 이기고 성공한 명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무릎팍 도사>) 강호동은 진정성이 성공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거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1박 2일>에서도 강호동은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연예인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노숙 버라이어티’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추측하건대 강호동이 말하는 ‘진정성’은 아마도 ‘정직하고 성실한 노력’이나 ‘리얼리티에 충실하기’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개념은 강호동이 사용하는 의미보다 훨씬 깊은 울림을 갖는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2009)이라는 놀라운 책에서 진정성을 “좋은 삶과 올바른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체계이자 도덕적 이상으로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미덕으로 삼는 태도”라고 정의한다.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 대개 사회적인 모순과 억압 등에 의해 좌절되기 때문에 진정성을 추구하는 데에는 언제나 사회의 공적 문제에 대한 격렬한 항의, 비판, 참여가 동반된다고 김홍중은 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구인 진정성은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벼리게 만들고, 그 속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적 억압과 모순에 대한 저항 행위를 파생시킨다. 역사는 바로 이런 투쟁과 저항의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진정성의 시대
불행하게도 내게 이 시대는 철학적, 사회학적 의미의 ‘진정성’이 이미 죽어서 시체가 되어버린 시대다. 진정성이 자아와 사회의 변증법적 충돌이라면, 이 시대, 김홍중에 따르면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 시대는 이러한 변증법적 갈등과 모순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사회적 토양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생존’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가 된 사회에서 ‘자아의 실현’이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저항’과 같은 진정성의 메커니즘은 부차적이거나 불필요한 문제로 밀려나는 것이다. ‘내가 진정성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 ‘내가 풍요롭게 살 수 있느냐 없느냐’만이 오로지 중요한 문제로 남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정의’를 현실화할 수 있는 체제를 고민하고, 예수가 ‘사랑’으로 가득한 세상을 염원하고, 헤겔과 마르크스가 ‘자유의 영역’이 ‘필요의 영역’을 대체하는 역사의 진보를 꿈꾸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저 살아남는 것’만이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역사 이후’post-history라는 개념이 중요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성’이 일주일에 수천만 원의 출연료를 받는 연예인들이 하루 이틀 리얼하게 ‘풍천노숙’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쓰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진정성이 똥값이 된 현실을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인과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통한 역사의 진전이라는 진정성의 메커니즘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생존만이 중요한 존재, 곧 ‘동물’이다.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이나, 바디우가 말하는 ‘인간-동물’은 바로 이러한 존재를 의미한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저항하지 않으며, 그것을 원래 그러한 상태로 인식한 채 그저 그 속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최고의 목적인 존재. 어떻게든 ‘먹고사는’ 생존이 정언명령이 된 존재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치열한 생활의 과정과 그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정신적 쾌락이다. 일상의 대부분 시간과 자신의 생명에너지를 ‘직장’이라는 이름의 자본 아래에서 빨려 녹초가 된 인간들에게는 남은 시간에 산처럼 쌓인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가볍게 푸는 것이 중요해진다. 대중문화가 갈수록 말초적인 쾌락의 제공에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무런 생각과 고민 없이 오늘 쌓인 독을 푸는 데는 미남 미녀들의 섹시한 춤과 노래, 반복적인 후크송과 일차원적인 말장난만한 것이 없다. 오늘 공중파 연예프로그램들은 모조리 이러한 요소들을 ‘콘텐츠’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량생산된 아이돌 그룹들의 단선적인 음악, 천편일률적으로 선정적인 몸짓, ‘깍듯하고 예의바른’ 태도가 오늘날 대중문화의 주류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즐거움과 귀여움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10대라도, 그것이 컨베이어벨트에서 찍혀져 나온 공산품 같은 것이라도, 그것이 미학적인 새로움이라곤 전혀 없는 텍스트라도 용인되는 것이 이 시대의 문화다.
마치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부끄러움도 무릅쓸 수 있다는 청년들의 ‘당당함’처럼 이 시대의 문화는 부드럽고 섹시한 쾌락을 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좋다. ‘옳다/그르다’라는 말이 사라지고 ‘좋다/나쁘다/맘에 든다/후지다/간지난다’ 등의 표현만이 창궐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권력
‘진정성’이 물러간 자리에 등장한 ‘즐거움’의 감수성은 그래서 ‘수치’를 모른다. 돈을 벌 수 있다면, 일자리를 준다면, 학점을 딸 수 있다면, 즐거울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치열함’은 궁극적으로 ‘뻔뻔한’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군대의 의무에서 빠져나간 ‘신의 아들’들로 구성된 대통령 이하 국무회의가 외치는 ‘전쟁불사’의 수사, 한나라당 대표의 ‘보온병’과 ‘자연산’ 발언, 노동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도 돈 줬으니 괜찮다는 사장, 무상급식하면 나라 망한다며 설레발치는 서울 시장 등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없는 인간쓰레기들이 난무하는 사회가 이렇게 탄생한다. 이런 뻔뻔한 엘리트들 아래에는 역사도 사회도 진보도 내 문제가 아니니 그저 일단은 나만 살면 된다며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는 ‘평범한’ 대중들이 있다.
‘수치를 모르는 생존과 즐거움의 추구’가 주된 감수성이 된 사회는 가장 자유로운 듯 보이나 사실은 가장 억압적인 사회다. 신자유주의가 축조한 철저한 사익중심 사회의 ‘바깥’은 없기 때문에, 이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도태된다면 살아날 방법 역시 없다. 모두가 이 구조 속에서 알랑거리며 사는 한 생존할 수 있고 즐거울 수 있으나, 그 구조에 의해서 내쳐진 사람이 다시 안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지금은 붙어있으나 후에 내쳐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극단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일상으로 여기며 산다. 이 공포와 두려움이야말로 권력이 손대지 않고도 사람들을 통제하는 핵심적 수단이다. 각자가 각자를 통제하면서 움직이는 사회 전체, 이 끔찍한 체제에 균열을 내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그 균열은 단순한 정치적 계산에 의해서 절대 생기지 않으며, 각자가 각자를 변화시키는 문화적, 아니 거의 종교적인 재탄생의 노력을 요구한다. 이 시대의 권력은 이미 ‘내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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