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아무리 ‘우왕좌왕’하더라도 시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이렇게 해서 새해가 되었다. 새해는 정말 ‘새해’가 되기 바란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잘 사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일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가리켜 ‘잘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보통 ‘돈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어법에서 ‘잘 사는 사람’은 곧 ‘돈 많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배금주의에 대해 오래 전부터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배금주의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이 배금주의적인 어법은 잘 보여준다. ‘돈이 많다’는 것과 ‘잘 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이 둘은 이를테면 똥과 금의 차이처럼 분명해서 누구라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돈 많은 것’을 곧 ‘잘 사는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
이런 혼동이 최근에 생긴 것은 아닌 것 같다. 1970년대 초의 신문을 보면 경제성장에 따라 배금주의가 확산되고 있어서 큰 문제라는 식의 논설들이 나타난다. 요컨대 박정희가 추구한 무조건적인 경제성장, 다시 말해서 경제성장제일주의에 따라 ‘돈이 최고’라는 의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박정희의 경제성장제일주의에 따라 배금주의가 널리 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1970년대에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라는 노래가 불리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박정희 정권이 퍼트린 배금주의가 이런 노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배금주의는 훨씬 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라는 노랫말은 본래 민요의 한 구절이다.
애닯다 세상사람 돈이면 만사형통
이 놈도 저 놈도 돈만 아네
사람나고 돈났지 돈나고 사람났나
돈만 아네 돈만 아네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제대로 된 것이었다면, 이런 식의 노랫말을 낳은 배금주의를 없애거나 약화시켰어야 했다. ‘사람 나고 돈 났지’라는 노랫말은 가난한 시대의 불평등한 사회상이 낳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난에서 벗어나면서 이런 노랫말은 잊혀졌어야 옳았다. 그렇게 되지 않은 까닭은 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기는 했어도 불평등은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부유한 나라 가난한 백성’의 상황이 나타난 것이다.
박정희 시대는 무엇보다 ‘정치적 독재’ 때문에 비판받는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사회적 결과이다. 박정희 정권의 최대 약점은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러한 결점을 경제성장으로 메우려 했다. 박정희 정권은 무조건적인 경제성장제일주의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의 경제성장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곧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 박정희의 철권통치 18년 동안 이 사회는 철저히 무조건적인 경제성장제일주의를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다. 정부조직에서 시작해서 산업구조, 기업구조, 노동구조의 모든 것이 경제성장제일주의형이 되었고, 이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경제성장제일주의는 사람들의 무의식까지도 지배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가난한 시대의 배금주의를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이용해서 자신의 지배를 확립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 이 사회를 역사상 최악의 배금주의 사회로 만들어 놓았다.
박정희가 단지 독재자이기만 하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가 만든 문제는 지난 10여 년의 민주화를 통해 상당히 해결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그렇게 되지 않았다. 민주화는 되었어도 불평등은 더욱 심해졌고, 경제성장제일주의는 더욱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박정희가 내걸었던 ‘선성장 후분배’의 불평등 논리도, ‘환경보다 경제가 우선’이라는 자연파괴 논리도 바뀌지 않았다. 물론 분배에 애쓰겠다는, 환경보호에 애쓰겠다는 소리는 곳곳에서 들려온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지니계수가 보여주듯이 분배문제는 계속 악화되고 있고, 환경지수는 비교할 나라를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부자 되세요’라는 한 신용카드회사의 광고문구가 최고의 인사말로 널리 퍼진 것은 이 때문이다. 비인간적인 배금주의의 사회가 이런 인사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황신혜밴드는 이 나라가 소비사회의 풍요를 한껏 구가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 1990년대 말에 다시금 ‘사람 나고 돈 났지’를 외쳐 부르게 되었다.
만나고 헤어지고 울다가 웃는세상
사람나고 돈났지 돈나고 사람났나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밑에 사람없다
IMF의 관리경제 아래서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가 사상 유례없이 악화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사람 나고 돈 났지’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노래가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황신혜밴드의 노래는 특수한 상황의 산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IMF의 관리경제가 끝났어도 지니계수는 오히려 더 커지고 있고, 한탕을 노린 ‘대박의 꿈’은 더욱 더 널리 퍼지고 있다. 이 사회는 배금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이 사회가 모시는 가장 큰 신은 ‘돈’이다. 이 사회는 ‘돈 사회’고, 이 나라는 ‘돈 나라’다. 이 사회의 배금주의는 복지를 무시한 경제성장제일주의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은 곧 자유이기도 하다. 특히 이 나라와 같은 천민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은 행복의 결정적 자원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뚜렷한 후진성의 지표이다. ‘돈 많은 것’과 ‘잘 사는 것’은 다른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혼동에서 벗어날 충분한 능력이 있다. 배금주의를 조장하는 반복지적 천민자본주의가 그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을 뿐이다. 부디 새해에는 이 천민자본주의를 확실히 개혁해서 정말로 ‘잘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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